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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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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 2:1-4)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확한 관찰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얼마나 잘 읽었는지 한 번 물어 봅니다. 다락방에 아주 강한 바람이 불었다. 맞습니까?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다락방에 불이 임했다. 맞습니까? 불의 혀처럼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믿는 성도 치고 성령 충만을 원치 않는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받으려는 이유를 각기 다릅니다. 기도를 더 잘하기 위하여, 말씀을 더 잘 깨닫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더 잘하기 위하여 등등. 사도행전 2장을 대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방언을 한다, 혹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성령 충만을 받을 때마다 나타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은 초대교회 사람들에게만 임하고 오늘날은 존재하지 않는 일회적 현상도 아닙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 나타난 현상은 특이한 것이지만 성령 충만은 오늘날도 하나님이 택하신 성도들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교회 직분이 있거나,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저절로 임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있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교회사에서 이정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약교회가 탄생되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었고, 어떤 변화를 경험하였는지 살펴보며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에 동참함으로 기쁨과 담대함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삼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세를 지도자로 앞세우고 400년간 종살이하던 애굽을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 전 날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집은 하나님의 천사가 그냥 넘어갔다고 하여 유월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월 십사일이 되면 유월절로 지키고 그로부터 한 주일을 무교절로 지킵니다. 한 주간을 발효되지 않은 떡을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성회로 모이며 출애굽을 기념하였습니다 (레 23:5-6).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 이후 첫날을 초실절이라 하여 추수한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드려서 요제로 하나님께 드리고 수양을 번제로 드리고 또한 소제와 전제를 드렸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죽었듯이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초실절에 추수한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리듯이 예수님은 초실절에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두고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합니다. 

이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르는데 맥추절(출 23:16) 칠칠절 (34:22,23)이라고도 합니다(레 23:15,16). 이 절기에는 떡 두 개를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았는데 이는 추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요, 떡을 바침으로 그해의 추수 전체를 거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더구나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하여 주신 지침이기에 율법의 말씀대로 살면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성령을 허락하신 것도 율법을 주신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주신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택하신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하시며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 하셨기에 가룟 유다 대신 제자가 된 맛디아까지 포함하여 열두 제자, 평소에 예수를 섬기던 여자들,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 어머니 마리아와 그 동생들 모두 합하여 120명 정도가 다락방에 모여 베드로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이 누구나 알 수 있게 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날에 집안으로 아주 강한 바람이 밀려들어오는 것 같은 소리를 누구나 들었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를 때 불꽃이 여러 방향으로 퍼지듯이 불의 가지 같은 것들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누구나 보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모습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와 비슷합니다. 

출 19:16-18, “마침내 셋째 날 아침이 되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산양 뿔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진에 있는 모든 백성이 두려워서 떨었다. 그 때에 시내 산에는 주께서 불 가운데서 그 곳으로 내려오셨으므로, 온통 연기가 자욱했는데,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다.” 여기에서 바람과 불은 성령의 능력의 상징들입니다. 

성령은 영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기에 성령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만약 다락방에 일어난 것과 같은 분명한 사인이 없었다면 120명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기에 모여 마냥 기도하다가 지쳐 버렸거나 그냥 흩어져 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임재를 느낄 수 있고, 자기들의 입이 성령의 인도대로 움직여지는 이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표적을 통하여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표준새번역을 보면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방언, 능력 행함, 기도, 예언 등의 현상을 기대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120명을 압도하였고, 그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자기들도 알지 못하던 각국 언어들로 일제히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때마침 오순절을 맞이하여 각 나라에 흩어져서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유대 땅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많이 모였다가 갈릴리 출신의 억양을 가진 성도들로부터 자기들이 태어나서 살고 있는 ‘각 나라의 언어’로 듣게 되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듣고 소동하여(6절). 다 놀라 기이히 여겨(7절) 다 놀라며 의혹 하여(12절) 어찜이뇨(8절). 

비록 그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혹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주정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자들이 취하기는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하였습니다. 성령이 제자들을 사로잡으니 능력이 생기고 그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율적으로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하나님의 큰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증거 하는 무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창세기 10장에는 노아 후손들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장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말과 행동을 하며 타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사람들의 결의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의지를 나타냅니다.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한 사람들이 한 언어를 가지고 행하는 일은 ‘인간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위대함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견주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탑을 쌓던 성을 혼란을 의미하는 ‘바벨’이라 부르십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과 방자함을 상징합니다. 인간들은 힘을 들여 하늘에 닿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살피시고 심판하십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무모한 인간의 시도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극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는 종말에 혼돈의 언어에서 회복된 상태인 하나의 언어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언급합니다.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습 3:9) 

누가는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행 2:9-11). 

온 인류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길이 열려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제는 민족적인, 지리적인 한계를 넘어서 누구나 복음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되었기에 오순절은 성령 강림절일 뿐 아니라 신약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의 또 다른 의미는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 충만하셨습니다.

눅 1:20,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행 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무엇에 취한 자라고 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생을 주관한다고 생각합니까? 성령에 이끌리는 삶입니까? 자기 욕심에 이끌리는 삶입니까?  

성경은 하나 됨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바벨탑을 쌓으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게 함으로 온 민족을 사방으로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그 언어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분리와 흩어짐, 혼돈과 갈등이 인간의 오만함과 죄의 결과였다면, 연합과 이해, 하나됨과 소통은 성령님의 강림을 통해 이룩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 더 나아가서 이 사회에 갈등으로 얼룩진 나누임이 있다면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족이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먼저 화해를 연습하고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도간의 연합 뿐 아니라 성도와 성도 간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 됨을 위하여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1-22)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하여 반복적으로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하나됨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하나 됨은 그들이 세상에서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며 동시에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되심을 알게 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세상은 교회와 우리를 다시 주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전도 수단도 무력해집니다. 하나 되려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건강한 공동체는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있지만 그 문제가 생길 때 남을 탓하기보다 내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문제가 있어도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나가야 합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엡 4장 2~4절을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일을 잘해보려는 열심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생기는 갈등이나 의견 차이를 지혜롭게 잘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화평하고 화해하는 것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야 합니다. 
 
다윗의 평생의 꿈은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은 받으셨으나 건축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허락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전쟁을 하면서 단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대적들로 인하여 다윗 때는 이스라엘에 아직‘안식’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쟁에 이긴 결과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에 전쟁이 그치고 화평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방에 두려움을 주셨기에 감히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넘보는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안식을 가져오고 다윗이 가져온 평강의 기초 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됩니다. 다윗이 전쟁에 이길 때마다 거둔 수많은 전리품들을 모아 건축할 재료로 준비하였습니다. 성전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에게 여호와를 위한 집을 지으라고 당부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에게 성전을 짓는 솔로몬을 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샬롬이 없을 때 하나님은 성전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예배당 마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역 환경을 upgrade 하여 좀 더 주님을 잘 섬겨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 생각이 다르고 처한 형편이 다르다 보니 접근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나뉨이 있고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됨을 깨뜨리면서까지 무리하게 건물 마련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 마련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정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사랑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온 건지, 아니면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런 건지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도 ‘아하 그 사람이 그래서 그렇게 했구나’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제자들은 더 이상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향해 담대히 예수 부활을 선포하며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증거했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모든 자원을 공급하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말세를 사는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까?

1)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확신도 갖고 사명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그들 스스로 복음을 역동적으로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위로부터 주시는 약속된 성령을 받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임함을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모하며 힘써 기도했더니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부어주신다고 말했습니다(사 32:15). 하지만 사도들은 그 약속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과 연결 지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지를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임할 성령을 다시 한 번 언급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임할 성령은 그들에게 권능을 부어줄 것이다, 그 성령의 권능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이 땅의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증인임을 알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모인 무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역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바울이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들을 깨달아 각자의 삶에 적용하기 위함이요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기 위함입니다.   

3)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락방 기도모임에는 제자들은 물론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친동생들도 참여하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체험하였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단지 제자들의 열정을 높이거나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간증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사역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불처럼 바람처럼 임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여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있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뿐 아니라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치유와 회복과 화합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화평의 근원이 되신 주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저희들을 위하여 당신의 피를 흘려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의 띠로 하나 되게 하신 은총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날마다 남을 낫게 여기며 이해하여 용서하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모든 교우들을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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