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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각 가족대로 그 식구대로 믿어야 (출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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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가족대로 그 식구(食口)대로 믿어야 (출 12:1-4)

식구라고 하는 말은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식구는 식솔食率이라고도 하는데 집안에 함께 딸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을 마감하고 출애굽을 하기 전 사건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이나 민족적 동질성 차원의 사향심의 발동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 사건은 희생의 피를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대속의 원리를 보여주는 영적운동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고 양의 피를 문설주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가 애굽 땅을 칠 때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14절에 『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유월절(Pass over)이라고 합니다.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했습니다. 이 유월절이 신약에 성찬식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궁극적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새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는 구원역사의 신기원을 이루는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Ⅰ. 하나님은 가족(식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장 3-4절에 『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가족중심의 공동식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 단위로 식사를 하게 한 것은 혈연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이 한자리에서 양고기를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식구가 적으면 이웃가족과 연합해서 한 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형편(남여노유)과 식사하는 식구들의 식욕을 감안해서 잡으라는 말입니다.

다 먹어야만 하는데 만약 남으면 불에 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고기를 먹다가 남아서 아침까지 두면 더럽혀지거나 소홀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는 것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양고기나 신약의 떡은 모두 흠없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가족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한 사람이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50절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요한복음 6장 40절에 『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상을 구원하는 것이 존재의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34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가 새 가족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찬은 일차적으로 새 가족의 확인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새 일을 하기 위한 충전입니다.

요한복음 7장 16-17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혈연의 가족이 영적 가족으로 새롭게 변화가 아닌 창조가 되어야 합니다.


Ⅱ. 신령한 영적 가족(식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가정입니다.

여호수아 24장 15-16절에 『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임종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바알 우상이냐 하나님이냐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천명하는 여호수아를 따를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향후 저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내 가족이 짐 되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는 때는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Ⅲ. 신령한 영적 가족(식구)은 탁월한 윤리와 도덕성을 견지하는 가정입니다. 

1) 부모에 대한 공경윤리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것은 제 5계명으로 인간에 대한 계명 중에는 으뜸이 되는 계명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명에 차등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공경"은 히브리어로 "카베드"( )인데 이것은 "간"肝이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거운 것", "영광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모를 무겁게 여기고, 존경하고 간肝처럼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부모는 이 땅에서 자녀에게 하나님을 대행하는 명령권자입니다. 

2) 자녀에 대한 사랑윤리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부모가 자녀를 분노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라는 의미 외에 부모의 권한을 남용하여 자녀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자녀는 우연의 열매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분깃으로 나누어주신 열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자녀는 거룩하게 태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자녀는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영생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트랜트 회의 반박문」에서 강변했습니다. 
이러한 필연적인 사실에 너무 고무된 나머지 현대인들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자녀에 대한 부권과 모권이 상실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자유가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며 부권과 모권이 주의 교양과 훈계를 일탈逸脫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3) 부부에 대한 애정윤리입니다. 

마태복음 19장 4-5절에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5절에 『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칼빈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괴물(monster)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일부일처의 원리를 잠시 마음속으로라도 벗어나는 것은 죄악입니다. 무엇보다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는 부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일부다처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다처는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의도하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다처는 인간의 죄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의 조정으로서 단지 묵인되거나 허용된 것입니다. 일부일처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교훈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이 일부일처였습니다. 일부다처는 하나님을 배역한 죄 많은 사회에서 발생한 것입니다(창 4:23).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한결같이 일부다처로 인하여 인간들은 고통스러웠고 더욱이 솔로몬은 일부다처로 인하여 패가망신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의도하거나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사악할 정도로 완악하기 때문에 다른 죄들과 같이 일부다처를 허용 내지는 묵인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 만큼 일부다처를 심히 미워하십니다(말 2:16). 왜냐하면 일부다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증거하는 남편과 아내의 이상적 관계를 흐려놓기 때문입니다. 

4) 형제에 대한 화목 윤리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형제들과는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화목은 희생과 용서와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모든 경건한 자의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정들은 수많은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존 하워드 펜"이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서 모든 이의 애창곡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가정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즐거운 나의 집을 부른 것은 독신을 후회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나아가서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노래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가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가정은 크리스천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은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그 누구도 되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가훈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고 수입과 지출의 계정과목이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입법이 되고 사법이 되고 행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정의 출발이 되고 그 가정의 계승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정을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한문은 뜻글입니다. 글자 글자마다 이중 삼중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손자"의 손孫자와 대 죽竹자는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밤 율栗자와 떨 율慄자는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대추 조棗자와 아침 조朝자도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樂자는 즐거울 락과 풍유 악, 좋아할 요로 쓰입니다. 愛자는 사랑 애와 아낄 애, 仁자는 어질 인과 사랑할 인자로 쓰입니다.

현대인들은 사랑 애愛자만 알았지 아낄 애愛자는 모르고 어질 인仁자만 알았지 사랑할 인仁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양고기를 먹어야 출애굽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먹고 마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묘비에는 R.I.P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 속에 잠들다"라는 라틴어 Requiescant In Pace의 약자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 글자가 허구일 뿐입니다. 저는 R.I.P 앞에 In Jesus Christ라고 넣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이사야 43장 11절에 『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전에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질고 착하다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 말고 나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희생적이고 애타는 마음이 있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했습니다. 

나 혼자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는 대표성이 없습니다.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양을 잡고 양을 먹듯이 각 가족대로 다 식구대로 믿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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