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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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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18-25)


제가 경향교회에 후임목사로 갓 부임했던 해에 원로목사님 내외분께서 유럽 선교여행을 다녀오셨는데, 우리 교회의 장로님 사모님들도 대여섯 분인가 동행하셨습니다. 
돌아오시는 날 제가 인천공항으로 마중을 나가보니 장로님들께서도 많이 나와 계셨습니다. 
저는 그 장로님들께서 몇 주일 동안이나 때 아닌 '홀아비 생활'을 하신 후에 드디어 당신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으니 뭔가 좀 정겨운 해후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웬걸, 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장로님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자기 아내와 반가운 포옹을 나눈 분이 없었습니다. 
포옹은 고사하고 "여행이 어땠어?"라고 인사 한마디 건네는 장로님도 없었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장로님들은 자기 아내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다가갈 때부터 오로지 그 아내가 끌고 나오던 '여행가방 손잡이'만 보고 다가갔으며, 그것을 건네받는 순간 획 돌아서더니 자기 혼자 앞장서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자기 아내를 마중하러 나온 '남편'이 아니라 마치 짐을 운반해 주러 나온 'porter'(공항 짐꾼)와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해프닝은 미국에서 한 20년 가까이 살다가 돌아온 저로서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는데, 조금 더 지내다 보니 비단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뿐 아니라 그 세대의 부부들은 대부분이 그처럼 부부지간에 서로를 '어색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저는 최소한 우리 경향교회 장로님 부부들만이라도 좀 '정겨운' 관계가 되게 하려고 저 딴에는 꽤 애를 많이 썼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어느 주일 설교 시간에 "아내 생일 때만이라도 장미꽃 한 송이와 현금봉투 선물을 준비해서 일 년에 딱 하루만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면, 아내는 나머지 364일 동안 남편을 기쁘게 해 줄 것입니다. 
"라고 '간곡히'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장로님 사모님들을 개인적으로 우연히 만날 때마다 혹시 그 설교 이후로 '우리 남편이 달라졌는지' 물어 보았는데, 제 말대로 아내에게 생일선물을 해 준 장로님은 이번에도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른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에 있어서는 그처럼 잘 순종하시는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제가 부부관계에 대하여 '권면'하거나 '훈계'하는 말에 대해서는 어쩐 일인지 10년이 지나도록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 교회 장로님 부부들을 위시하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부부관계란 문자 그대로 '가깝고도 먼 사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원래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라는 것을 그렇게 '어색한' 관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제 가정의 달 5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법칙' 중의 하나로 주신 부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부족한 것을 돕는 이성(異性)의 반려자'의 관계입니다. 

본문 18절부터 20절에 "18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창세기 2장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앞서 1장에서 '제6일의 창조' 때에 있었던 '사람의 창조'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장 7절에서 먼저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본문 18절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시면서 아담을 위한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처럼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창조됨으로써 비로소 제6일의 창조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상)는 결과가 완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 없이 남자만 있는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이었고 오직 남녀가 같이 있음으로 해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유종지미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기 전에 먼저 아담으로 하여금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 즉 모든 '육축과 짐승과 새'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으며, 아담은 그것들에게 각각 "이름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각 생물"들이 아담 앞으로 왔을 때 분명히 암수 한 쌍이 나란히 함께 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명식'이 끝난 직후에 본문 20절 하반절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여자를 만드셨다.'라고 21절에 이어지는 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러나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었다.'라고 그 앞의 내용과 연결되도록 번역하는 것이 바르며, 실제로 새 번역들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아담은 자기 앞으로 암수 한 쌍씩 찾아오는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동안 자기만 '혼자' 있다는 사실을 절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래서 그 명명식이 끝난 후에 '하지만 아담에게는 짝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의도적인 과정'을 통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자기만 혼자 살고 있는 것이 결코 '좋지 못하다'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야 그에게 '돕는 배필'로서 여자가 생기게 될 때에 훨씬 더 반갑고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관계를 애초부터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의 관계로, 그러면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돕는 배필'의 관계로 창조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동성애를 합법화해 주자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보수주의 기독교'가 이 동성애를 '정죄'한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런 비난에 제일 앞장서고 있는 무리가 '비기독교'인이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동성애를 정죄하는 말씀이 없다느니, 번역을 할 때 일부러 오역을 했다느니 하면서 '동성애는 태어날 때부터 그 본인이 가지고 있는 취향일 뿐이다.'라는 논리로써 동성애를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동성애를 정죄하는 말씀이 없다고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는 말씀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까?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는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동성애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정상적인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고 성경이 명백히 정죄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그것은 결코 '서로 돕는 배필'의 관계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신"(롬 1:24) 지극히 더러운 상태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조차 하지 않는 짓을 행하는 동성애자들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그들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요?
정말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올 지경입니다. 

사람이 마약에 빠지면 그것이 본인에게 아주 해로운 것임을 일깨워 주면서 어찌하든지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는 것이 그 마약중독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마약중독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고 본인이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이니 그냥 담배처럼 합법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이웃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동성애가 가지고 있는 온갖 해롭고, 더럽고, 악한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무조건 그들의 '권리'만 옹호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애당초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생물들조차 오로지 '암수'가 짝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물론 동식물계에서 한쪽 성(性)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는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하고 소위 양성생식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성애자들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오직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부의 사이는 자녀를 생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머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서로 돕는' 관계에 있는 것이 태초 때부터의 창조법칙입니다. 
제가 언젠가 개인택시를 탔는데 그 기사 아저씨께서 자기 아내가 '매일 무조건 15만원씩 입금시킨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돈벌이 기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어떤 젊은 남편이 밤늦게 자기 아내한테 라면을 끓여 오라고 시켰는데 아내가 거기에다 자기가 싫어하는 '건더기 스프'를 넣었다고 주먹질을 해대는 장면을 본 적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몸종'입니까?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고 했습니다. 
남편도 아내가 없으면 '좋지 못하고' 아내도 남편이 없으면 '완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사람의 창조주이기도 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시면서 남편과 아내로 하여금 '서로의 부족한 것을 돕고 채워 주는 반려자'가 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을 꼭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평생의 배우자'의 관계입니다. 

21절부터 25절의 말씀에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이 '깊이 잠들게 하다'라는 말은 일반적인 수면이 아니라, 아담으로 하여금 자기 몸에서 "갈빗대" 하나가 빠져나가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일종의 '마취상태'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가 빠진 그 자리를 "살로 대신 채우신" 후에 그 빼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아담의 선택권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합당한 배우자를 친히 만드셨으며 또한 그녀를 아담에게로 데려오셔서 둘이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연애결혼'이 아니라 100퍼센트 '하나님의 중매'로 결혼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결혼식 때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신랑의 손에 건네주듯이,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자 아담은 무척이나 행복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아담은 당장 그 자리에서 성경에 제일 첫 번째로 나오는 '시'를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남녀가 연애를 할 때 좀 감상적인 분위기가 있는 남자는 시를 써서 여자에게 바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인류 최초의 시는 이처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그 감동과 기쁨을 표현한 남편의 자작시였습니다. 
물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는 문장은 일견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비단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모든 부부관계에 적용되는 근본적인 진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번역된 말은 좀 더 부드럽게 의역하자면 "이 뼈도 나의 뼈요 이 살도 나의 살이다"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자의 육신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음을 근거로 한 말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남자나 여자나 본질적으로 '동질의 존재'이며 '동격의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와 여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열등하다든지 혹은 다른 쪽에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존재론적으로 동등함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 가지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는데, 아담의 시에서 계속 이어지는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는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자를 남자에게서 취하였다는 말 역시 더 쉽게 번역하자면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어의 '여자'를 뜻하는 '이솨'라는 단어는 남자를 뜻하는 '이쉬'라는 기본형 단어를 조금만 변형시켜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동등한 인격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하나의 가정을 이룰 때 그 사이에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는 영적 질서의 관계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아담의 시가 일목요연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옛날 사회로 갈수록 중매결혼이 많았을 뿐 아니라 당사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양가 부모들 사이에 아예 정혼해 놓은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날은 점점 더 연애결혼이 많아지고 또 처음에는 중매를 통해 소개를 받았더라도 본인들끼리 연애의 기간을 거친 후에 결혼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 요즘 세대의 청년들은 중매결혼보다는 연애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있겠지만, 중매결혼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젊은 선남선녀들이 연애를 할 때에는 서로의 매력에 이끌리는 감정에만 쉽게 빠져 들어가서 성급하게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 가서 오히려 후회하는 경우도 생기기 쉽지만, 이미 결혼생활도 해 보았고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청년들이 간과하기 쉬운 보다 더 폭넓은 조건들과 상황들까지 다 예견해 보면서 중매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이 쉬워서 중매이지 두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결혼을 제3자가 정확한 판단을 내려서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불신자들의 표현에 '중매는 잘해야 술이 석 잔, 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가 중매한 사람마다 다 결혼을 하게 되고 또 그렇게 결혼한 사람마다 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 중매쟁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중매를 하실 때에는 100퍼센트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인류 역사상 제일 처음 있었던 결혼, 바로 아담과 하와를 중매하시고 결혼 주례까지 친히 집행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똑같은 하나님 앞에서 결혼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면, 본인들의 만남이 연애로 시작되었든지 중매로 시작되었든지 간에 근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중매'로 만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주례'로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 결혼은 절대로 실패가 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주례를 맡게 될 때마다 한 주일 전에 예비신랑신부를 만나서 그 '결혼서약'의 의미를 미리 가르쳐 줍니다. 
"지금은 두 분 다 장밋빛 꿈만 꾸고 있겠지만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세상의 그 어떤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크든지 작든지 갈등이나 싸움은 반드시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럴 경우 불신자 부부들은 '우리의 만남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각자의 진정한 짝을 다시 찾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혼을 합니다. 
  
하지만 신자 부부들은 그럴 경우에도 이혼이란 아예 옵션이 될 수 없는 까닭에 끝까지 서로 기도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부에게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처럼 어떤 갈등이나 위기를 함께 통과하고 나면 오히려 그런 일이 있기 전보다 둘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말씀 속에 약속되어 있는 결혼의 축복입니다. 
"라고 일러 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러니 '혹시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5일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내 평생의 배우자로 삼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를 딱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난 후에 확신이 들면 토요일 결혼식 때 나타나시면 됩니다. 
"라고 농담조이지만 사실상 진담으로 덧붙여 줍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말을 듣고 토요일에 안 나타난 신랑신부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렇게 다짐을 하고 결혼을 한 부부 가운데 지금까지는(?) 단 한 커플도 이혼을 하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이 어떻게 실패할 리가 있겠습니까?
둘 사이를 하나님께서 친히 중매해 주시고 주례해 주신 것을 믿는 부부 사이에 무슨 파경이라는 것이 생길 수가 있겠습니까?
내 남편과 내 아내는 이 65억을 헤아리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딱 한 사람을 골라서 내게 '이끌어' 와 주신 배우자인 것을 기억하면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서로를 아끼고 귀히 여기면서 사랑하는 부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옛날에는 아무래도 남편이 아내를 구박하거나 학대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점점 그것이 역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SNS에 흔히 도는 우스개 이야기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집에 두면 근심덩어리, 데리고 나가면 짐덩어리, 마주 앉으면 웬수덩어리, 혼자 내보내면 사고덩어리, 며느리에게 맡기면 구박덩어리"랍니다. 
그 말대로라면 이제는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는 것 같은데, 왜 '옛날 남편'들이 잘못한 것 때문에 '요즘 남편'들이 그런 멸시(?)를 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물론 남편과 아내 사이란 그처럼 서로 구박하고 멸시하고 박대하고 학대하는 관계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를 오로지 '서로 약한 것을 돕는 반려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 부부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도록' 서로에게로 이끌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만 생각해도 세상에서 자기 남편보다 더 귀한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자기 아내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과연 어떻게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대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변함없이 내 아내를 '보호'해 주는 남편이 되겠다고 서약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아내가 병들었을 때 그 사랑의 서약을 어긴 적은 없습니까?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변함없이 내 남편을 '존경'하는 아내가 되겠다고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결혼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남편이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고 해서 부부로서의 대의와 정조를 깨뜨린 적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불신자 부부라면 당연히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부부지간의 갈등이나 가정의 문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그럴 때일수록 더욱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이 남자를 내 남편으로, 이 여자를 내 아내로 맞아 '죽을 때까지' 부부로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을 기억하고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부에게 신혼 때보다도 오히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더욱 '깨가 쏟아지는' 진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촌수로 따지만 부부 사이는 '0'촌입니다. 
그렇다면 '1촌' 사이인 아들과 딸보다도 당연히 남편과 아내가 더 가까워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즉 '애기 아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남편'이며, '우리 마누라'가 아니라 오로지 '내 아내'일 뿐입니다. 
  
정말이지 부부지간이란 한나의 남편 엘가나처럼 자기 아내에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 1:8)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향의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원래 하나님께서 창세 때부터 정해 주신 그대로 '서로 돕는 배필'로서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믿음직한 반려자로 피차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천생연분'으로서 세상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배우자로 평생토록 귀히 여기고 존중하며 보호하고 순종함으로써 날이 갈수록 더욱 행복해지는 부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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