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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8복+1복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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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복+1복 (마 5:1-12)

마태복음은 28장 결론부에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 주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제자를 삼는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이 제자로 삼는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가르침이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두드러집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대하는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안에서도 가르침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에 대하여 마태는 7:28-29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럼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5: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 구도는 예수님, 제자들, 무리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마치 왕, 각료들, 그리고 백성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무리들은 4:23절 이하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나온 수많은 무리들을 가리킴이 적당합니다. 이 무리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무리들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방인의 침략을 받아 압제와 고통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는 4:15-16절에 말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건너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수훈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아니면 모든 인류에게 가르친 말씀을 알기 보다는 우선 산에 모인 제자들에게, 그리고 무리들이 듣도록 가르친 말씀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누구인지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구약의 남은 자들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이방인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가서 온갖 압제와 박해를 당했던 자들입니다. 마치 일본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우리 나라 백성들의 경우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한 공산주의 통치 하에 있었던 자들도 역시 같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산상수훈은 처음에 '복되도다!'를 8번 선언하시는 것으로 8복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단계적으로 차츰 복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고, 연속적으로 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8복 선언의 분위기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끝나고 8.15 해방을 맞았을 때, 온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던 모습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은 제가 오늘 설교개요의 제목에 '8복+1복'으로 쓴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8복으로 말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가운데 이렇게 썼으니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8복으로 본 것은 3-10절까지의 복을 세어서 그리한 것이고, 11-12절에 말한 복은 10절의 복을 더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3-10절의 8복과 11-12절의 복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8복+1복으로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강해를 하면서 애굽에 내렸던 10재앙도 제가 3+3+3+1로 나누어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재앙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인 유월절 재앙이었고, 이는 다른 재앙을 기록하는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그와 같이 저는 앞의 8복은 옛 출애굽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선언하시는 복으로 보고, 마지막 1복은 이제 새 출애굽으로 말미암은 교회에게 선언하시는 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된 계기는 예수님의 세례받으신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물세례는 구약의 옛 출애굽에 관한 것이고,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신약의 새 출애굽에 관한 것으로 말씀드렸던 것과 같게 산상수훈의 복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의를 합당하게 이루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 8복이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받는 복이 1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5:11절 이하에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는 복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11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리고 이 마지막 1복에서는 5:12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앞의 8복을 받은 자들의 상보다 더 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8복과 1복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근거를 든다면 히브리서 11장과 12장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11장의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을 말하고, 11장 말미와 12장 처음 부분에서 구약의 믿음을 완성하는 신약의 믿음의 영웅들로 말하는 그런 구조들을 참조했습니다. 히브리서 11:39-40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이 아무리 믿음으로 그 시대와 역사를 봉사했더라도 신약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마지막 책임을 다하는 경주를 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가르침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8복과 1복도 그렇게 나누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여러분에게 제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8복은 틀리고 8복+1복만 맞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느 것이 유익하게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지, 이 견해를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정통 개혁 장로교의 많은 목사님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산상설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 분의 설교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심령이 가난함에 대하여 영적 파산상태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럼 영적 파산 상태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대면할 때 느끼는 철저한 무능력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칼빈의 전적 부패와 전적 타락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8복의 차례대로 구원서정에 맞추어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대면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느끼면 그 다음에는 애통함이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에 이르는 경지까지 다다르게 된다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는 산상수훈을 듣는 무리들에 대한 역사와 시대적 배경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구약의 남은 자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인간 누구나 하나님을 대면하는 철저한 무능력인 존재로 보았고 이렇게 스스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느끼는 자들에게 이제 구원의 복, 천국의 복이 임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 이전에는 8복을 그저 단순히 이런 복들이 있다고 보았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교리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서정으로 이 8복을 풀었으니 얼마나 대단해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이 8복은 구원서정적인 복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성품의 8가지 요소들도 아닙니다.

천국의 복은 그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런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천국의 복입니다. ‘행복한 교회’라고 이름을 짓고 있는 교회들을 요즘 많이 보는데, 과연 그 행복이 어떤 행복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이름을 보고 세상이 주는 행복을 찾으려고 교회에 와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11-12절 말씀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는데 그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행복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복이 있다고 하며,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로 기뻐할 수 없고 즐거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천국의 제자들이 누리는 복이라고 정의를 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복을 말하는 오늘 본문의 문법적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을 보셔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은 형용사로 원어에 나타나고, ‘애통하는 자는’은 현재진행형을 쓰고 있고,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는 미래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의 ‘박해를 받은 자는’은 이미 수동적으로 박해를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문법적 표현을 주의하며 천국의 복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을 말할 때 여기 가난하다는 것을 경제적인 의미로 가난한 자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가 빠져 있고 그냥 ‘가난한 자는’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 ‘가난한’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권력으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권세 아래 구약의 남은 자들이 받고 있었던 압제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는데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천국이 항상 그들의 것이라는 변하지 않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천국이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압제 상태에 있는 백성이 가지는 것은 애통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가 이방 땅에 있었던 에스겔, 다니엘이 가졌던 슬픔을 이해하시면 이 애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원어의 의미를 보자면 ‘가까이서 부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애통하고 슬퍼할 때 누가 옆에 있어주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요. 이런 것도 실제 에스겔서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지를 않습니다. 그 영광이 떠나갔어요. 그렇다면 아주 영영 이별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로잡혀간 곳까지 하나님의 성전은 바퀴를 달고 날개를 달아 떠올라 저 이방땅까지 가까이 갑니다. 자기 백성 가까이서 그들을 보호하고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로를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온유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조상들의 범죄로 인하여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하심만을 바라고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들에게 복이 있는데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가는 바벨론에서의 구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잃어버린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들에게 배부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온전한 통치의 왕이 임하셔서 천국을 이루시면 그들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언약의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은 긍휼함을 입었습니다. 자비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함으로 베풀면 하나님의 자비함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자기 마음을 씻고, 씻고, 씻어서 깨끗하게 된 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마음을 가진 자, 일편단심으로 충성스러운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왕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한 왕만을 섬기는 자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왕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칼을 쓰는 자가 아닙니다. 칼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드는 평화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고난을 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만약 군사독재하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며 박해를 받은 자들이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어떤 대접을 받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나라가 너희들 것이라고. 그런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천국의 왕이 오셨습니다. 이전에 고난과 박해를 받던 자들에게 천국을 선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 오실 것을 바라며 성전에서 기도하던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나심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시므온과 안나 여선지자 같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게 하셨고 그들은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남은 자들이 받는 8복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심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들로 통치하는 하늘 나라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이 구약 백성으로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가 이제 주님을 따르는 새 백성이 된 자들에게는 더 큰 복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 복은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합니다.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박해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다고 기독교로 개종한, 구약의 할례가 아닌 성령세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봉사합니다. 바로 그들에게 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동의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실 번역상의 조그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냥 즐거워하라고 하면 원문의 뜻이 잘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미친 듯이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과도하게 넘치도록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복이 있는데 이 복을 기뻐하고 아주 넘치도록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비유로 주님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에 관한 비유에서 주인이 떠나며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겼다가 때가 되어 소출을 얻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때리고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 농부들이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여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주인의 기업을 아예 빼앗으려고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적인 일들을 바탕으로 천국의 복을 8복에 더하여 1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복의 선언은 구원서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6장-66장에서 장차 임할 메시야의 나라를 바라보고 예언한 것이 성취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6: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l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그리고 61:1-3절을 보십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남은 자들이 가졌던 근심과 슬픔을 어떻게 대신하여 새로운 것으로 주실 것인지 약속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실 영광의 나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약속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천국이 그들에게 선물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8복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적도 없었고, 애통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나라로부터 받는 압제와 슬픔은 경험했을지언정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경험한 압제와 슬픔은 없었습니다. 군사독재나 왕정의 폭정으로 박해와 고난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 때문에 슬퍼하거나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모든 족속에게 임하는 복이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었고, 여러분과 저는 이제 천국에 속한 백성으로 구원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와 만물을 통치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질서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와 백성들은 도리어 천국백성인 우리를 핍박하며 거스리며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바다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이 왕노릇을 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가운데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로부터, 세상의 먹고 마심으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부활의 승리를 확실히 갖고 있는 교회가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애통해 하는 것은 우리가 포로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이 주님을 시인하지 않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하늘 시민권의 권세가 있어도 우리는 온유합니다. 주님이 온유하심으로 하늘 보좌에 오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도리어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버림으로 저들을 구원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은 이 주리고 목마름을 영원한 생명수를 공급하심으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백성으로 이웃에게 긍휼함을 베풉니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우리도입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나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청결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의 얼굴을 뵙는 생명의 교제 가운데 우리가 사는 복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어 하나님과 화해케 한 하나님의 아들처럼 우리도 이 일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과 죄인이 화해하도록 우리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받으신 고난에 우리도 동참합니다. 이 일이 심히 기쁘고 즐겁습니다. 감히 주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그 일에 합당하게 쓰임을 받으니 너무 즐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의 복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또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전혀 다릅니다. 

특히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이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정말 기뻐하고 즐거움을 누립니다. 제도권 교회와 큰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과 복음으로 토론하여 싸웁니다. 구약의 경륜과 신약의 경륜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들은 저를 금방 이단으로 몰아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그런 취급을 당해서 아픈 게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아픈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그들과 한 통속이었는데 이렇게 복음을 듣게 되었고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기쁘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제가 그들보다 잘난 배경이 있다거나, 성공적인 목회를 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당하는 악한 말로 인하여 기쁩니다. 더 이상 교리와 신학사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당당하게 토론할 수 있는 자격과 주님을 아는 지혜를 주심에 감사하며 무엇이 철학의 헛된 속임수인지 분별하여 참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복음을 인하여 당하는 욕과 박해와 거스리며 악한 말로 대적할 때 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때문에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도리어 기쁨으로 즐거워함으로 함께 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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