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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히 여길 자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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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히 여길 자 (빌 2:25-30)


유고슬라비아에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십대 소녀가 되었을 때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불타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선교사를 자원했으며 수녀가 되어 인도 캘커타로 갔습니다. 거리를 지나다가 병든 여인을 보았는데 돌보는 사람이 없어 몸의 한쪽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쥐들이 썩은 부위를 파먹고 있습니다. 참담한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힘없는 여자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마음을 잡아당기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도와야 한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그러자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내가 도와도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하겠죠.” 그녀는 즉시 발걸음을 돌이켜 여인을 들쳐 업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한 사람씩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비좁은 집에 사람들을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도시의 행정 관리를 찾아가 집 옆에 비어있는 힌두교 성전을 빌려달라고 청하고 클리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종교를 초월해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감동을 남기고 떠난 마더 테레사(Madre Teresa)의 이야기입니다. 

테레사가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 영국 BBC 기자 머코리치가 캘커타의 테레사 클리닉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행복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테레사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때 그녀는 흥미 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힘들지요.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힘든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즐거운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영어로 레이맨 (Laymen)입니다. lay는 헬라어 ‘laicos’에서 나온 단어로 어원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교회 안에 99%의 평신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교회를 알리는 일에 있어서 평신도는 1%의 성직자보다 훨씬 더 역량이 크고 중요합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 맡겨진 역할을 다할 때 교회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협력 없이 교회 부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별개의 관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서로 돕고 보완해 가는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역자가 평신도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평신도 역시 교역자를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나서도 안 됩니다. 교역자와 평신도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악한 세력과 함께 싸우는 전사들입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관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평신도 에바브로디도는 ‘매력’ 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존귀히 여길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을 했든 성공하지 않았든 자기를 희생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렇다면 ‘존귀히 여길 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입니까? 

첫째로 함께 수고하는 자

레드우드 내셔널 팍(Redwood National Park)은 레드 우드라는 커다란 붉은 나무가 있는 미국 주립공원입니다. 나무 둥치에 차가 왕래할 수 있는 터널이 있을 정도입니다. 나무의 굵기는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하며 높이는 까마득합니다. 식물학자들이 그 나무를 연구했습니다. 뿌리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파헤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통나무의 깊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히 여기고 계속 연구했습니다. 결국 알고 보니 나무의 뿌리가 옆의 나무들과 굳건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의 이름을 '더불어 사는 나무‘라고 붙였습니다. 카네기 연구소에서 성공의 원인은 85%의 실력과 15%의 인간관계라고 연구결과를 제시했습니다. 교회도 더불어 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모두 개성이 있지만 관계 속에서 더불어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함께 수고하는 동역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수고(synergo)' 라는 단어는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시너지(synergy)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시너지 효과'라는 것은 어떤 일이 서로 합하여져서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협력함으로 복음전파를 극대화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힘을 모은 동역자가 함께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 진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수고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고 노예관계도 아닌데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만으로 함께 수고한 것입니다. 함께 수고하는 자는 라이벌이 아닙니다. 사람을 대할 때 원수로 대하지 말고 동역자 마인드를 가질 때 성공적 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 아픔을 함께하며 수고했습니다. 함께 수고하는 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동역자요, 누구에게나 존귀히 여김 받을 자가 분명합니다.  

둘째로 함께 사랑하는 자

스펄젼(Charles H. Spurgeon) 목사가 런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어떤 교우가 주일마다 찾아와 “이번 주일에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명단을 주십시오” 라며 20명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명부를 머리맡에 붙여놓고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다음 주일날도 새로 나온 사람 20명을 가지고 가서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 가며 기도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펄젼 목사가 장례를 집례하며 말했습니다. 

“이 분은 새로 나온 사람의 이름을 20명씩 받아 가지고 그것을 놓고 기도한 사람입니다. 나와 함께 기도하던 가장 훌륭한 동역자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 나온 사람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가며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함께 사랑하는 동역자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함께 사랑하는 자가 바로 존귀히 여김 받을 자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라디도는 성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인하여 오히려 병이 다시 들 지경이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교회를 먼저 걱정하였습니다. 자신이 병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질까,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할 까 더 마음을 아파했습니다. 자신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심히 근심한지라’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심정과 같은 표현입니다. 함께 사랑하는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긍휼히 여겨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불신자들은 우리 속에서 예수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에서 사랑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디 자신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며 성도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함께 목숨 거는 자

초대교회사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을 ‘파라볼라이’ 라고 불렀습니다. 고대사회에 전염병이 많이 돌았고 전염병이 돌면 가족도 그를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인 중에 파라볼라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전염병 지역에 찾아들어가 환자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죽기도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5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 도시에만 파라볼라이가 6백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 30절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여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헬라어로 ‘파라볼류오’ 인데 ‘위험을 무릅쓰다’라는 뜻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도우려다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왔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기뻐하는 이유는 함께 목숨을 거는 자들이 주위에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하려면 희생하는 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한 자들은 자기 것을 지키려고 안달이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만 원망하고 있습니다. 모두 함께 희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목숨을 걸어야 위기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평신도들이 잠자는 교회는 비전이 없습니다. 구경꾼들로 가득 찬 교회 역시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평신도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함께 일하는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웨일즈 부흥 운동이 어떻게 일어난 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13년간 하루 같이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 왔던 광부 출신 이반 로버츠(Evan Roberts)라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저를 부수어 주옵소서.” 그의 기도로 9개월 만에 십 만명의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러한 평신도들이 필요합니다. 말없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을 존귀히 여기는 일은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 바울은 디모데와 같은 신실한 제자와 에바브로디도 같은 일군을 곁에 두었으며 서로 한 뜻이 되어 함께 주님을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이들처럼 나의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 이루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로 함께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며 함께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부디 함께 수고하며 함께 사랑하며 함께 목숨을 걸고 헌신하므로 언제나 존귀히 여김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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