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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나를 보시기에 (욥 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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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보시기에 (욥 7:11-21)  

제가 알고 지내는 다른 교회의 집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집사님은 키가 크고 등치가 우람합니다. 이 집사님이 얼마 전에 아기를 얻었습니다. <아기 예쁘지요? 행복하지요?>라고 물었더니, 너무 좋아서 입이 귓가에 걸리면서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일도 있는지 전엔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하면서, 휴대폰에 있는 아기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론 만나기만 하면 휴대폰부터 꺼내서 그 큰 등치로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 아기와 누워 있는 사진 등을 보여줍니다. 아기 아빠는 다 팔푼이라고 하더니, 그 분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식이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키웁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성경읽기 순서에 따라 지난 주간부터 <욥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욥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욥을 자랑하시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욥기 1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아닌 게 아니라 욥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한 인물이었습니다. 1장 3절 끝부분을 보면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성결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는데, 본인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자녀들의 성결을 위해서도 신경을 썼습니다. 

1장 5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욥을 아버지가 자식 자랑하듯 자랑스러워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귀하게 여겨주실 때, 사람이 가지게 될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아버지, 정말 제가 그렇게 사랑스럽습니까? 저 같은 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귀하게 여겨주시고 마음을 써 주십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다윗도 시편 8편 4-5절에서 그러한 감격을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아멘. <우리 아버지는 정말 날 최고로 여기신다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내게 등을 돌려도 아버지는 내 편이야!!>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란 아버지가 변하신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러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때 욥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17-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여기 <사람이 무엇이기에>란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살펴본 시편 8편 4절에서 다윗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할 때의 표현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똑같은 말이 다윗이 시편에서 사용할 때와 욥이 오늘 본문에서 사용할 때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다윗은 <제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시고, 생각해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까?>라는 의미로 행복해 하면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표현을 <제가 도대체 뭘 그렇게 대단한 존재이기에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시고, 문제를 삼으시고, 날 힘들게 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살든지 제발 좀 내버려 두셨으면 좋을 텐데.....제발 좀 저에게 관심을 갖지 마시고 무시하시고 그냥 놔두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의미로 고통 속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왜 자신을 내버려 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버지가 예전 아버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넌 최고다>라고 하면서 칭찬해주고 사랑해주시고, 자랑스러워하셨는데, 지금은 오히려 고난 중에 던지셔서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고난을 만났습니다.  1장을 보면 욥은 쳐들어온 적들과 두 차례의 천재지변으로 모든 재산과 더불어 무엇보다 소중한 열 명의 자녀를 모두 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장에 가 보면 그의 온 몸에 종기가 돋아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내까지도 그를 위로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식으로 빈정댔습니다. 그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욥은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심하게 늘어놓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내용입니다. 욥은 무엇이라 불평하였습니까? 

우선 그는 하나님께 이제부터 자신이 불평을 하겠다고 미리 예고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평하였습니까? 그는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괴물처럼 취급하고 괴롭히시느냐고 질문합니다. 12절입니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여기 <내가 바다입니까>란 질문은 <바다는 해일이 되어 넘쳐 사람들을 삼키기도 하지만, 저는 남을 삼키는 악하고 해로운 존재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마치 범인 취급하여 지키고 힘들게 하십니까?>라는 불평입니다. 

또 그는 괴로움을 잊으려고 잠이라도 자볼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잠도 못 자게 하신다고 불평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그는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합니다. 15-16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그는 자신을 제발 좀 그대로 놓아 달라고 애원합니다. 19절입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또 그는 설령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위대하신 하나님께 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20절을 보면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또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위대한 하나님 아버지라면 묵인하고 용서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21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고난의 한 복판에서 <전에는 그토록 저를 사랑해 주시고, 자랑스러워하셨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이런 불평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여기서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남매의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주지 못했습니다. 특히 막내에게는 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있을 텐데, 제가 그 또래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생활환경이 다르다보니, 가고 싶은 곳에 데려 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목사의 늦둥이로 태어난 딸은 오히려 모든 것을 제게 맞추어야 했고, 이러다보니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고 아이어른이 될까 염려가 됩니다. 

그리고 미안한 것은 아이들을 꾸중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큰 딸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꾸지람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중에 몇 번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 대답이란 <제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이기에 자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잘 되길 바라고, 잘 되길 바라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제가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니, 아마 앞으로는 일절 간섭도 하지 않고, 아이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것처럼 보이시지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지인 한 끝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끝까지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이고, 따라서 끝까지 아이들을 사랑할 것이고, 따라서 계속 간섭도 하고, 꾸지람도 할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들고, 애 낳고 살아도 간섭하고 꾸지람할 것입니다. 이런 제 마음은 여기 계신 부모님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부모인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엄정하고 바릅니다. 우리는 꾸짖지 않아도 될 때에도 감정을 못 이겨 꾸짖기도 하고, 우리의 판단은 잘못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정말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판단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언제나 정답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잘 되려면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듯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든 일을 따라야 합니다. 자녀들이 강한 자녀가 되길 바라는 우리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강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자녀들이 성숙하고 성장하길 바라는 우리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성숙하고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자녀를 힘든 훈련 과정에 보내기도 하는 우리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힘든 훈련 과정에 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욥처럼 원망만 하면 곤란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사랑하시는 것도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요, 반대로 우리를 고되게 연단하시는 것도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 되길 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인식할 때 그 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면 순경은 물론이요, 역경까지도 복인 줄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련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인 줄 알고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은 우리를 잘 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는 것은 그 분의 손길 모두를 수용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신앙은 두 가지 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극복>입니다. 극복이란 환경과 상황을 바꾸고, 그 상황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심으로써 노예라는 상황을 극복하게 하신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길 기대하면서 기도합니다. 우리를 에워싼 고통, 악조건이 변화되고, 우리가 극복하여 승리자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또 다른 면은 <순응>입니다 순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요셉을 애굽에 보내 노예가 되게 하신 분도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이유는 그가 성숙한 인격자로서 장차 온 애굽과 근동 백성들을 흉년에서 건져내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극복하게 하시지만, 어떤 때는 오히려 어려운 상황으로 들여보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집에서 편안히 살기만 했다면, 그는 결코 수많은 사람을 흉년에서 건져내는 위대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극복의 능력>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순응의 지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임을 연습해야 합니다. 순응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긴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최근 유명한 목사님 한 분이 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몇 주 전 설교에서 교우들에게 암 판정을 받게 된 과정에 대하여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몇 달간 수술과 치료로 강단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신상에 관한 말씀을 마무리했습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저는 65세입니다. 생로병사로 이루어져있는 인간의 일생가운데 이런 과정이 다 포함되어있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인생 종반부를 맞는 제게 하나님께서 적절한 벗을 제 몸에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 평생 암을 동반자 삼아 살아가야하는 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제 인생을 매듭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제 처는 이런 복된 상황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님들께서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고 오히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이런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 교회를 통해 이 시대 속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고백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음과, 그러하기에 그 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응하고자 하는 마음을 밝히셨습니다. 저는 그 분이 건강할 때 끼친 감동보다 암으로 투병하는 시간 동안에 끼칠 감동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지만, 질병을 감당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더 진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시길 기원합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 생각에 좋은 것이든 어려운 것이든 상관없이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믿고 따르길 원합니다. 

우리네 삶은 그 많은 날들 중 특정한 어느 하루만 보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 하루는 슬픔의 하루, 상실의 하루, 고통의 하루일 수 있습니다. 그 하루 때문에 원망하고, 좌절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의 정확한 모습은 그 많은 날들이 다 끝난 후에 되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는 법입니다. 그 많은 기쁜 날과 슬픈 날, 힘든 날과 행복했던 날, 얻은 날과 잃은 날, 웃던 날과 울던 날이 다 합쳐진 가운데, 그 모든 날들 중에서 어느 하루도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데 실패하지 않고, 꾸준히, 변함없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바라보았다면 그는 세상을 잘 산 사람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흐르는 삶만이>란 시가 있습니다. 

[구름도 흐르고 / 강물도 흐르고 / 바람도 흐르고 // 오늘도 / 흐르는 것만이 / 나를 살게 하네 //  다른 사람이 던지는 칭찬의 말도 / 이러저런 비난의 말도 / 이것이 낳은 기쁨과 슬픔도 / 어서어서 흘러가라 // 흐르는 세월 / 흐르는 마음 / 흐르는 사람들 / 진정 / 흐르는 삶만이 / 나를 길들이네] 

이 시는 흘러가는 긴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 살아가는 것이 복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곤경도, 고난도 흐릅니다. 멈추어선 채로 평생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흘러가고 나면 그 후엔 기쁨도 오고, 은총의 날도 옵니다. 

욥의 고난도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을 통해 욥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하나님의 손길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을 알고 난 후에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던 모든 말들에 대해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딴 사람처럼 성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다 흐른 후에 그에게 회복과 축복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생을 그 분의 손안에서 흘러가길 원합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 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잠시 후에 부를 이 찬송처럼 아버지 되신 주님 품에 살면서 평생을 그분의 손길 안에서 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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