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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전 1:1-9)

첨부 1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전 1:1-9)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오늘부터 주일 낮 예배 시간에 고린도 전. 후서를 강해설교하려고 합니다. 고린도 전. 후서는 제가 우리 교회 부임 초기의 수요 밤 예배 시에 전했던 말씀으로,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처음 하는 강해 설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린도 전. 후서를 강해 설교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강해 설교 때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내려주실 믿습니다.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스에 있었던 도시로서, 헬라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수많은 여행자와, 상인들의 필수적 통행로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에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 태양의 신 ‘아폴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을 숭배하는, 12개의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대 상업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이, 고린도 역시 다양한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어떤 부도덕한 풍습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문제는 그 사회의 도덕적 척도라 할 수 있는데, 고린도는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한 예로 고린도의 가장 높은 곳인 아크로 고린도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매춘을 자행하는 종교적 창녀들이었습니다. 고린도가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하였는지, 고린도인 하면 마치 방탕한 사람의 대명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시, 이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머무르며, 복음 전파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바울은 주후 53년경 고린도를 떠나,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 전도중인 주후 57년경에 고린도서를 기록한 것을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하게 된 몇 가지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데, 

첫째, 글로에라는 고린도 교회의 여성도로부터, 교회의 분쟁과 당파에 관한 소 식을 듣고서였습니다. 둘째, 고린도 교회로부터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들, 이를테면 1)당파문제 외에도 2)교회 안의 불륜 사건 3)소송 사건 4)혼인 문제 5)우상의 제물 문제 6)부인의 수건 문제 7)성찬에 관한 문제 8)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 9)부활 문제 10)헌금 문제 등에 관한 질문을 받고, 거기에 답변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를 읽노라면,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이라는 문구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와 같은 동기에서 쓰인 고린도서는,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비교할 때,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고린도 전. 후서는 역사적 서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전, 후서는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지도한 실제적 서신입니다. 2)영원한 진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지도 원리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만 그친 교훈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3)고린도 전. 후서는 초대 교회의 내정을 가르쳐주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사도행전이 교회의 외적 발전상을 보여준다고 하면, 고린도 전후서는 교회의 내적 실정을 잘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4)고린도서는 사도 바울의 문체 중 표준적이라고도 불립니다. 특별히 13장의 사랑의 송가나, 15장의 부활론은 너무도 유명해서, ‘세계문학의 탁월한 걸작’이란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먼저 1-3절은 문안 인사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란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라는 의미입니다. 고전 9:1.2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문제시한 사람들이 있었고, 고후 10:10절을 보면, 바울의 인격과 사역을 비방한 자들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자격이나 노력, 혹은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된 것이 아니요,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주님의 부르심이란 것은, 사도 바울의 일생을 통해서 변함없는 확신이요, 이 확신이야말로 그의 모든 사역의 기초였습니다.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한 곳은 갈 1:1인데,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초두에, 이렇게 자신의 사도 권을 강조한 것은,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사도 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가장 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인 자격과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에 대한 사도권의 부정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부정이 되고, 바울이 기록한 성경에 대한 부정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사도 권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απο?τολο?)란 무슨 뜻입니까?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 ‘대리자’ ‘전권 대사’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한 확신, 거룩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직자들, 교회의 모든 직분 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강하고 뚜렷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교회의 직분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명감과 확신이 없이는, 그 직분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수신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란 말은 

1. 교회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장막 까지 짜는 노동을 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세운 교회이지만, 결코 자신의 교회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한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주인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고, 많은 물질을 드려 교회를 세울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는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세운 교회인데...”라고 하면서 주도권을 내세우고, 그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한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며 또 다른 주도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도권 싸움으로 급기야 교회는 분쟁에 휩싸이고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그 소유권을 주장하실 분은, 상천하지에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또한 교회를 세우신 분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목회자를 불러 은사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교회 재정을 위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교회에 대한 소유권과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봉사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온갖 수고를 통해 세운 고린도 교회를, 겸손하게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 땅의 모든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 고린도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암시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에서, 고린도 교회가 지향해야할 바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교부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이 말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정신에 대한 즉각적인 항의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한 당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3. 문제 많은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허물이 큰 교회, 문제 많은 교회, 골치 아픈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교회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어느 교회든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허물이 있고, 문제가 있고, 치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상 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보고서 교회를 경시하고, 또한 교회를 악평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완전한 순결이 결여된 곳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위험한 시험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만이 성자인척 하기가 쉽고, 그래서 고린도 교회내의 어떤 신자들, 이를테면 자기들은 그리스도파라고 했던 사람들처럼, 또 다른 당파를 만들 소지가 다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같은 허물 많은 교회를 향해서도, ‘고린도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교회’(εκκλησια)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단체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건물은 ‘교회당’ 혹은 ‘예배당’이라고 불러야 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란 명칭은 또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을, 대단히 잘못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신약에서 ‘성전’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므로, 예배당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 함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신약 시대의 예배당 건물은, 구약 시대의 성전과 같은 의미는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이 곧 성전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구약시대와 같은 성전의 개념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카도쉬’(????)라고 하는데, 이 ‘카도쉬’라는 단어는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1)초인간적이고 비물질적이어서, 모든 피조물위에 높이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2)그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 거룩하고 3)하나님과 관계된 사물 곧 ‘예루살렘’이나 ‘가나안’ ‘성막과 성전’ ‘안식일’ 등을 가리켜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카도쉬’란 단어의 용법으로 보아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해도 잘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은, 분명히 무슨 영화관이나 카페나 카바레 같은 건물과는 구별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단체인 교회의 각개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성도는 

1)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사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자요, 성령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이다. 성도란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란 거룩한 무리 곧 하나님께 바쳐진 자,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일반 사회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된 자를 말합니다. 

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다. 2절 하반절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함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드림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곧 그가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삼위 하나님께 예배하고, 혹은 그 이름을 불러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져서 성도가 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고 기도하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모든 구원의 축복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은혜’란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받는 총애를 뜻합니다. 곧 죄짓고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뜻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은혜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평강’은 은혜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몇 차례 작명 경험이 있습니다. 00교회 집사님 가정에서 손자의 이름을 부탁했습니다. 그 집의 큰손녀 이름은 ‘은혜’이고, 큰손자의 이름은 ‘충만’이였는데, 모두 다른 목사님이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손자의 이름을 제게 부탁해서 ‘평강’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곧 평강하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은혜 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평안은 1)하나님과의 화평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가 있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상호 사랑이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2)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면, 자연히 우리 안에 화평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한없는 평안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실 때, 우리를 괴롭히던 일체의 죄책감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리하여 심령의 평안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확신과 평안은 우리가 죽음에 임할 때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 심령에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고, 죽음 앞에서의 평안과 확신을 줄 수가 없습니다. 사 57:21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평안, 진정한 평화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님께로 부터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4-9절은 감사입니다.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교회나 어느 개인을 대하든, 먼저 감사의 조건을 발견했고, 동시에 기도의 조건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일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일로 인하여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성도의 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감사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함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4절에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언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고, ‘지식’이란 복음진리를 이해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이 같은 언변과 지식이 풍족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전도가 뿌리깊이 박혀서,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진리를 확신함을 의미합니다. 

2)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음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언변과 지식에만 풍족한 것이 아니고, 그 외의 모든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고전 12장에 나오는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등과 같은, 성령의 은사들을 충만히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풍성한 은사를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3)재림 신앙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대망은,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벵겔은 말하기를,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판단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느냐, 혹은 주님의 재림을 두려워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며 사는 성도를 세상 끝날 까지 굳게 지켜주시고, 또 책망할 것이 없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 1: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확신과 소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확신과 소망의 근거는,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고,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롬 9: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중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구절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큽니다. 고린도 교회 같은 죄악이 관영한 도시에 있었던 교회,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투성이였던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를 존중이 여기는 자가 진정한 성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존중히 여기는 자가 또한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헐뜯고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성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않으면,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찬송가 작시자 드와이트는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라고 찬송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십시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완전한 교회가 있으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교회의 회원이 되겠습니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자매님, 이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계속해서 엄숙한 어조로 “자매님 혹시 완전한 교회를 만나거든, 자매님은 그 교회의 회원이 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자매님 때문에 그 교회의 완전함이 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을 잘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교회의 불완전성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신앙생활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지상의 교회를 세우시고, 지상의 교회로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교회가 좀 더 완전해지기를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이 된 나 자신이, 먼저 어떤 모습을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깨닫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언변과,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 지식이 풍족하고, 그 외의 모든 성령의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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