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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갈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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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갈 1:6-12)


며칠 후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백 일이 됩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 국민 행복 시대를 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대통령과 참모들 간에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대통령 주위에 바른 말, 즉 쓴 소리를 하는 참모가 전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나라 꼴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민 행복 시대가 아니라 국민 불행 시대가 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대통령부터 먼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교회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기존의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제자들도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등장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인들은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왔습니다. 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유대인들은 그대로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 요구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꼭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바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토록 심하게 비난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인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예 하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라도 의로워지려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요 또한 율법은 자기 만족만 제공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의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이방인 성도들을 대표하는 사도 바울이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율법을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의로워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십계명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열 번째 계명은 또 무엇입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런 것들만 봐도 율법은 개인이나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할례도 위생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율법의 폐기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율법 폐기론자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질서도 무시하고 다만 열광적인 종교 체험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는 그런 주장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율법을 폐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율법을 폐기했다는 오해를 받았습니까? 

그 까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이방인 성도들은 지금까지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 준수를 계속 강요하면 그들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이 그냥 죄인으로 남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상반절)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신학은 막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막연하기 때문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율법은 아주 구체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안에 있으면 뭔가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구체적인 삶의 지침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육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이 믿음이 그에게 있어서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그렇습니다!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바르게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확실한 신앙 지식으로 무장할 때에 비로소 어두움을 헤치고 바른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거짓 가르침이 판을 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쓴 소리를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변호하고 나선 것은 오직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막중한 책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거나 그들에게 굴복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교회를 포기하고 새로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잘못을 지적하며 꾸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용기가 없으면 아니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용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아첨하는 소리가 아니라 쓴 소리를 하는 참모가 꼭 필요한 것처럼 교회를 항하여 바른 말을 하는 용기가 요구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도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갈 때에 그들의 잘못을 분명히 꾸짖지 않았습니까? 다만 잘못을 꾸짖었을 뿐 아니라 지켜야 할 복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가 겪었던 그 위기 상황을 오늘 한국 교회도 겪고 있습니다.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십자가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 결과 또 다시 율법이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미 그런 현상이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그릇된 생각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율법은 결국 자기 의에 불과하고 자기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담대하게 그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참으로 복되고 충성스러운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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