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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무엇에 취한 사람인가? (행 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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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취한 사람인가? (행 2:14-21)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유형별로 정리하였습니다.

첫째로 숙취혼절형입니다. 술만 취하면 아무데나 쓰러져서 자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술자리에서 자는 형과 술집 주변에서 자는 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데 조용하기는 하답니다.

둘째로 대성통곡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술만 먹으면 막 운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우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이유가 있어서 울기보다는 이유를 만들어서 운답니다. 

셋째로 고성방가형입니다. 대성통곡형과 비슷한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범죄로 처벌받습니다.

넷째로 안하무인형입니다. 얌전하던 사람이 술만 먹으면 개가 됩니다. 아무에게나 시비 걸고 상사에게 대들어 다음날 사과하기 바쁜 사람입니다. 아무도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다섯째로 망가지는형입니다. 술에 취하면 숨겨져 있던 끼가 발산되는 사람이랍니다. 끼가 드러나는 것까지는 좋은데 넥타이로 머리끈하고, 툭하면 탁자 위로 기어 올라간답니다.

여섯째로 노상방뇨형입니다. 술만 취하면 바바리맨 흉내를 내는 것도 아니고, 아무데서나 실례한답니다. 전에는 남자들이 주로 이랬는데 요즘은 여성들도 길거리에서 이런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술만 취하면 길거리를 헤매는 방랑시인형, 술에 취하면 이유 없이 뛰기 시작하는 분노질주형, 필름이 끊겼다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는 시골극장형, 술만 취하면 옆에 있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공갈협박형, 한 말 또 하고 또 하여 밤새도록 같은 비디오를 돌리는 휭설수설형, 기타 등등이 있다고 합니다.

구약 성경 잠언도 술 취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33-35)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은 술 취하기 전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힘을 빌어서 전에 안하던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것이기에 술은 취하지 말고 성령은 충만하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모여 오로지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고, 그 성령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강권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2:13).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성령 충만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술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이었습니까? 그들은 만취한 것입니까?

  
I. 만취
  
방언하는 사람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도 술에 잔뜩 취한 만취(滿醉)의 모습이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하기야 평소에도 큰소리 뻥뻥 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고 큰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계시면 용감하게 칼을 뽑았습니다(요 18:10). 하지만 그는 두려움에 여지없이 꼬리를 내리는 심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끌려가신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기 잡으러 바다로 갔던 사람입니다(요 21:3).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다시 전에 호기롭던 그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곁에 계신 것도 아닌데 다시 일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술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서서 소리를 높여 일렀습니다. 여기에서 ‘이르다[ajpofqevggomai/아폽흐뎅고마이’]는 말은 ‘분명하게 말하다’, ‘발표하다’는 말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엄숙하게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베드로야말로 무엇인가에 단단히 취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에 없던 용기가 넘쳤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셔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때만 용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의 곁에 계시지 않는데도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라고 외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그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에 만취되어 용감하게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함께 계신 성령님께서 용기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술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반박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15절 말씀입니다.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제 삼 시’는 아침 아홉시를 가리킵니다.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공동]고 선언합니다. 아침부터 술에 취하여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성령 충만이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떠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술 취한 것이 아닙니다.

‘간이 큰 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쥐들이 모여서 회식을 하였답니다. 그 중 술을 못 먹는 어리바리한 쥐가 술을 잔뜩 마셨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악바리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다른 쥐들은 모두 덜덜 떨고 있는데 그 어리바리한 쥐가 술김에 고양이에게 고함쳤습니다.

“야, 고양이, 너 잘 만났다. 너 오늘 죽었어!”

그러자 고양이가 너무도 어이없어 “헐! 너, 술 깨면 다시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어리바리한 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야, 웃기지마라! 그럼 난 매일 술 마실 거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여 만용을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술이 깨면 후회 막심하여 쥐구멍을 찾습니다. 우리는 술 힘을 빌리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에 만취하여 그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일찍이 하나님께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II. 성취
  
성경은 약속과 성취의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과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성취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베드로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아침부터 술에 취하여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요엘을 통하여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그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은 구약성경 요엘서의 저자입니다. 요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재앙과 회복에 대한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메뚜기의 재앙으로 먹을 것이 없고 하나님께 제사드릴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라는 것입니다(욜 2:13). 더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엘서의 독특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을 사람들에게 임하여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전혀 새로운 경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800년 후,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어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요엘의 예언이 오순절에 성취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오순절 성령의 충만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소원합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기를 사모합니다.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17절 말씀과 18절 말씀입니다.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우리는 여기에서 ‘부어 주다’는 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부어 주다[ejkcevw/엑케오]’는 ‘물 같은 것을 쏟아 부어 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게걸스럽게 뛰어나오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은유적으로 ‘크게 주거나 분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크게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옛말이 되었습니다만 우리말에 ‘물 쓰듯 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 가장 흔한 것이 물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맑고 깨끗한 물이 흘렀습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 값을 받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물을 물 쓰듯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환경을 생각하여 물을 절약하고 깨끗하게 사용하는 것이 창조질서 보전을 위하여 옳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에 대하여는 물 붓듯 부어주심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딛 3:6). 하나님은 성령을 조금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을 부어 주시듯이 풍성히 부어 주십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의 글에는 성령 충만이 자주 강조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나님!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나는 너무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조금 구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기를 구하여 그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만취된 것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도취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III. 도취
  
도취(陶醉)라는 말은 ‘어떠한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됨’을 가리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이 쏠려 매혹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17절 말씀입니다.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그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까? 성령 충만한 자녀들이 예언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젊은이들은 환상을 봅니다. 성령 충만한 어른들은 꿈을 꿉니다. 어린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어른들이 꿈을 꿉니다. 어린이와 청년 그리고 어른, 즉 모든 사람들이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언과 환상과 꿈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앞으로 되어 질 일 즉 미래를 가리킵니다. 요엘의 시대는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미래를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미래에 살아야 합니다.

도무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면 내일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절망하여 주저앉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면 희망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인생 다 끝났다며 한숨만 쉬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면 아직도 하여야 할 소명을 갖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내일이자, 희망이자, 소명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지 여러 가지 신비한 은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는 이 땅에서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내일을 향하여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꿈이 없다고 합니다. 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유명하게 되겠다는데 유명하게 되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데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절망의 시대에, 내일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매혹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꽂혀야 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우리가 요엘서에서 성령 강림과 함께 보게 되는 커다란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요엘에게서 이 날은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영광의 날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되는 것은 정녕 심판의 날입니다. 하지만 이 날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입니다.


2. 우리는 종말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려는 시간에 한 예언자가 거리에서 죽음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삶을 새롭게 정리하시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오. 그 순간은 여러분이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들이닥칠 것이오. 하나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영접할 채비를 갖추시오.”

예언자는 이 말을 마치고 길을 건너가려는 바로 그때 거친 말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들어 예언자를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예언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이 돌발적인 죽음은 그가 최후로 남긴 가장 훌륭한 설교가 되었습니다.

종말에 산다는 것은 세상의 끝이 오고 있으니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던 일을 다 그만 두고 예배당으로 모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끝장났으니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에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산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한 번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살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또한 천년을 살아도 하루를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마지막 날로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또 우리가 도취되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종말이 와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림을 넘어서 크고 영화로운 구원에 참여하는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이름에 살아야 합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의 능력은 그 이름에 있습니다. 그 이름은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이 승리하는 열쇠입니다. 그 이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영’,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람들에게 오셔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에서 드러내며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이름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을 영원한 미래에 살게 하십다. 그 이름이 놀라운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무엇엔가 취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고 마약에 취하여 사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구장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돌아온 조용필의 공연장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미쳐야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미쳐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과 자신 사이에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리가 말씀이요, 기도요,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에서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닙니다. 필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들에 취하지 마십시오. 성령에 취하여 그 능력과 지혜로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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