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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을 아십니까? (요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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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아십니까? (요 16:5-7)


I. 성령이 오셨다

열두제자들에겐 예수 한분이면 충분했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모자랄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정치인, 종교인들의 공격과 시험이 와도 통쾌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만 옆에 계시면 아쉬울게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만찬을 베푸시더니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제자들은 몹시도 당황했습니다. 또 얼마나 상심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걱정이 되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몸을 입으신 성자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나면 하늘로부터 영이신 하나님 즉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성령이 오셨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순절 이 날은 교회의 생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시대 즉 성령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믿는 우리에게 일어난 기적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도 작고 추해서 계실 수 없던 그 하나님이 누추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을 아십니까? 성령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늘이 땅을 침노할 때」라는 빌 죤슨의 책에 보면
현대신앙인들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이 안도와줘도 잘 산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위기라는 거지요.

짐 심발라 목사님도 「성령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책에서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삶이 성령님 없이도 행복하다면 그건 위기다.”

신앙이 침체되었습니까? 
누군가와의 관계가 깨졌습니까? 
예배에 은혜가 안되고 지루하게 느껴지십니까? 
죄가 당신 곁을 떠나지 않습니까? 
거룩한 사역에 위기가 왔습니까? 
속된 것들만 재미가 있습니까? 
당신의 삶에 성령론적 위기가 온 것입니다. 

II. 보혜사 성령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퍽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자신을 보내신이에게로 가고 대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은 꼭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단순한 power - 힘, 혹은 감동이나 영향력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지도자를 속였을 때 
그것은 성령을 속인 것 곧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전지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라고 합니다. 여기 of는 소유격이 될 때 하나님께 속한 영, 하나님이 보내신 영이 되지만 of가 동격소유격이 될 때 “성령이라는 하나님”이란 뜻이 됩니다. 
The city of washington은 와싱톤에 속한 도시가 아니라 
와싱톤이라는 도시입니다. 이것이 동격 소유격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여기 운행한다는 말은 
첫째 온 우주 에너지의 근본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신명기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신다고 할 때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온 우주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독수리처럼 빙빙돌며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주변을 빙빙돌며 당신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될까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을 본문에서는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를 
The Comforter – 위로자,  The Counseler – 상담자,
The Helper – 돕는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의 보혜사는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번역을 참 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나는 힘도 빽도 없는 
민초에 불과하지만 내 안에 내 곁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 성령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할 때 성령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낙심되고 기운이 빠질 때 성령님이 힘을 주십니다.
재주가 없어 아무일도 할 수 없을 때 성령님이 은사를 주십니다.
똑똑하지 못해도, 야심이 없어도 성령님이 복을 주십니다.
당신이 너무 똑똑하여 자신만 믿고 사는 것 보다는 부족한 점이 많아 
성령님을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성령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14:16-17)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 “영원토록”은 “어떤 경우에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형편 어떤 사건속에서도” 그런 뜻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 때 함께 하시지요. 
그러나 비록 내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잘못된 길을 갈 때에도 
성령님은 근심하시며 나와 함께 하십니다.(엡4:30)
우시고 탄식하시며 나와 함께 하십니다.(롬8:26-27)
때로 달래고 책망하시며 나와 함께 하십니다.(요16:7-8)

예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이 지금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예배하는 이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설교하는 저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성령님 찬양합니다. 
저는 설교단에 서기전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성령님, 저 강단에 성령님이 서십시오. 그리고 저를 사용하십시오. 
저혼자 설교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III. 인격이신 성령님

이처럼 성령님은 단순한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인격이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령을 내가 붙잡아 휘두를 수 있는 어떤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살아계신 인격이십니다. 
성령님이 나를 붙들어 쓰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7절을 잘 보십시오. 
성령님은 그것(it)이라고 하지 않고 그분(He)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신다” 존대어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님에 관한 모든 대명사를 그것이 아니라 그분 
즉 인격 대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전 전세계 성령폭발의 원동력이 되었던 
R.A. Torrey 목사님은 19세기 초에 썼던 
그의 「성령론」 첫장을 “성령의 인격”이란 제목으로 할애하고 
대단히 길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연한 열정과 광신적인 태도를 갖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를 펼쳐 1장부터 한번 살펴보십시오. 
모든 찬송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성부성자와 성령 찬송과 영광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영광 아멘 (찬송가 3장)

토레이 목사님의 설명처럼 성령님은 우리가 붙잡아서 어떤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붙잡아 사용하실 때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감사하는 한 가지 사실을 내가 붙잡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벌레와 같은 나를 성령 하나님이 붙들어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볼기맞는 신”이 있습니다. 농사를 하든 사냥을 하든 어디에 가든지 이 나무토막 신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날 사냥이 잘되면 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사냥에 실패를 하면 그 신이 안도와 줬다고 볼기를 때린다는 겁니다. 
성령님은 볼기맞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경배합니다. 
성령님은 지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계십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고전2:10 롬8:27)

성령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기뻐도 하시고 근심도 하시고 탄식을 하시기도 합니다.(엡4:30, 롬8:26)
성령님은 친히 역사하시고 은사를 나눠주시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십니다.
(고전12:11, 행16:6-7)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성령님은 연약한 자를 도우십니다.
이 시간도 인격이신 성령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십시오.
그분이 역사하시도록 당신을 그분께 복종시키십시오.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지 마십시오.

이 공간안에 전파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T.V.든 라디오든 싸이클을 맞추면 소리도 잡히고 영상도 잡힙니다. 여기 성령님이 충만히 임재해 계십니다.
영적 싸이클을 그분께 맞추면 이 시간 성령님이 충만히 역사하십니다. 

IV. 성령의 상징(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우리가 성령님을 환영하고 영접할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실까요?
성경은 성령님의 모습을 상징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 성령님은 “불”로 임하십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님이 “불의 혀”같이 임했습니다. 
이사야서의 성령님은 “소멸하는 영”으로 임하시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a spirit of fire – 즉 “불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불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타는 떨기나무로 임했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불로 임하셨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신앙생활이 냉냉해졌습니까? 예배를 하는 이 시간조차 가슴이 뜨겁지가 않습니까? 불같은 성령이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불은 태우는 역사를 합니다. 가장 완전한 소독은 불로 태우는 방법입니다.
불같은 성령이 오시면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이 내안에서 불타 없어집니다. 
죄의 유혹들이 소멸되고 사라집니다. 죄를 이기는 권세가 나타납니다. 

불은 빛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둠의 영들이 물러가고 진리를 밝히는 빛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불은 능력입니다. 불은 폭탄이 되고 큰불은 원자폭탄이 됩니다. 
불은 차를 달리게 하고 비행기를 날게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 신앙을 달리게 하고 날게 합니다. 
오늘 신앙생활이 침체된 분들에게 불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2. 성령님은 물로 임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세상이 주는 물도 목마를 때 마시면 시원합니다. 그러나 그 물은 다시 목마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부부간의 사랑, 부모 자식간의 사랑, 세상이 주는 재미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원한 생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곁에 자식 때문에 우는 부모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간에 실망과 상처로 목마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것들에 목말라 허덕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받지 마십시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성령님만이 여러분을 만족케 하십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우리 몸은 6-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결국 생물은 시들어 갑니다. 물은 우리 몸을 씻고 옷을 깨끗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물같은 성령을 받아 신앙과 삶이 싱싱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목마름이 사라지고 삶이 만족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유쾌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님은 바람같이 임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바람이라는 단어와 성령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똑같은 단어로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루아하”, 헬라어 “프뉴마”는 꼭같이 성령 혹은 바람 
- 같은 의미로 쓰여집니다. 

니고데모에게 성령님은 주도적으로 불어오듯이 사람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는 역사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구원받지 못하신 분이 있습니까?
성령님이 바람처럼 불어와 예수님이 믿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거듭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이 주신 구원의 확신은 세상 그 무엇도 빼앗지 못합니다. 

4. 성령님은 도장 – 즉 인치심으로 임하십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도장은 소유권입니다. 성령님은 임하셔서 너는 나의 소유라고 확인하십니다.
너는 구원받은 천국백성이 확실하다고 확인해 주십니다. 

5. 성령님은 당신의 사역자를 거룩케 하는, 영광스럽게 하는 기름처럼 임하십니다.
6. 성령님은 땅을 적시는 비처럼 임하십니다.
7. 성령님은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비둘기처럼 임하십니다.
8. 성령님은 기쁨과 희락의 이슬처럼 임하십니다. 
9. 성령님은 권능의 옷처럼 임하십니다.

V. 성령님을 사랑하는 교회

우리가 살았던 지난 2000년은 퍽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20세기가 갈무리되고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천년이 두 번째 마무리되고 또 다른 천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마두동 예배당이 건축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새 예배당에 들어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 우리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세워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세계교회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역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을 이곳저곳 세계교회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세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책을 연구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발견한 소중한 결론이 있습니다. 

첫째 마지막때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는 살아있는 예배, 성령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였습니다.

둘째 교회 모든 교우들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성령님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모일때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 성령님 인정합니다. 성령님 사모합니다.
성령님 마음껏 역사하소서. 성령님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고백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셋째 잃어버린 영혼 – 즉 불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을 전하여 부흥되는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교회의 최대 위기는 기독교가 성령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성령의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아십니까?
성령님을 사랑하십니까?
성령님을 사모하십니까?
성령님으로 충만하십니까?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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