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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신앙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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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 (행 3:1-10)

요즘 미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맞습니다. 바로 야구입니다.

지금 LA다져스 팀의 류현진군과 신시네티의 추신수가 너무나 잘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꼭 이기고 싶어 하는 근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을 이기길 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전에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보겠습니다.
한국사람, 일본 사람, 미국 사람이 싱가포르의 깨끗한 길을 걷다가 동시에 침을 뱉었다고 한다
그러자 경찰이 곧 출동하여 세 사람을 경범죄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은 대가로 그들은 각각 곤장 100대라는 혹독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외국인인 관계로 판사는 곤장을 맞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먼저 합리적인 미국 사람은 자기 위에 매트리스 한 장을 올려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70대 이상을 맞자 매트리스가 헤어지게 되었고, 30대는 그대로 다 맞아 결국 미국 사람은 실신을 하여 실려 나갔습니다.

다음은 모방의 천재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사람은 미국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매트리스 100장을 자기 위에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사태를 모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사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판사에게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 했습니다.
“제 위에 저 일본 사람을 올려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각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모델로 잘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과 그런 각 사람들의 특징을 대변하는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모델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망 신앙’과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델입니다.
그럼, 먼저 ‘사망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걸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앉은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사람이 언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태어 날 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중간에 사고로 그렇게 되었는지, 혹은 무서운 병에 걸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그가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요, 모두들 그를 불쌍한 죄인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핸디캡을 갖게 된 것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는 걸을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죄인 취급을 받는 사회적인 고통과 정서적인 고통을 함께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사망의 신앙을 가진 이 앉은뱅이의 내면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현재 앉은뱅이가 된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질병의 근원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죄로 인하여 망가지고 깨어진 삶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병을 일으켜 엄청난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 죄는 단순히 병만을 일으켜 육체적인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유독한 독성을 퍼뜨리는 데, 그 독성 중 하나가 바로 ‘수치심’입니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비참하게 여기고, 창피하게 여기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 못지않게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앉은뱅이가 된 사람은 정말로 자신의 처지를 비참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해 대었을 테니 그는 얼마나 비참함과 수치심을 느꼈겠습니까?
그렇게 앉은뱅이는 수치심이라는 죄의 독성을 점점 자기 안에 퍼뜨립니다.
그렇게 되자 앉은뱅이는 더욱 죄가 원하는 대로 점점 고립되고, 점점 더 망가져 가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걸을 수 없다는 핸디캡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은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자신조차도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점점 더 고립되어 가다 결국에는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는 ‘사망의 신앙’을 갖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인 질병과 핸디캡을 통해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요, 거짓말 하는 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외모가 뛰어난지, 얼마나 건강한지,
얼마나 유능한지, 얼마나 성실한지가 우리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무차별한 죄의 공격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하더라도 우리의 존엄성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런 진리를 거짓으로 속이려 듭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못생기고,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자신의 현재 처지로 인하여 심한 열등감이나 비참함과 수치심을 느끼시는 분들은 빨리 사단의 궤계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한없이 존귀한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하시길 축원합니다. 

사단의 궤계로 자신을 가치 없게 여기는 비참함과 수치심이라는 독을 가득 채운 앉은뱅이는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합니다. 처음 구걸을 하게 되었을 때는 부끄러워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나 자신 안에 죄의 독성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앉은뱅이는 뻔뻔스럽게 구걸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죄 때문에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다.
죄 때문에 내 인생은 요 모양 요 꼴이 되어 구걸을 하게 되었으니,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는 거룩한 너희들이 나를 동정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니 어서 빨리 돈을 내 놓으라!’ 라고 말입니다.
즉, 앉은뱅이는 자기 수치를 밑천으로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자기 고통을 가지고 돈을 챙겼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죄는 바람처럼 한번 불어왔다가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일단 우리 속에 들어오면 반드시 우리 속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견고하고 빈틈없는 틀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견고하게 형성된 죄악의 틀은 여간해서는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와 홈리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이것입니다.
즉, ‘한 번 되기가 힘들지, 되고 나면 계속할 수 있다’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통찰력입니다.

목사로 부름 받고 그 부름에 순종하여 목회를 하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단 목사가 되어 목회를 시작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계속 목사로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홈리스가 되는 일은 아마 목사가 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단 홈리스가 되어 그 생활에 익숙하게 되면 그는 끝까지 홈리스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죄와 관련해서도 맞는 말입니다.
죄도 처음 지으면 양심이 찔려 괴로워하지만 자꾸 짓다보면 죄 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또아리를 틀고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털끝 하나만한 죄조차도 뜨거운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자신조차도 자신을 완전히 재껴버린 이 앉은뱅이가 앉아서 구걸을 하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성전 미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성전 미문이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몇푼의 돈을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면 저는 하나님을 떠나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사단의 속임수이자, 죄의 독성입니다.

어려운 상황과 시험을 자꾸만 일으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짓을 사단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에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범이 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크신 뜻을 찾으려 애쓰면서 더욱 자신을 겸손하게 하면서 신앙에 박차를 가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렌 켈러나 강 영우 박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적인 핸디캡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대신,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가지고 자신을 더욱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시련과 고통으로 인하여 신앙의 성숙을 이루었고, 우리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대신,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 사람들의 신앙심에 호소하여 몇 푼의 돈을 구걸하려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항상 성전 가까이에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과는 가장 멀리 앉아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앉은뱅이였습니다.

물론 앉은뱅이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살겠는가?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적선하는 사람이 많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죄가 우리 삶 가운데 던지는 최후의 족쇄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스코트 팩이 쓴 ‘거짓의 사람들’을 보면 ‘밥’이란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밥은 많은 문제와 심각한 정서 장애를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학교 측은 밥을 스코트 팩에게 보내어 상담을 받게 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스코트 팩은 밥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가출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부모에게 호소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러한 밥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코트 팩은 결국 부모의 무관심으로 밥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스코트 팩은 밥의 부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왜 밥이 관심을 호소했을 때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밥의 부모들은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 가족은 저희 두 부부가 같이 일을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밥에게 전혀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대답입니다.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한테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밖에 나가서 사업을 한답시고, 가정과 자녀들을 돌아보지 않아 생긴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남편들은 먹고 살기 바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먹고 살기 바빠서 교회에 예배드리는 것을 종종 빼먹는 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먹고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가정을 사랑으로 돌보고,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며, 열심히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권면합니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을 팔아먹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일에 목숨을 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수치심과 자존심,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팔아버린 앉은뱅이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사망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망의 신앙’을 가진 앉은뱅이 앞으로 또 다른 모델의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으로 따지자면 앉은뱅이나 베드로나 비슷합니다.

삶에 있어서 실패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와 그물과 부친까지 버려두고, 높은 자리하나 차지해보겠다고 예수님을 3년이나 쫓았던 그들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죽은 강도의 제자, 반역범의 제자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끝까지 의리도 지키지 못하여 죽어가는 스승을 두고 도망친 철저하게 실패한 삶을 살았던 것이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앉은뱅이 걸인 앞에 선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하는 말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지금 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앉은뱅이 앞으로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그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고 말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제 죽을 날만 바라보고 사는 ‘사망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명령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 문제를 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모든 죄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를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와 육체적인 핸디캡으로부터 앉은뱅이가 회복 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자 곧 능력이 나가면서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에 함께 들어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제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은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어떻게 똑 같은 시대, 똑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앉은뱅이처럼 ‘사망의 신앙’만을 가진 채 평생을 구걸만 하다가 죽어 가는데, 또 다른 사람은 자기뿐 아니라 남에게 까지 생명을 베풀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본문 14절에서 16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는 이 일로 인하여 놀라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이 일에 자기들이 증인이라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고쳐주셨다고 말입니다.
즉,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가 ‘사망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델이라면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부활 신앙’이 아니었으면, 베드로나 요한도 앉은뱅이와 다름없는 실패자였을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경우처럼 평생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자기 가치를 하락시키고,
점점 고립되어 살아가다가 먹고 살기 바쁘게 살아가는 사망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들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사망의 신앙’의 사람에서 ‘부활의 신앙’의 사람으로 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변했다고 한다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 신앙’이 들어오면, 우리도 변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발휘했던 능력을 우리도 행할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가만 두면 죄악으로 치닫는 현실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점점 죽음으로 치닫는 현실을 그냥 두고 포기 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죽어가는 앉은뱅이를 눈여겨보고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였던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 그들을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여 죄를 이기고 회복을 가져오게 합니다.
죄와 사망은 여전히 자신들이 강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음으로 결국 패배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 즉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망을 향해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면합니다.
여러분 안에 무너지고 싶고, 죄가 자리 잡으려고 하고, 어떤 공격을 받아서 좌절하고 있다면 지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나를 넘어뜨리고 무너뜨리게 만드는 너 사단아 물러갈 지어다!”

“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안에서 나를 시험하는 더러운 것들아 물러갈 지어다.”

그리고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확신 있게 행동합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Action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된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그는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던 인생이 성전으로 들어가며 기쁨과 환희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진정한 회복인 영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과 환희, 진정한 회복의 역사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부활의 신앙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믿겨지지 않는다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사랑 많으신 주님께서 반드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믿어 부활 신앙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망의 신앙’이 아닌 ‘부활의 신앙’을 가져 나와 남을 살릴 뿐만 아니라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회복의 역사가 날마다 삶 속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부활의 신앙으로 나와 남을 살리며, 확신 있게 행동하고,
날마다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저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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