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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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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 11:1-10)

 
저도 한 때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의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을 괴롭혔던 것은 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것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데 왜 유독 하나님에 대해서만 믿음을 요구하느냐? 그건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이 실제는 없는데 있다고 주장을 하다 보니까 믿음이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믿음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척 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사기가 아니냐?’ 이런 생각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들이 저에게 강력하게 다가오고 마치 무슨 음모론을 밝히는 사람처럼, 남들이 모르고 있던 굉장히 큰 허점을 제가 발견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때 그런 고민을 한 것이 세월이 지난 후에 믿음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할 때 했던 생각이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음이 증거합니다. 증거라는 말은 헬라어로 hypostasi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문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땅을 사고팔거나 증여할 때 땅을 직접 들고 와서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문서를 주고받습니다. 사람이 땅을 소장하는 게 아니라 땅문서를 소장합니다. 그런데 그 문서는 땅의 실체를 갖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의 실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보지 못하는 것의 실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여러 사람의 예를 들면서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노아를 예로 듭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여기에서 유념할 단어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장차 온 세상을 멸망시킬 홍수가 올 텐데 그래서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짐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했어요. 만일 홍수의 조짐이 보였다면 다른 사람들도 방주를 준비했을 것이지만, 도대체 세상에 홍수가 올 조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방주를 준비하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고 노아를 조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이 되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경고하신대로 홍수가 오기 시작하고 온 세상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는데 이 시점에서 방주를 준비하는 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맞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고 노아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이 그 시점에 증명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경고하시는 것은 처음에는 그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되면 그것이 눈에 보이는 응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왜 어려우냐? 그 실체가 처음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진위에 대하여 의심을 할 만합니다. 

만일 믿음의 대상이 영원히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구가 될 것이지만 여기에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시간이 되면 그 믿음의 대상이 나타납니다. 여자가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처음 여자가 아기를 가질 때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매우 작게 시작합니다. 뱃속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고 뱃속에서도 작은 세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기가 자라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여자가 거만하게 걷기 시작하고 그리고 아기가 뱃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응애’하면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제서야 그 아이가 눈에 보입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그것이 믿음을 잉태합니다. 이 믿음은 작게 시작합니다. 겨자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작지만 자라나요. 

믿음의 대상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이 우리 속에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믿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 믿었던 것이 실제로 응답이 되고 현실로 나타나는 때가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노아의 동시대 사람들은 노아를 멸시했다가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두 번째 예로 아브라함을 들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실 때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날도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다 알고 믿는 게 아니고 다 알지 못하지만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 장차 기업으로 얻을 땅을 알고 간 것이 아니고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 주변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이 땅의 유지요 재물이 많고 당신의 친척, 친구들이 다 여기에 있는데, 그 나이에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면서 어디로 간다는 말씀입니까?’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을 무모한 짓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순종이 무모하게 보입니다. 뜬 구름을 잡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과 뜬 구름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으면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처음에는 알 수 없지만 결국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지만 그게 아니고 사람의 무모함으로 말미암는 것은 무모함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분별력이 필요하고 믿음의 경험이 필요하고 믿음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을 처음 경험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기 때문에 ‘그리한즉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이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은 무모한 행위였다면 여전히 빈 손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입니다. 오래전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요. 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그 땅을 하나님이 우리 조상과 우리 민족에게 주신 땅이라는 믿음으로 그 땅에 나라를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은 마치 스테이크를 먹을 때 그 스테이크를 통째로 입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크기 때문에 입에 다 넣을 수도 없고 씹지도 못하고 삼키려다가는 목에 걸려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테이크를 어떻게 먹습니까? 입에 넣을 만큼의 크기로 칼로 썰어서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너무 큰 주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실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말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일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썰어서 생각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그것이 약속이든 경고든 처음에는 그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고 순종하노라면 때가 되었을 때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고 따르면 우리가 두고두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 헛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지만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고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하는 분이 계시다면 안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건대, 찾고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상을 주시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사람이 갖추어야 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7절에 있는 말씀대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경외함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고 이게 바로 경외한다는 얘기에요.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노아에게 장차 심판이 오리라고 경고하신 것은 엄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엄포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엄포를 놓으신 것이 아니고 진짜 심판이 옵니다. 진짜 홍수가 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실 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엄포가 아니에요. 괜히 사람들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헛되이 들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경외함이에요. 경외함이 필요합니다. 경외함이 있기 때문에 방주를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방주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경외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 번째는 8절에 있는 말씀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믿음을 믿음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에요. 순종이 믿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없다면 진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의 수혜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에요. 하나님이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여 유익을 얻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이 아브라함에게 유익이에요. 노아가 순종한 것이 노아와 그 집에 유익이에요. 노아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하지 않고 자기 집을 구원했다고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 이것은 탁상공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담론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해 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떠한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Vincere란 이탈리아 영화가 있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데 그가 나중에는 파시스트 리더가 되었지만 젊었을 때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 영화 초반에 젊은 무솔리니가 마을의 신부님들과 종교에 대한 공개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솔리니가 회중시계를 손에 들고 ‘내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일분 안에 나를 쳐 죽이시오!’ 이렇게 하나님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일분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무솔리니가 말하기를 ‘거 봐라.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다.’ 그 토론장은 아수라장이 되지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무솔리니는 시민군에 의해서 처형을 당해서 도시의 광장에 그 시신이 거꾸로 매달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일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영화 마지막 부분에 어떤 장면이 나오느냐면 무솔리니가 만들어 세워 놓았던 그의 동상이 거대한 프레스에 의해서 납작하게 빈대떡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무솔리니의 도전에 응하신 게 맞아요. 다만 무솔리니가 정한 시간에 응답한 게 아니고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다만 무솔리니 같은 인물은 하나님이 주신 상급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징벌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미련한 인간의 모습이에요. 왜 하나님의 상급을 통하여 하나님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당신을 증거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건 무익한 방법이에요.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고 이미 경험하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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