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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 (요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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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사랑한다는 것 (요 21:15-18)

며칠 전 저는 경북 청송에서 날아온 가슴시린 사건보도를 접하고, 한동안 멍했습니다. 그것은 88세 된 할아버지가 83세 된 아내를 태우고선 저수지로 돌진하여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 때문이었습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난 뒤 치매상태로 혼자 남을 할머니가 걱정되어 그런 것 같다고 합니다. 저수지로 돌진하는 것, 요양원이나 집에 모시는 것 어느 쪽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그러고 보니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저(基底)에는 예외 없이 ‘사랑’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이 사랑이지만 여전히 미완의 주제로 남아있습니다. 진정 사랑이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시인 서은영 씨는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란 시(詩)에서 ‘사랑의 기원, 그리고 그 사랑의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살피라는 탁월한 암시를 던집니다. 

그렇습니다. 갖가지의 사랑, 변종된 사랑이 바이러스처럼 넘치는 이때에 진정한 사랑을 알려면 사랑의 기원, 목적을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곧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면 이 사랑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 자체이신 그 분이 친히 자신을 보여주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사랑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요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그래서 드디어 우리는 그 사랑을 듣고, 보고, 손으로까지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일 1:1, 요 14:9). 

사랑이신 그분이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마지막 담판을 벌이십니다. 주제는 당연히 사랑이었습니다(요 21:15-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이 사람들’은 다른 성경에 ‘이것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람, 물질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라고 답하는 베드로의 반응에 이어서 주님께서 놀라운 반응을 보이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논리의 흐름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곧 양을 먹이는 것이다.’ 주님의 양을 먹이면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참 사랑, 온전한 사랑을 알게 되는 즉,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출발점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세 번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이 양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각각 다른 단어들입니다. ajrnivon(아니온), provbation(프로스바티온), provbaton(프로바톤)입니다. ‘아니온’은 ‘어려서 앞뒤 분별을 못한다’, ‘프로스바티온’은 ‘그보다는 장성한,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면이 있다’, ‘프로바톤’은 ‘그야말로 완성된, 큰,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리의 양이 아주 어린 상태에서 점점 성장하여 장성한, 온전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양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주님께서 제일 먼저 언급하신 ‘아니온’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어린양’이라고 비교적 번역이 잘 되어 있지만, 원래 뜻은 ‘그것보다 훨씬 작은’이란 뜻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지소어’라고 합니다. ‘갓 태어난 어린양보다 훨씬 작은’이란 뜻입니다. ‘지소어’, 즉 어린양도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의 반열에 들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원래는 양이 아닌 양이란 뜻입니다. 

여기 지소어로 등장하는 ‘어린양’은, 양은 양인데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요 10:16), ‘길 잃은 양’(눅 15:4), ‘흩어진 양’(겔 34:12)을 뜻합니다. 결국 이 ‘어린양’은 아직 믿지 않지만 내 곁에 있는 자를 뜻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미리 정하신 자’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롬 8:30). 이들을 찾아서 우리에 들게 하고, 어깨에 메어 돌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찾아 좋은 꼴, 맑은 물을 먹여 이 아니온이 성장하여 프로스파티온, 더 성장하여 프로바톤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을 주님께서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 속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왜 우리가 잃은 양을 찾아나서야 합니까? 우리 밖에 있는 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왜 우리가 흩어진 양을 목자의 품으로 데려와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온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기에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교회 한 자매는 믿지 않는 남편, 양가 부모님들, 가족들을 다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무척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온 가족이 예수 믿게 된 일에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른다고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하나님 품으로 먼저 간 김경홍 집사님은 투병 중에도 그 웃음과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의사에게 고개 짓으로 성경을 가리켰습니다. 이것만큼 큰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에 두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내 주변에 나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랑의 사람으로 성숙되어 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득하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오셨고, 그 사랑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드러내셨고, 마지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양은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 심령을 잘 먹여서 자라도록,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상급 받을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우리가 재물을 기쁨으로 사용할 때 그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이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이번 사랑의 바자회와 새생명 전도축제를 통해 우리가 죽어가는 영혼, 어린양에게 찾아가, 길 잃은 양, 흩어진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 관심을 모으는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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