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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성경의 이상적 부부 (창 2:22-25, 행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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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이상적 부부 (창 2:22-25, 행 18:1-3)

탈무드에는 “늙는 것을 재촉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두려움, 노여움, 아이, 악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가지는 정신적인 것이고, 두 가지는 사람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늙게 하는 것이 악처란 말은 있고 악부라는 말은 없습니다. 탈무드는 남성 중심의 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부는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게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장수하기 위해서는 아내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아내가 장수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반드시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부부간의 갈등을 보면 남편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남편이 더 문제였는데 요즘에는 반대가 되어 아내가 남편을 늙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부부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데 요즘은 땅이 내린 부부가 많아서 탈도 많습니다. 
  
마태복음 19:6에는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합니다. 요즘은 사람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이 나누신다고 합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부부가 이상적 부부입니다. 
  
성경에는 부부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적 부부는 많지 않습니다. 모든 부부들이 에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부의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정을 창조하신 뜻입니다. 
  
일남일녀의 하나님의 원리를 깨고 최초의 일부다처를 한 사람은 라멕입니다. 창세기 4:19에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신 원인이 무엇입니까? 가정파괴입니다. 

창세기 6:2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고 합니다. 가정파괴는 온갖 죄악으로 치닫게 하고 하나님은 결국 인류를 홍수로 멸망시키기로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이상적인 우리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혼은 하지 않아서 우리에게 결혼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친히 정하신 혼인의 원리를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보면 결혼의 모델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훌륭한 부부였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습니다. 마리아가 약혼한 상태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그 일을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에게 간음죄로 고발하고 돌로 치게 해야 했었습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일을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약혼녀 마리아에게 돌을 던지기보다 차라리 자기가 돌에 맞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요셉의 사려깊은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입장에서 외아들 예수님을 어떤 부부를 택하여 보내실까 하고 상당히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육신의 부모로 택하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로 선택될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두 분의 사랑만 봐도 예수님의 부모님의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되는 날이라고 하여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이 날을 앞으로는 국가기념일로 하자고 하는 추진위원회도 결성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부부의 날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정해놨지만 아직도 그 날을 모르는 부부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따로 필요 없는 부부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부부관도 많이 변화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주종부부이었다가, 평등부부이었다가, 이제는 각자부부랍니다. 이렇게 급격하게 부부관이 변하는 시대에 이상적 부부관계를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우리 모두가 좋은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적 고난을 함께 겪은 성숙한 부부입니다. 

사도행전 18:2에는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고 합니다. 영적 삶과 가정생활과 민족적 고통을 함께 겪고 격랑을 살아온 부부입니다. 고난을 통해 모든 면에 성숙해진 부부입니다. 
  
남편인 아굴라는 소아시아 북부의 본도에서 태어나서 로마에 이주해 살다가 아내인 브리스길라를 만나 결혼한 듯합니다. 그 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내어 쫓을 때에 부부가 함께 고린도로 쫓겨 갔다가 다시 에베소에 갔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내면서 로마서 16:3에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한 것으로 봐서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에베소에 돌아왔습니다. 

디모데후서 4:19에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합니다. 부부는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에서 이탈리아인 로마로 갔다가 그리스인 고린도에 갔다가 다시 로마로 갔다가 터키인 에베소에 가서 에베소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로마의 글라우디오황제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떠나게 하므로 함께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민족적 아픔과 고난도 함께 하였습니다. 부부가 기쁨을 함께 하면 기쁨이 더해지고, 고난도 함께 하면 고난이 가벼워집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문화적 차이도 느꼈고, 재미있는 것도 많이 배웠습니다. ‘도시목회학’이란 과목을 공부할 때에 무주택자(Homelessness)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그 시간에는 홈리스 사람들이 직접 와서 그들의 아픔과 필요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시간을 시작하면서 교수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사를 몇 번 했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마 15번 정도 했을 것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랍디다. 왜 놀라는가 해서 봤더니 서양 사람들의 이사란 영국에서 태어나서 캐나다에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에 사는 것, 이런 것을 이사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할 때는 짐을 싣고 일주일 정도를 운전해서 옵니다. 우리가 하루에 집을 옮기고 이삿짐을 푸는 것은 이사도 아닙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보세요.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당시에는 육로나 해로가 다 위험할 때였습니다.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 먼 길 이사를 부부는 늘 함께 했습니다. 
  
성경적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5에는 부부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잠시만 방을 따로 쓰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란 방도 따로 쓰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부부란 무엇입니까? 부부는 두 개의 반쪽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결혼서약은 두 개의 물방울이 모여 한 개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가위와 같다고 합니다. 두 개의 날이 똑같이 움직여야 가위질이 됩니다. 가위의 날이 하나만 움직이면 가위질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란 호수와 같다고 합니다. 호수와 같이 피차의 실수를 한없이 흡수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래서 좋은 남편은 귀머거리이고 좋은 아내는 소경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못 들은 척 하는 것이 많아야 하고, 아내는 못 본 척 하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부부생활은 곰 다섯 마리(five bears)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곰 한 마리(a bear)가 있어야 합니다. bear는 참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시 곰 네 마리(forbear)가 있어야 합니다. forbear도 참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과 곰 네 마리(four bear)는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리와 네 마리가 합쳐서 곰 다섯 마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은 참고 또 참는 것이 최선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합니다. ‘참는다’는 말은 사람에 대한 인내를 말하고 하고, ‘견디다’는 환경에 대한 인내를 말합니다. 사랑이란 사람과 환경에 대하여 인내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환경에 인내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아내를 보세요. 욥이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도 좋은 환경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랑하는 부부였으므로 끝까지 인내하며 함께 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당신 없이 무엇을 하기보다 당신과 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입니다. 부부란 선행이나 악행이나 가장 좋은 짝입니다. 성경에는 나쁜 일에 절묘한 짝을 이룬 부부도 있습니다.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이 그렇습니다. 밭 판 값을 감추고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부부가 악한 일에 서로 닮지 말고 선행에 최상의 파트너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6:14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흔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짝을 이루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부부는 모름지기 멍에를 같이 해야 합니다. 부부는 두 사람 사이의 멍에가 풀리면 안 됩니다. 멍에란 두 마리의 소를 하나로 묶어 놓는 것인데 이것이 풀리면 두 마리 소가 함께 일하지 못합니다. 결혼은 거룩한 멍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묶여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포츠 가운데 보면 부부가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댄스나 혼성 피겨 스케이팅 등의 스포츠에서 파트너로는 부부가 최고입니다. 우리 부부들이 영적 고통을 함께 하는 좋은 파트너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행에 최상의 파트너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의 종과 함께 일한 부부입니다. 

사도행전 18:2 하반절에서 3절에는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영적 동역자이며 동시에 육적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헬라어의 동역자(synergos)란 ‘함께 일하는 자’(fellow-worker) 혹은 ‘도와주는 자’(helper)라는 의미를 가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 부분을 담당하다’(plays a part)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롬 16:21) 비롯한 여러 사역자들에게 동역자란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빌레몬과(몬 1), 디도(고후 8:23),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에게도 같은 칭호를 사용하였다(몬 24), 이 밖에도 우르바노(롬 16:9), 글레멘드(빌 4:3)와 그와 함께 사역하던 당대의 가장 뛰어난 지적인 목회자인 아볼로에게도 동역자라고 불렀고(고전 3:9), 당시에 가장 아름다운 부부의 관계를 보인 교회의 일꾼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도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롬 16:3). 

바울의 많은 동역자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든든한 동역자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교회의 창설자였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의 집이 교회였으니 얼마나 집이 복잡하였겠습니까? 집이 교회라면 남편보다 아내가 훨씬 더 힘이 들었을 것이고, 아내가 남편보다 훌륭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보다 교회에서 더 유력한 존재였다고 학자들은 한 결 같이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들 부부의 이름이 5번 나오는데 그중에 4번은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당시에는 남성우위의 사회이므로 부인의 이름이 남편보다 먼저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문 예입니다. 
  
고린도전서 16:19에는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합니다. 이 성경구절이 유일하게 남편인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경우입니다. 
  
저의 어릴 때 기억으로는 교회 안에 사택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후에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항상 사택이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다보니 내 것 네 것도 없고, 다리 뻗는 자리가 자기 자리이고, 많은 사람이 함께 살다보니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저의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브리스길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일뿐만 아니라 세상일도 함께 열심히 한 증거입니다. 거룩한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과 속’을 잘 조화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4에는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먼저 자기의 일을 잘해야 합니다. 가정의 일과 자신의 사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거룩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분하지 않고, 세속적인 일을 거룩한 일로 만들어야 참 일꾼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8:18에는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고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과 함께 세상의 직업인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선교에도 함께 했습니다. 혹시 경험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상에서 동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동업하다가 돈 잃고 사람도 잃은 경우를 저도 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도 함께 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선교사들끼리 가장 좋은 동역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갈등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바울과 동업했고, 하나님의 일에도 동업을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문화의 중심지이었습니다. 자연히 고린도교회는 문화와 학문이 발달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는 당대의 최고 엘리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교회가 아볼로라는 당대 최고의 인텔리 목회자를 그 교회의 목회자로 청빙하는 것을 바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에는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아볼로에게 목회자로 청빙하였지만 아볼로는 당장은 갈 수 없지만 다음에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최고의 엘리트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고 언변이 뛰어나고 성경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니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지식에는 뛰어나지만 성령의 감동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8:26에는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고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성경을 자세히 일러 주었습니다. 더구나 여성인 브리스길라가 당대 최고 엘리트 목회자를 가르쳤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가르치지 말라는 말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러기아빠’란 말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아내와 자녀를 보내고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아버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기러기아빠’는 웬지 긍정적 의미보다 그렇지 않은 의미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기러기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 전통혼례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奠雁禮)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 기러기를 바쳤습니까? 기러기는 좋은 세 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기러기는 시절을 압니다. 기러기는 먹이를 따라 먼 길을 가고, 추위를 피하여 이동할 줄 압니다. 둘째는 기러기는 예를 압니다. 대장 기러기를 따라 질서정연하고 일사분란하게 리더에게 불평하지 않고 이동합니다. 셋째는 기러기는 정조가 있습니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이루면 영원한 짝으로 삽니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 쪽은 평생 수절한다고 합니다. 이런 기러기를 닮아가라고 기러기를 바칩니다. 
  
너구리 부부는 암컷이 죽으면 수컷이 비탄에 잠겨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다가 쇠약해져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런 부부의 연이 좋은 동물은 그 외에도 재두루미나 부엉이 등이라고 합니다. 동물들 가운데 이렇게 짝을 이루면 변치 않는 것이 많습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네가 남편을 거지처럼 여긴다면 너는 거지의 아내가 될 것이고, 네가 계집종처럼 처신한다면 남편은 너를 노예처럼 다루고, 네가 자존심을 내세워 남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그의 소지품을 귀중히 여겨라. 네가 그리하면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冠)을 씌울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 아내를 사랑하고 연이 좋은 남편이 되세요. 

  
결론 

어느 아파트 앞의 현수막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내 생애 첫 번째 실수는 내 남편을 만난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아파트 분양받은 거다”. 여러분, 이런 실수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편, 아내를 만난 것이 생애 최고 최대의 행운이고, 축복이기를 바랍니다. 
  
기쁨도 고난도 함께 하는 부부가 되시고, 주의 종과 함께 하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부의 연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는 기러기 같은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기본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서로 협력해야 자녀가 잘되고 행복하고 평안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부부들이 이런 가정을 이루고 늘 주 안에서 행복한 귀한 가정을 이루는 좋은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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