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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루 파고 거름을 줍시다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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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파고 거름을 줍시다 (눅 13:6-9)

1. 성경에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무엇이 얼마나 속이 상하였는지, 동생을 쳐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동생을 죽일 일입니까? ‘받아주지 않으셨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 하거나, ‘이번에 받아주시지 않았으면 다음에는 받아주시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2. “다 이유가 있겠지”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목사님이 있답니다. 운전을 하노라면 세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옆에 있는 분이 “어떻게 저렇게 급하게 운전을 하느냐”고 욕을 하면, “다 이유가 있겠지”라고 한답니다. 설교시간에 한참 진지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의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 후에 교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예의가 없느냐”면서 불평을 한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다 이유가 있겠지요.”라고 한답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요.”는 가인의 죄를 이기게 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3. 아람 군대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하여 시골학교의 선생님 같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국의 국방부 장관 정도 되는 사람이 한국의 시골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얼굴조차 보이지도 않고, 집안에서 말로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화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예의가 없느냐?”면서 다시 자기나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나라에 가면 더 큰 강도 있고, 더 깨끗한 강도 있으니, 그곳에서 몸을 담그면 될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말립니다. “우리가 자존심 세우자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 것이지 않습니까? 엘리사 선지자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라는 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기분은 나빴지만, 자존심은 상하였지만, 자기가 원하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습니다. 일곱 번째 물에서 나오는 순간에 그의 몸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하여졌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내 방법대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내 방법이 우선이었으면 할 것입니다. 내 방법대로 되지 않아서 힘이 들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포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은 생각을 바꾸어서 “다 이유가 있겠지”하면서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4. 에이브라함 링컨의 위대함은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미국의 노예해방 문서에 서명을 하였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가 유명한 사람인 것은 그는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809년 2월 12일에 켄터키 주의 라루 컨트리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습니다. 1816년에 그의 가족은 잘못된 토지재산 소유권의 문제로 모든 땅을 잃었습니다. 1818년에 그의 어머니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로 인하여 중독이 되어 34살에 돌아가셨습니다. 1831년에 사업에 실패하였습니다. 1832년에 주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습니다. 1833년에 사업을 재개하였다가 또 실패하였습니다. 1834년에 약혼녀가 사망하였습니다. 1836년에 신경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1843년, 1848년에 하원의원에 두 차례 낙선하였습니다. 1954년, 1858년에 상원의원에 두 차례 낙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실패에도 굴복하지 않고 1860년에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답니다. <내가 걷는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바닥 위에 넘어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괜찮아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해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5. 오늘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3년이 지나서 열매를 얻고자 하였으나 열매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땅만 버리느냐면서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열매가 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때 가서 찍어버리소서.”

6.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가 희망적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 일반적인데, 예수님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은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아마도 포도원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말하고, 무화과나무는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로 이방인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고, 무화과나무는 죄인들인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죄인들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심기어진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어진 것은 특별한 축복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은 은혜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권한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 같고 구름 같은 인생을 살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할 때에, 인생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7. 포도원에 심기어진 무화과나무의 사명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포도열매보다 좀 더 일찍 익습니다. 그렇기에 포도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식사가 되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일차적인 것은 포도원의 일꾼들의 식량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양식이 된다는 것은 매우 값진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유익함을 주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는 세상은 참으로 아픔이 많고 고통이 많은 세상입니다.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어진 것처럼 참 어울리기 쉽지 않고 어색하고 힘든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거 하나만 생각하면서 믿음생활을 하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시기를 축원합니다.

8.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내가 먼저 도움을 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전에 자신을 배려하여 주기를 바라고, 누군가의 기쁨이 되기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쁘게 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인지, 3년을 지나도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잘못 심었다고 판단을 했는지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땅만 버리게 둘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한 번 해봐서 안 되니, 그만두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속담과 같은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안 되는 놈은 떡잎부터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끝인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계속하여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의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보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통하여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9. 이 말씀의 핵심은 어떻게 한 번 안 되었다고 그것으로 끝내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닐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의 기회는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두루 판다는 것은 깊이 파는 것일 수도 있고, 넓게 판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당하게 판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적당하다는 것은 <대충대충>이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알맞게>라는 의미입니다.

너무 깊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는 새 흙이 나와야 하지, 거름이 들어가면, 열이 너무 강하여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거름에서는 열기가 나오기 때문에 깊은 곳에 숨어서 열을 내게 되면 뿌리를 상하게 합니다. 또 너무 넓으면 그 거름 기운이 무화과나무에게 닿지 못하고 다른 잡초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적당하게 파야 합니다. <대충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알맞게, 적당하게, 필요 적절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10. <알맞게>의 의미를 사도바울이 아주 적절하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0-22)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바랍니다.

11. 이제는 거름을 주는 일이 남았습니다. 거름에는 3가지 성분이 있습니다. 질소, 인산, 가리입니다. 비료의 삼요소라고 합니다. 질소는 잎사귀를 푸르게 하고 줄기를 튼튼하게 하는 성분입니다. 질소가 부족하면 잎사귀가 노랗게 되고, 잎사귀가 작아집니다. 인산은 열매를 맺게 하는 요소로 과일의 신맛을 적게 합니다. 인산이 부족하면 과일이 작아지고 익기도 전에 떨어지게 됩니다. 가리는 칼륨이라는 성분인데, 뿌리를 튼튼하게 합니다. 이것이 부족하면 과일의 당분이 부족하고 잎사귀의 가장자리가 마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름을 주는 일의 핵심은 음식을 가리지 말고 <골고루>먹는 것처럼 <골고루>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합니다. 질소처럼 푸르기만 해도 안 되고, 가리처럼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인산처럼 열매만 맺고자 해서는 안 되고, 질소처럼 나무와 잎이 튼튼해야 합니다.

저는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가리를 기도라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더욱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인산을 사랑이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기와 잎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말씀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먹어야 건강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12. 이번 주 금요일부터 부흥회가 시작됩니다. 부흥회는 거름을 주는 기간입니다. 질소와 인산과 가리의 양분이 있어서 뿌리도 튼튼하고, 잎도 푸르고, 열매도 맺는 기회이기를 바랍니다. 믿고 사모하는 이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어찌 힘이 든 일이 없겠습니까? 어찌 낙심할 일이 없겠습니까? 속이 상한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실망하신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사람 사는 곳에 어떤 일은 없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수님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계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각자의 영혼에 기도와 사랑과 말씀의 거름을 주어 다시 새롭게 시작하시는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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