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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기할 수 없는 토양 (마 1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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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토양 (마 13:18-23)

 
복음주의 기독교의 장점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을 막연하고 애매한 것으로 설정하지 않고 누구든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가까이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전도 집회에서 믿을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집회 특징이 설교가 끝난 다음에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앞으로 초청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영접기도를 시키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영혼의 구원을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구원의 확신’이란 단어입니다. 전도폭발 학교에서 사람을 전도할 때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당신이 오늘 저녁에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해야만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신이 없는 영혼은 불안합니다. 그리고 손해가 막심하지요. 진짜 구원을 받았다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복음주의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자기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이것이 복음주의 기독교의 장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영혼의 구원은 확신할 수 있지만 자기가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빗대어 말하면 사람이 자기가 옥토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느냐?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 칼빈의 신학이 옳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신앙 상태를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열매를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복음을 듣는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복음의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누가 어떻게 응답할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미리 알 수 있다면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만 씨를 골라서 뿌릴 것입니다.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곳에 널리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재테크의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어디에 돈을 넣으면 수익이 날지 모르기 때문에 분산해서 리스크를 줄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수익이 날지 안다면 거기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할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한 가지 특이한 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자기의 선교전략이나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울 정도의 인물이라면 충분히 그래야 될 것 같은데, 바울은 선교사역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 어디를 공략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어디를 선교하겠다. 오대양 육대주가 나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게 되리라.’ 이런 식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겸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을 알고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한 사람의 전략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선교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먼저 간 사람이 임자에요. 수많은 성도들이 저마다 복음을 들고 사방에 다니면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빌립이 사마리아를 선교하지 않았습니까.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기 위하여 누구의 허락을 받은 게 아니고 선교단체가 회의를 하고 전략을 짜서 아무개는 어디로 가라, 아무개는 어디로 가라, 이런 결정을 내린 결과로 빌립이 사마리아를 찾아 간 게 아닙니다. 핍박의 결과로 교인들이 흩어지는 중에 빌립도 흩어지면서 사마리아에 가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빌립을 크게 사용하시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마 빌립 자신도 이런 결과가 이뤄질지 미리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을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빌립을 인도하여 우연히 에디오피아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한 사람이나 계획이나 어느 단체의 비전이나 전략보다도 앞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더 즉각적입니다. 성령은 일부터 일으키시고 봅니다. Texas식 정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먼저 총부터 쏘고 그 다음에 질문을 하다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누가 집에 침입을 했는데 총부터 쏘고 ‘누구세요?’ 마음에 듭니다. 이처럼 성령도 일부터 일으키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이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하신 후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고 베드로가 설명한 것이 3,000명을 세례 받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고넬료의 식구들이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은 후에 사도들이 모여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가하느냐?’를 의논한 것이 첫 예루살렘 회의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일을 일으키시고, 사람은 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것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린 후에야 알 수 있습니다. 미리 알고 뿌리는 것이 아니에요. 미리 안다면 응답할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뿌릴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사건이 생긴 후에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강가에 갔다가 거기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하나님이 루디아라는 여자의 마음을 열어 청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의 첫 성도가 루디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계획으로 되는 일입니까? 제가 기쁜소식교회를 개척한 후에 누가 교회를 올지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떤 타깃을 정하여 전도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말씀의 씨앗을 뿌린 것뿐이고 말씀에 응답하고 찾아온 분들이 저희 교회 성도님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에요. 

어떤 분들은 ‘기쁜소식교회 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마치 사람의 의도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 의지로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하리라’ 하셨어요. 기쁜소식교회 성도님들은 저에게 고마운 분들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게 보내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저의 설교를 듣고 응답하신 분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저에게 옥토와 같은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다 옥토라는 말은 아니에요.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일반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별의별 사람이 있고 별의별 반응이 있다는 얘기에요. 다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길 가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 요즘에 화제가 되었던 엘지 유플러스에 전화한 할머니 얘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못 알아듣습니다. ‘엘지 유플러스입니다.’ 그러니까 ‘불났다고? 엘지가 불났다고?’ 나중에는 ‘목욕탕에 불 났다고?’ 천국에 가려고 해도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가 최대한 쉽게 말하려고 하지만 이해 못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마귀의 유혹은 집요합니다. 마귀는 말씀을 중심으로 방해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린 것을 빼앗나니’ 마귀의 방해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에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에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된다고, 최소한 깨달아야 영적인 혜택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토양은 흙이 얕은 돌밭이라고 했습니다.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이것이 남비식 신앙입니다. 쉽게 뜨거워지는데 감정적으로 흥분하길 좋아하는데 그러나 신앙은 아시다시피 흥분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쉽게 뜨거워지는 만큼 쉽게 식어요. 예수님 비유에 먼저 가서 일하겠다고 대답한 아들이 안 갔다고 했어요. 처음엔 안 가겠다고 대답한 아들이 가더라고 했어요. 첫 반응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흥분하는 사람은 오히려 수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흥분하실 때 제가 덩달아 맞장구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점잖다, 신사적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세 번째 토양은 가시떨기라고 했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해당됩니다. 이 사람들은 말씀도 깨닫고 깊이도 있는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염려에 말씀의 기운을 빼앗겨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네 번째 토양이 옥토입니다. 기름질 沃, 땅 土. 기름진 땅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다른 복음서에는 추가로 ‘착한 마음으로 인내하여 결실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옥토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열매를 보고야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상태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두 번째 토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쉽게 흥분하는 사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입니다. 진짜 옥토인 사람은 신중하고 처음에는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이것이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준비가 되어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인내한다고 했는데 착한 마음이란 무슨 뜻이냐? 따지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에게 따지지 않고 사람에게 따지지 않고 교회에 따지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됐느냐? 불공평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교회가 이렇다, 크리스천들이 저렇다’ 투정하지 않습니다.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인내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장 효험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당장 뭐가 바뀌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우물가에서 숭늉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말이 많지만 말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비유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말씀들은 사람 중에 제대로 열매를 맺은 사람은 25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75는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습니다. 75:25에요.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75는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포기하라는 말이냐? 그럴 수 없지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연이 없는 게 아니고 말씀을 듣고 믿음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들인데 그들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 사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목회 사역이란 무엇이냐? 25의 옥토가 나머지 75를 권면하고 도와주는 것이 교회 사역입니다. 그래서 길 가와 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시청각 자료를 사용하고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다고, 그래서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음이 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리고 흙이 얕은 돌밭 같은 사람들에게 깊이를 주기 위해서 또한 노력합니다. 

인생을 너무 쉽게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또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좀 더 인생에 인내하고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고 깊이를 주어 뿌리를 내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가시떨기 같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시험을 뿌리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귀중한 것과 덜 귀중한 것, 핵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옥토 같은 사람도 수고하다가 낙심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회 사역이요, 이것이 목회 사역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75를 포기하려고 하셨다면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함께 서로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권면하여 마음이 강퍅하여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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