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왕하 3:13-20)

첨부 1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왕하 3:13-20)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압이라는 나라는 다윗 왕 이래로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아람과 벌인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전사하자, 이스라엘에 대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합의 뒤를 이은 아하시야 왕은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모압의 반역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나름대로 조처를 취하려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미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과 연합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호람 그리고 당시 남왕국 유다의 속국이었던 에돔의 군대까지 연합하여 모압 정벌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연합군이 정벌에 나서서 모압을 행해 진군해 가는 도중 뜻밖의 어려움을 만나게 됐습니다. 바로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해서 큰 낭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여호사밧에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선지자를 찾아 도움을 청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를 부탁하자는 것입니다. 
마침 근처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과 에돔 왕이 함께 엘리사를 찾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즉 엘리사와 세 왕과의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책망

이 만남은 책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 

이런 말입니다. “당신은 왜 나를 찾아왔습니까? 당신이 찾아야 할 사람들은 당신의 부친인 아합 왕과 당신의 어머니인 이세벨이 묻고 도움을 청하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아닙니까?”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왔으며 기도부탁을 하러 왔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람이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책망을 듣게 됐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의 왕하 3:2-3을 보면, 여호람이 12년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려왔는지를 간략하게 평가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여호람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호람이 자기 아버지 아합이나 어머니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 주상을 제거했지만, 여로보암 시절부터 자행되어오던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람은 비교적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왕입니다. 그래서 바알 주상을 척결하고자 힘썼습니다. 이것은 특히 오므리 왕조의 왕들 가운데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의 의지가 선한 열매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호람의 개혁은 반쪽짜리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람이 나름대로 하나님께로 나오고자 했지만 부족했던 것입니다. 
지금 엘리사는 이점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온전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주목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4절에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엘리사가 여호람에게 여호사밧 왕과 함께 왔기 때문에 여호사밧 왕을 봐서 여호람을 만나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호사밧은 어떤 사람이기에 엘리사가 이토록 칭찬한 것일까요. 대하 17:3-9을 보면, 여호사밧은 남왕국 유다에 남아있던 산당과 우상을 제거했고 선지자들과 레위인들을 세워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 점이 여호사밧 왕이 여호람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물론 여호사밧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잘못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우상숭배하던 아합 왕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 앞에 악을 저지른 아하시야 왕과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모압 원정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여호사밧을 귀하게 맞이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평가는 하나님의 기준에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여호람은 나름대로 개혁하려고 애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잘못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그 평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호람과 여호사밧이 함께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랐을 때 결과가 달랐습니다. 여호람은 나름대로 애썼지만 함량미달입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흠과 잘못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함량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요즘 말하는 체중계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체중계에 올라서면 체중을 재서 그 결과를 말로 이야기해 준다는 것입니다. “60키로그램입니다, 70키로그램입니다.” 한 번은 100키로그램 나가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저울 위에 올라섰답니다. 그 때 저울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저울은 1인용입니다. 한 사람은 내려주세요...”
사람들이 체중계 앞에 서면 무척이나 예민합니다. 저는 매일 한 번씩은 체중계 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오늘 체중이 어떤지를 체크해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상 체중보다 조금이라도 오바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만일 1-2키로나 오버하면 비상입니다. 그 다음 끼니는 ‘굼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 체중계로 측정하십니다. 그래서 함량미달이면 책망하십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호람처럼 함량이 미달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의 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책망을 심각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빨리 고쳐야 합니다.

말씀

본문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를 찾아온 세 왕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6절에서 18절까지를 보면 그 말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지금 모압을 향해 진군한 북왕국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 그리고 에돔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는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개천은 물을 모아놓을 웅덩이를 말합니다. 가물어 물이 바짝 마른 골짜기 아래 건천 바닥에 웅덩이를 여럿 파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오지 않지만, 그 웅덩이에 물이 흘러들어 고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개천에 물이 흐르고 웅덩이에 물이 고이려면 비가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비가 오려면 비의 전조로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람도 불지 않고 더더욱 비도 오지 않지만 개천에 물이 흐르고 웅덩이에 물이 고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골짜기 바닥에 웅덩이를 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많이 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 믿을 수 없는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하나님께서 바람도 없이 비도 없이 골짜기에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실 수 있는데, 이 일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정말 누워서 떡먹기와 같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수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몇 차례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대학졸업 후 진로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마음을 주셨습니다. 신학교에 가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불가능했습니다. 아직 집안이 예수 믿지 않던 때입니다. 가정의 반대를 뿌리칠 자신이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학교 다닐 학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결혼 문제며, 신학교 입학시험 문제며... 뭐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군대부터 기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씩 길이 열렸습니다. 염려하던 것들 다 해결됐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고 목회의 길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명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바람 불게 하시고 비가 오게 하신 뒤에 물이 흐르게 하셔도 될텐데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우연히 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점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넘치는 은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지금 이 문제 뿐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서도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넘치는 은혜입니다. 
18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한 마디로 연합군이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저들이 기도부탁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저들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기도 부탁한 것은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실 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얻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지금 저들이 행하고 있는 일 위을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구하는 것 이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도 허락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기도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의 본질은 응답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응답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기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에 몰입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는 제목이 자기의 소원대로 응답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물론 기도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소원이 이루어지더라도 자기가 바라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끝까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원과 다르게 응답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구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 20:22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등극하실 때 자기 아들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고난의 잔이 다가오고 있는 때입니다. 이 때 정말 구해야 할 것은 그 고난의 잔을 잘 마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때 고난의 잔은 고사하고 영광의 자리를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이렇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고 우리가 구해서는 안 될 것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럴 때 주님은 그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응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의 본질은 관계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를 맺는 일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면 당장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니면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물론 필요치 않은 것이면 거절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면 채워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넘치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때로는 다급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우리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불가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도 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