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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효부 룻의 영적소망과 은혜보장 (룻 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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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 룻의 영적소망과 은혜보장 (룻 1:16-21)

16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할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로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하고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부터 이스라엘의 사울 왕이 세워져 왕정정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약 350년 동안 사사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셨던 신정정치의 시대입니다.

1. 룻의 영적소망  

이 사사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에 에브라다 사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다 혈통이고 베들레헴에서 하나님 앞에 소망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나오미라는 아내와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네 식구가 꽤 부자로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복을 누리며 잘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이 곧고 강퍅하고 완악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능멸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그 땅에 흉년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수리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자연 그대로 내리는 비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흉년이 되니 농작물이 전혀 추수할 것이 없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고를 먼저 겪어야 하는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레위기 26:19~21에는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만하고 무례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심으로 그들이 고통당하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고 겸손히 무릎 꿇어 회개하면 다시 그들에게 은혜를 내리셔서 회복시키시는 역사가 이 사사시대부터 반복적으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계속 되는 것은 그 백성들의 교만과 죄값으로 징벌을 받는 과정이었는데 나오미의 가족은 그것을 피하여 멀리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중 진노를 받게 했던 불신앙적 배은망덕이요, 하나님께 대한 대적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압 땅은 사해 동편의 넓은 평원이 펼쳐진 곳으로 목축이 성행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호화롭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인 남편을 치셨고 엘리멜렉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빠른 깨달음으로 아들 둘을 데리고 서둘러 하나님의 떡집, 생명이 공급되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련하게 그 자리에 머물면서 그곳 저주받은 혈통인 모압의 딸들과 아들을 결혼시키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집안의 두 아들마저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만 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대만큼 관심과 사랑을 부어주시고 분수에 넘치는 은혜로 대접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능멸하거나 대적하거나 거역,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이 돌이킬 기회를 여러차례 만들어 주시다가 끝내 돌이킬 가망이 없어 보이면 할 수 없이 없애 버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시기도 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마저 죽고 과부 세 사람, 나오미와 모압여자 큰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가슴에 남편과 두 아들을 묻어야하는 불행한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데 그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해 오셨습니다.

또한 베들레헴에서 회개 역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징벌로 내리셨던 흉년을 거두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풍년의 결실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다는 소식이 나오미에게 전해진 ‘복음’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그 떡집을 떠난 것은 생명의 양식 공급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손길을 뿌리친 것이 되고 배은망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이 객사하는 불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룐  네 식구가 많은 돈을 가지고 하나님이 매질하시는 베들레헴을 떠나서 죄악 세상인 모압 땅으로 가서 잘살아 보자고 했던 그것이 오히려 베들레헴에 남아서 하나님의 매를 맞아가면서도 애절하게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던 그 백성들의 흉년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회복되어서 풍년이 들었다는 복된 소식을 듣고소 비로소 나오미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내가 거기에 머물러서 그들과 함께 매를 맞고 그들과 함께 고생을 겪더라도 그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쩌자고 남편이 하자는 대로 따라와서 이 저주받은 땅에 와 남편과 두 아들을 객지에 묻어야했는가…”며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출발을 합니다.

나오미는 젊은 며느리 둘을 함께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들을 타이릅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룻1:11)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시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큰며느리 오르바는 받아들이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룻기 1:16~17에서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며 강한 의지를 내보입니다.

이러한 룻의 신앙고백은 육신이 다 늙은 시어머니 그것도 남편과 두 아들을 객지에 묻어두고 여자로서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보잘것없는 늙은이에게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때 무슨 기대 걸 것이 있었겠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가 부담스러울 일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일해서 봉양해야 하고 대접하고 음식뿐만 아니라 옷도 신발도 해드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향한 영적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룻은 그 집에 시집을 오자마자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왜 가장이 객사하고 두 아들마저 객지에 묻어야 했는가 하는 것은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대적하고 능멸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룻은 분명한 영적소망을 목적으로 다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이 보리 추수할 즈음인 4월쯤 들어가게 됩니다. 보리 추수 중에는 남자들은 전부다 들에 가서 움막을 치고 계속 밀과 보리를 베면서 먹고 자고 합니다. 성안에는 여자들과 아이들 밖에 없습니다. 성문에 해질녘에 들어오는 나오미를 보며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니냐?”며 묻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뜻은 ‘희락’입니다. 옛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은혜 가운데 살 때는 기쁘고 즐거웠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남편의 잘못된 인도를 따라 멀리 저주받은 모압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하나님은 나오미의 신세를 쓰디쓰게 만드셨기 때문에 지금은 나오미라는 이름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깊이 참회하는 태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은혜보장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선민사상이 있어서 특히 이방인들 중에도 모압과 암몬에 대해서는 개, 돼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먹여 딸이 아버지와 동침해서 생겨난 큰딸의 아들이 모압이고 작은딸의 아들이 암몬 자손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백성, 하나님 앞에 너무나 비천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룻이 베들레헴에 시어머니를 따라 들어온 것은 자기의 출신성분과 가정이 아무리 비참했다 할지라도 저주의 피를 이어받은 불행한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영적소망 하나를 목적으로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멸시와 천대, 구박을 각오하고 왔을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은 그 시어머니를 위하여 광주리를 들고 자기를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틈속에서 밤늦게까지, 어두워서 보리이삭을 주울 수 없을 때까지 줍고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이러한 룻의 행동이 시어머니를 위한 행동으로 보여졌지만 그 중심은 시어머니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 인정받고 구원을 얻고 싶은 영적 소망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영적소망의 간절함과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룻과 같이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룻의 이러한 효성은 온 성안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룻의 행적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니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성주인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보장이라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룻기4:17~18에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왕은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표로 소개되어져 왔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에 보면 이 룻이라고 하는 모압여인이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이것은 그 믿음이 하나님 마음에 감동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룻은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구원을 얻기 위한 영적소망을 기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영적소망에 대한 믿음과 희생과 수고, 겸손과 섬김을 통하여 감동을 드린 것입니다.


3. 보편화된 구원의 모델 룻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이방인의 혈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면 얼마든지 룻과 같이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보편화 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확정한 것입니다.

룻은 출신성분이 나빴지만 유대인의 가정에 시집을 와서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할 사람이 믿음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않아 벌을 받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제대로 하나님을 믿고 살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영원히 복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는 정통 장로교회 보수신학과 신앙적 원리를 두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룻을 택하셨고 성령으로 깨달음을 주사 믿음을 주셔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도록 이끄시고 역사하신 섭리가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은 우리들의 믿음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형식적이고 습관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룻과 같이 실질적인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진지한 실천적 신앙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장재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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