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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 (시 1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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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 (시 16:5-11)
  
지난 주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북한을 탈북한 탈북 청소년 9명이 라오스까지 왔다가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15세에서 22세까지의 젊은 아이들(남자 7명과 여자 2명)이 북한을 탈출해 라오스에 도착한 것은 지난달 5월 9일이었습니다.

탈북자를 돕던 우리나라 선교사 부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라오스까지 왔지만, 우리나라 대사관에서는 그 탈북 청소년들에게 아무 것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탈북 청소년 9명이 라오스에 억류되었을 때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사관측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그 사이 북한이 개입하면서 결국에는 중국 북경을 통해서 북한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북한으로 끌려간 그 9명의 젊은 아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들이 북한으로 되돌아간 후에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할지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아이들인데, 우리가 그들을 돕지 못해 다시금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자신들의 가정과 삶의 터전을 뒤로 하고 탈북을 결심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탈북하면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받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그곳에 사는 것이 지옥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도 지옥과 같기에 여기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 속에 하루하루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여기 매일이 지옥 같은 삶이었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꿈꾸며 살던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과 시기와 질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건진 이후의 삶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먼 타국에 노예로 팔려갔고, 어린 나이에 낯선 땅에서 노예로서 온갖 노동에 동원되어 희망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고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노예이지만 그의 지위가 조금 나아질 무렵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감옥에서 만난 권세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이 도움을 주었던 사람에게도 잊혀진 존재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겹겹이 둘러싼 고통과 시련의 삶 속에서도 그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울타리 안에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을 버렸던 형제와 가족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극심한 기근과 가난으로부터 구원하는 거목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것은 그가 당대 최강대국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극심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에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모든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위대한 모습이고, 그런 요셉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요셉과 같이 힘든 삶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8명의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밖에 나가서 양을 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별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고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새로운 왕을 세우시겠다.’고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셨을 때 이새는 자기 아들들을 다 사무엘 선지자 앞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를 대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게 불러모아놓고 그 아들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누군가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울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새는 자기 아들들을 다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막내인 다윗만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들이 모두 사무엘 선지자 앞에 서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으려 할 때, 다윗은 홀로 들판에 남아 양떼를 돌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도, 왕으로 선택을 받는 자리에서도 제외가 되었습니다. 그마만큼 다윗은 아버지 이새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죽인 이후에 왕궁으로 불려가서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 왕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음에도 그는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맞게 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찾아 나섰고, 다윗은 결국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야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지금 자신이 겪고 있은 이 시련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인내함으로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6편의 시를 다윗이 언제 기록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이 피난생활을 하고 있을 때 지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사울 왕이 목숨을 노리고 있어 광야 황무지로 몸을 숨겨야 할 때에 지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어느 때에 이 시를 지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이 시를 지을 때는 몹시도 힘들고 어려웠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라는 탄원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에서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고,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스올’은 지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다윗의 상태가 마치 곧 지옥에 내려갈 것만 같이 힘든 때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지금 자신의 삶의 울타리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이라는 말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형편을 말합니다. 

여러분, 곧 지옥에 내려갈 것만 같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다윗이 지금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노래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이라고 해서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윗도 힘들 때는 힘이 듭니다. 사울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 다닐 때에는 온 몸이 지치기도 했습니다. 남들처럼 마음이 아플 때에는 그 고통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로 인해서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의 죄악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를 치셨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시름시름 앓습니다. 그 때 아버지로서 다윗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러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아이는 7일 만에 죽고 맙니다. 그 때까지 다윗은 마음이 너무 아파 울면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힘들어하고, 똑같이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다윗도 느끼고, 우리처럼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어떻게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에 우리처럼 불평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네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이 아름답다고, 지금 내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다윗은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지금의 삶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하나님께 ‘나를 지켜 달라.’고 기도했고, 8절에서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힘든 삶의 여건에 파묻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주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사는 것이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제하는 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이 기쁨이요 행복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을 때에만 내 삶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제하시기 위해서 제한시켜 주신 구역’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기 위해서 줄로 제한해 놓으신 구역 안에 살 때 우리는 하늘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고, 하늘의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그 구역을 벗어날 때 우리에게는 시련이 찾아옵니다. 고통이 찾아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 통제된 구역을 벗어날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밧세바와의 범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그 구역을 벗어나 자기 욕망을 채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통제된 구역을 벗어난 대가는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통제해 놓으신 구역을 벗어나 범죄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며, 내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라.’(사무엘하 12:10-11)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초라한 양치기 목동을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만일 다윗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더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을 벗어나 욕망의 구역 안으로 들어갔고, 그 결과는 오히려 그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것들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안 다윗은 ‘줄로 재어 준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훈계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7절입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준 구역 안에 머물도록 끊임없이 훈계하시는 하나님이 고마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이유는 그 아름다운 구역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아름다운 구역을 벗어나면 마치 물 밖으로 도망쳐 나온 물고기처럼, 우리의 삶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깨우쳐 주시고, 밤마다 양심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8-1948)가 어렸을 때였습니다. 그도 어렸을 때에는 평범한 소년들처럼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는데, 그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습니다. 집에 들어왔는데도 자꾸만 그 양고기가 생각이 났고, 먹고 싶다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그 양고기 가게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 먹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꾸만 아버지의 돈을 훔쳤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괴로워하다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는 벌을 받더라도 아버지에게 고백하는 것이 낫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늦은 밤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를 깨워 직접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작은 종이에다가 잘못한 것에 용서를 비는 글을 간단하게 적고, 그것을 돌돌 말아서 아버지의 방문 열쇠구멍에 끼워놓았습니다. 그
리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자신을 깨워 호통을 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침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살금살금 아버지 방문 앞으로 가서 열쇠구멍을 통해서 방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간디가 쓴 그 종이조각을 손에 들고 읽으시면서 눈물을 닦아내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 아들을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은 그 사랑의 감격을 간디는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내가 마땅히 머물러 있어야 할 ‘줄로 재어 준 구역’ 안에 거하도록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양심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 양심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결코 행복과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그 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줄로 재어 우리의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가정이라는 구역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하늘 기업의 구역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가장 먼저 가정을 만들어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정이 천국의 기쁨을 체험하는 아름다운 구역입니다. 우리 가정이 남들보다 더 부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은 가족이 있을 수도 있고, 속 썩이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지금의 내 가정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가장 아름다운 구역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일터입니다.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구역’입니다. 직장인에게는 우리가 일하는 직장이, 사업가에는 내가 운영하는 사업체나 가게가 하나님께서 ‘네게 줄로 재어 주신 아름다운 구역’입니다. 그 일터에서 나는 남들만큼 돈을 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남들보다 승진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운영하는 사업체가 부도날 위기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만큼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아 부끄러울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가장 아름다운 구역’입니다. 

어제 아침 신문에 인도에 사는 한 모자(母子)의 사진의 실려 있었습니다.(사진) 이들이 신문에 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3년 어머니는 이웃 주민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5개월이었던 어머니는 ‘자신은 살인사건과 무관하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다음 해인 1994년 항소심에서 5000루피(우리 돈 약 10만원)에 보석을 허용했습니다. 우리 돈 10만원을 내야 하고, 그것을 내기만 하면 풀려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편지로 ‘다른 여자와 재혼할 것이고, 보석금을 납부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계속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그해 감옥에서 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후 그녀는 20년 동안이나 보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낳은 이 아들은 여섯 살까지는 교도소에서 살다가, 여섯 살이 넘어서면서 소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위탁가정과 학교 기숙사를 전전하면서 아이는 어머니를 그리웠고, 열여덟 살이 된 지난해에 마침내 독립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신발공장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보석금을 마련해서 어머니를 감옥에서 석방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년이 넘게 신발공장에서 일을 해 10만원을 마련하게 되었고, 드디어 어머니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어머니를 감옥에서 빼내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10만원이 없어서 20년을 감옥에서 지낸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고, 남편에게서 이혼을 통보받아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태어난 아들은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1년 간 죽도록 일해서 10만원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감옥에서 빼내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비록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에 비하면 많이는 아닐지라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비록 일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나쁘다 하더라도 나의 보금자리에서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다.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곳이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아름다운 구역입니다. 우리가 욕심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아름다운 구역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구역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살기에 다윗은 절망과 같은 자리에서도 ‘이곳이 아름다운 구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는 어떤 구역입니까?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자리에서도 기쁨의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 결코 우리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손을 놓아버릴지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고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삶과 삶의 여건이 내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실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해 드린 마더 테레사 수녀가 쓴 ‘그래도 행복하십시오.’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친절을 베풀어도 사람들은 뭔가 저의가 있을 것이라고 수군 댈 것입니다. 
    그래도 친절을 베푸십시오. 
    당신이 성공을 거둔다면 거짓된 친구나 적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거두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해도 사람들은 당신을 속이려 들 것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이루어 낸 것을 누군가 하룻밤 내에 무너뜨려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루어내십시오. 
    당신이 평온과 행복을 찾으면 사람들이 질투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행복하십시오. 
    당신이 오늘 선을 행해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십시오. 그것으로 충분치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획득한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그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땅에 것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만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에 끌려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줄로 재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구역인 우리 가정에도 늘 함께 하십니다. 당신이 줄로 재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일터에서도 우리의 손을 꼭 붙잡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줄로 재어 주신 아름다운 구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영원한 즐거움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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