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고후 5:11-21)

첨부 1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고후 5:11-21)


오늘 본문을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부분은 11절부터 14절 상반절까지로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적대자들의 비난을 의식하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는 말입니다. 둘째 부분은 14절 하반절부터 17절까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서 이루시는 변화를 말합니다. 셋째 부분은 18-21절로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그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부분입니다. 

먼저 11절을 봅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말은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실을 심판하실 것임을 안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의 모든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함 때문에 매사를 바르게 행할 때는 그로 인해 염려하거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기를 자기를 스스로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알려진 그대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뜻은 이어지는 12절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서 “자천한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는 것을 뜻하는데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임을 스스로 판단하여 그를 자랑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란 외적이고 피상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전파한다 하며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마음으로 자랑한다”는 것은 내적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외모도 신통치 않고 말도 어눌하다는 적대자들의 비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주님의 사도는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말이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진리인지 아닌지를 보고 판단해야 할 것임을 권면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기로부터 받은 복음과 그 진리를 확신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랑하며 적대자들의 중상과 비방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한 말씀 중에는 그가 황홀경적인 상태에서 경험한 특별계시도 있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포한 것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황홀경적인 상태와 특별계시, 그리고 그에게서 발견하는 비합리적이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며 그를 미쳤다고도 하고 순수하지 못한 의도와 수단으로 사람들을 얻으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답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는 그가 경험한 황홀경과 특별한 계시를 전하고 때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포하는 데 대해 그의 적대자들이 뭐라 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의사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사도 바울이 신비한 말을 쓰든 평범한 말을 쓰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14절 상반절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강권하시는 것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지배하는 근본 동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대자들의 비난을 일축한 사도 바울은 다시금 그가 다루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변화입니다. 본문 14절 하반절과 15절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셨으면 우리 모두가 살아야지 왜 다 함께 죽는다는 말입니까?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새 삶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보는 우리의 관점의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 보고 그리스도조차도 육신을 따라 알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육신을 따라 안다”는 말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을 더 이상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성령께서 뜨게 하시는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일어나는 변화를 본문 17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이룩하신 새 삶에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며 그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보는 믿음의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새 피조물임을 선언한 사도 바울은 그 새 피조물의 
본질이 무엇이며, 새 피조물이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또한 밝힙니다. 먼저 본문 18절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합니다. 새 피조물의 본질은 하나님과 화목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하나님의 노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이고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속죄의 제물로도 우리의 죄를 다 씻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화목의 제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크고 귀한 제물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속죄의 제물은 없습니다. 말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에게는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여기서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아직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없는데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째로는 우리가 직접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일방적으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신 사실을 깨닫고 그 화목의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 놀라운 화목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화목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 들어오게 해야 할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전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본문 19-21절을 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돌리시며 그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와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놀라운 화목의 소식을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알리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그리스도 대신 널리 전함으로써 그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으니 이제는 우리 또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서게 된 백성답게 살 뿐 아니라 그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들이 되게 하셨다는 놀랍고 기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의 화목함을 얻은 사람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극히 마땅하고도 고귀한 직분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배은망덕한 행실입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본문 20절에서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청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간청은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본문 19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힘껏 받들어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