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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을 우러러 보라 (창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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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보라 (창 15:1-6) 

옛날 장자라는 사람이 관상을 보러 갔는데 땅만 보며 갔더니 “당신은 거지상이다”라고 했답니다. 땅에 뭐 떨어진 것 없나 하고 땅만 보고 다닌다고 거지상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뒤에는 하늘만 보며 갔더니 “당신의 관상은 너무 높아서 내가 볼 수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땅만 보며 살아서는 안 되고 하늘을 우러러 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신약성경의 제일 중요한 원리인 ‘이신득의’의 근거 구절로 사용했습니다. 죄인 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믿음뿐이라는 원리의 근거 구절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6절 말씀보다 5절 말씀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를 얻는 것은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성화의 중요한 원리가 창세기 15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라.” 

성화를 이루려면 하늘을 우러러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늘이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을 일층천이라고 합니다. 

둘째,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는 외기권을 이층천이라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천국도 역시 하늘입니다. 이것을 삼층천 혹은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볼 때 육신의 눈으로 대기권을 보고 외기권도 보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Ⅰ. 아브람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 

하나님이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그 이유는 아브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절은 “이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14장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다 일어난 후를 말합니다. 아브람은 애굽에 갔다가 바로 왕으로부터 큰 재물을 얻어 부자가 되었고 그돌라오멜을 포함한 네 왕과의 전쟁에서 대승리도 거뒀습니다. 318명을 이끌고 가서 네 명의 왕을 모두 죽이고 그 군대를 파하고 왔으니까 어마어마한 승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은 하늘의 복도 받고 땅의 복도 받았지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큰 용사였지만 문둥병이 있었습니다. 권력과 재물을 모두 가졌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둥병 때문에 조금 있으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동안 일을 해서 재물도 얻고 아내를 넷이나 얻어 아들 열한 명과 딸 한 명을 얻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대가족을 이뤘지만 야곱도 한 가지 문제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형 에서와 화해하기 전까지는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보게 되면 아각 사람인 하만이 나옵니다. 그는 자녀도 많고 돈도 많고 권력도 얻어 페르시아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에 5:13).

그래서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서 자기 집에 50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세웠는데 결국 자신이 거기에 달려 죽게 됩니다. 

아브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재물도 있고 여러 가지 복도 받았지만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2).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6). 

하지만 아브람의 나이가 85세가 되고 아내인 사래도 75세가 되어 생리적으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티끌처럼 자손이 많은 것은 그만두고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내인 사래가 잉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식을 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이것이 아브람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Ⅱ.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적인 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브람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을 바라보고 땅의 방법을 먼저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에게 가능한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이나 거래가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하나님의 생각은 높은 생각이고 하나님의 길은 최고의 길입니다. 아브람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약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사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2). 

아브람은 사래가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자 양자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어달라며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추천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상속자로 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후에도 소돔으로 돌아갔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창 19:1).

롯은 소돔이 너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롯이 아닌 종 가운데 가장 신실하고 믿을만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하나님께 추천한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엘리에셀은 아브람의 아들인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밧단 아람으로 심부름을 갔다 올 정도로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당시 풍습을 보면 아들이 없는 사람은 친척이나 종을 양자로 삼아 상속자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 다메섹 출신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아서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소서.” 이렇게 제안을 하지만 하나님은 단칼에 거절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4).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래도 인간적인 시도를 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하갈은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얻은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래가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어 후손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분명히 창세기 15장에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들었으면서 아브람은 거절하지 않고 사래의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0). 

하나님의 계획은 사래가 자녀를 낳지 못할 상황이 되었어도 사래를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시고 그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브람과 사래의 육신적인 시도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대대로 이삭의 자손들과 원수가 되어 그들을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Ⅲ. 문제를 해결하는 성서적인 방법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브람이 자기 능력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문제가 인간적인 땅의 방법이 아니라 기도를 통한 응답의 방법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한밤중에 기도했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낮에 가끔 달이 보일 때가 있지만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이 다 보이는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아브람은 논쟁도 하고 간구도 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에게 논리적으로 따집니다. 아브람은 대단히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면 응답이 말도 안 되게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람의 기도를 본받아 논리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의 기도는 주께서 내게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내가 내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씨를 주셨으면 내가 왜 내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씨를 주시지도 않으시고 가능성도 없애버리시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논리적인 논쟁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논리성을 띄게 되면 그 기도는 응답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의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첫 번째 응답은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약 80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한 번만 말씀하셔도 위대한데 80번이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5장 1절에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두려움이라도 있으시다면 하나님과 독대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을 제거해주십니다. 두려움 때문에 왜 떨고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 마음속에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두려움을 제거해주신 하나님이 내 마음의 두려움도 제거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특별히 두려움이 많습니다. 병들어 죽을까 두려워하고 사고 나서 죽을까 두려워하고 나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그 응답이 오늘 우리의 응답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응답은 나는 너의 방패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개인적인 보호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금방패도 있고 은방패도 있지만 그런 방패들보다 하나님은 더욱 강한 방패이십니다. 성도들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원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는 바로 마귀와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원수와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2). 

세 번째 응답은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상인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서로를 상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보다 남편 자체를 상급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남편이 돈 벌어 올 때는 좋아하다가 은퇴하고 나면 이사할 때 남편은 버리고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선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서로가 주는 유익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부부관계입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주는 용돈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 자체가 부모에게 큰 상급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복보다 하나님을 우리의 큰 상급으로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아주 어렵다고 생각한 단어가 바로 ‘기업’입니다. 이것은 ‘삼성기업’, ‘현대기업’할 때 그 기업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inheritance’로 유업이라고도 번역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에게는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복이나 영생의 선물을 기업이라고도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의 기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가 492장에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는 찬송을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네 번째 응답은 창세기 15장 4~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4~5).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의 뭇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뭇별들이 아브람에게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아브람에게 믿음이 생겨나 인간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2). 

아브람 한 사람으로부터 이삭과 야곱이 나오고 이렇게 수많은 자손들이 나왔습니다. ‘자손’이라는 단어는 복수와 단수의 두 의미가 있는데 복수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루게 되었고 단수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상권을 유대인들이 다 쥐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여러 인종이 살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경제력을 다 쥐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장사를 해도 절대로 자기네들끼리 경쟁해서 물건값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이 싸게 팔아도 유대인이 파는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이처럼 서로 격려하고 잘되도록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아브람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민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결론 

아브람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기가 노력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 거절당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건강 문제, 돈 문제, 자녀 문제 등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별들이 보이는 시간 즉,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하나님과 일대일로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탄원도 해보고 근심도 털어놓아 보라는 것입니다. 땅을 보지 마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물을 바라봤을 때 빠졌던 것처럼 땅을 바라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만 바라볼지라’라는 복음성가의 주인공은 유다 왕 여호사밧입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마온 사람과 함께 침공했을 때 여호사밧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대하 20:12).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싸울 것 없고 찬양대를 먼저 앞으로 보내라고 하셨고 찬양대가 앞으로 나가서 찬송하자 적군들이 서로 싸우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를 브라가 골짜기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땅을 보면 문제가 보이고 두려움만 생기지만 하늘을 우러러 보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웃고 계시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최고의 도움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우러러 보라는 이 말씀이 우리 성도의 삶에 모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표어가 있으십니까? 없으신 분들은 오늘부터 ‘하늘을 우러러 보자’를 표어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1).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이 하늘을 날마다 우러러 보는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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