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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권능을 받게 하는 성령 (행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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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을 받게 하는 성령 (행 1:4-8)

사람의 마음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지·정·의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균형의 문제입니다. 대체로 지적인 사람은 의지에 약하고 감정적인 사람은 지성이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또 의지적인 사람은 분위기가 부족하고,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가 의지가 약하며 변덕이 많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어느 쪽으로든 조금씩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감정적인 사람이 있고, 혹은 의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완벽한 줄로 착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인간은 드뭅니다. 그러나 원리적으로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적절하게 균형이 되고 합쳐질 때 비로소 힘이 되고 온전한 인격형의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지식은 대체로 과거에 의한 합리적인 이해를 말합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다는 것은 지나간 얘기를 많이 안다는 것입니다. 역사나, 과학이나 지난 것을 많이 안다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나 지혜란 미래지향적이요,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함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식이 많아서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명하지만 지금 현재 부딪치는 사건에 대해서는 처리하지 못하고 당황합니다.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혜가 지식보다 더 소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곧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은 별개의 것입니다. 능력은 지식에서도 지혜에서도 아닌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명적인 힘이요, 내적인 동력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확신에서 합리적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까? 알고 깨닫고, 느끼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합리적인 이론은 알겠는데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기에는 정말 중요한 사랑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에서 합리적인 이론도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이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3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 훈련에 소비하셨습니다. 많은 다른 사람에게보다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고, 보여주고 때로는 제자들만 보내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귀신 쫓고, 병도 고치라는 실습도 시켰습니다. 제자들은 들었고,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체험에 그쳤습니다. 원래 갈릴리 어부였던 베드로를 주께서 불러서 수제자로 삼았습니다. 3년 동안 보여주셨고, 가르쳤고, 또 수제자로서 권위도 주셨습니다. 3년 동안 완전히 예수님과 동행했고 십자가 사건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도 만나는 경험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일을 위해 돌아가 버렸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3년 전에 버렸던 그물을 다시 잡고 밤 새워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보았고, 들었고, 경험했고, 깨닫기까지 했지만 무기력했습니다. 알았지만 행할 수가 없었고 합리적인 이해가 있었지만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끊어야 됨을 압니다. 그러나 끊지 못하고, 가야 할 줄 알지만 가지 못합니다. 용서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남에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자기는 용서 못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식이 능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혜가 능력의 전부도 아닙니다. 능력은 또 다른 하나로써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내 마음을 내 뜻대로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내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지식으로도 지혜로도 아닌 신비로운 것으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또 다른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란 누구에게 주어지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그 권능을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의 불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본문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리고 5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8절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다리라, 받으리라, 되리라, 이 세 마디는 아주 중요합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하셨는데 증인이 되라고 다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증인될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줄 알고 선행을 해야 되는 줄 알지만 마음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바로 성령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눅 24:49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열한제자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위로부터 능력이 내려와서 그 능력에 붙들릴 때까지 이 성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그분이 하실 일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능력을 힘입으면 성령을 받을 것이고, 받으면 능력을 얻을 것이요, 능력을 얻으면 증인이 될 것입니다. 증인이 되겠다고 우리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성령의 은사를 힘입어야 합니다. 알고, 느끼고, 깨닫고, 결심했어도 능력이 없으면 무기력합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능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기다림이란 단순한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이요, 순종과 헌신과 인내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기간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이 주어질 때까지는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능력은 전적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그 능력에 의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요 16장 전체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준 바를 알게 하리라 깨닫게 하리라 감당하게 하리라 기억나게 하리라.” 

그리고 오늘 본문 행 1:8에는 “권능을 받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 능력, 그 권능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자.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니다.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나라는 수천 년 동안 샤머니즘이라는 무속 종교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여 왔기 때문에 의식 구조 속에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이 샤머니즘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이 성령의 역사를 왜곡되게 하는 주범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속 종교에서 쓰는 말 중에 강신(降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 내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단 신접하게 되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몰입하게 되는 황홀 상태, 소위 엑스터시(Ecstasy)라고 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중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러한 신접(神接)의 상태, 즉 엑스터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자아의식은 더욱 분명해져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게 되며, 이웃과 성경 말씀을 좀 더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은 절대로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의 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또 하나 성령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인 세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득도 할수록 생불(生佛)이 되어 간다는 말을 합니다. 살아 있는 부처라는 말입니다. 해탈 즉, 세상에 대한 욕심도 없어지고, 자신도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불교문화의 영향 속에 기독교인들마저도 성령의 충만한 은총을 받으면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고,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탈하여 점점 신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아무리 성령을 충만히 받아도 나는 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죄 된 나의 인간성이 금방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생불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가는 큰 잘못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의미에서의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이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그 순간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내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의 특징은 능력이며, 권능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증거의 능력입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은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권능을 입은 사람은 증인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성령감림주일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셔서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증인이 되어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사랑과 용기에 담대함을 주어서 증인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성령의 권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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