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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 (마 13:1-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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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 (마 13:1-9, 18-23)

1. 마태복음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되는 일곱 가지 비유들을 일컬어 ‘천국 비유’라고 합니다. 첫 번째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제외한 모든 비유들이 “하늘 나라는 …과 같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비유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경우도, 비록 다른 여섯 개의 비유처럼 “하늘 나라는 …과 같다”는 식으로 시작되지는 않지만, 씨 뿌리는 사람이 밭에 뿌리는 씨가 바로 “하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19절)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결국 그 비유의 목적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모든 천국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까닭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 나라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결국 구원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굳센 믿음과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즉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곁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낙원’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돌아가신 ‘하늘’(눅 24:51; 행 1:9-11)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 쳐다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행 7:55)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서 본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정확히 알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 나라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는 하나님에 관해서 온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아직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신비한 세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시도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설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정확하기 알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은 것을 사람이 아는 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마치 종말의 때를 아무도 알 수 없듯이,(마 24:36)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나라가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 나라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어디서 영원히 살고 계시겠습니까?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요 14:3) 

부활하신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 그리고 그분과 함께 우리가 돌아갈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까?


3. 교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으로, 인간의 생이 지구상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끝난다면, 죽음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생의 끝에 불과하다면,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면,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그 허무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려도 괜찮습니까? 우리의 생이 정말 그렇게 끝나기를 바라십니까? 

다른 한편,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집니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세상에서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커집니다. 

그런데 욕심은 그 사람만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똑같은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결국 사람들의 욕심과 욕심이 충돌합니다. 인생의 비극과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갈등과 대립, 미움과 반목, 싸움과 전쟁 같은 인생의 어둔 그늘은 하나님 나라를 믿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굳센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두려움에 지배당하지는 않게 됩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세상살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습니다. 자유로운 만큼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욕심에 지배당하지 않으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약 1:15)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의 비극과 불행을 극복하게 되니 그만큼 평화롭고 행복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사람과 그 나라를 생각지도 않고 사는 사람의 인생이 그처럼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만이 현재를 평화롭고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년에 힘겹고 비참해지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노후 대책을 세웁니다. 

형편상 대책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후 대책은 염려하면서 어찌하여 사후 대책은 세우지 않는 것입니까? 노후 대책은 세우면서 사후 대책은 세우지 않는 사람은 내일은 준비하면서 모레는 대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실로 우리가 훗날 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까?


4. 예수께서 가르쳐주시는 두 번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훗날 가는 곳이라면, 두 번째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나라,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던지신 첫 번째 메세지가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말씀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그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요, 또한 우리가 현실 속에서도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나라이 임하옵시며”(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훗날 참여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기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오는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 17장을 펼쳐 읽어야 하겠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눅 17:20-21)

눈으로도 볼 수 없고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 – 그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에서 ‘가운데’로 번역된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 ‘entos’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에’(within)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내면(마음)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둘째는 ‘사이에’ 혹은 ‘가운데’(among)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 사이에, 즉 인간 관계(혹은 공동체) 속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한 인간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든지, 공동체 속에 임하는 것이든지,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적(지역적)인 개념 혹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곧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를 뜻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즉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면,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임한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등)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가 거기에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 속에 혹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수적인 세 가지 조건이 회복됩니다. 첫째는 의로운 삶입니다. 둘째는 평화로운 삶입니다. 셋째는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롬 14:17)이기 때문입니다. 

의와 평화와 기쁨이 회복되어야 개인도 공동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따져 보십시오. 불의를 일삼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늘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의 불의가 들키거나 고발되거나 처벌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기쁨을 잃어버린 개인의 마음이나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누구 앞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떳떳하고, 어느 곳에서든지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5.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 7:21)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미래에 참여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사람, 즉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께서는 두 종류의 하나님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머물러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요, 그렇게 해야만 훗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미래에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 –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품고 살아가십니까?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고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 속에 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훗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를 맞아들이고, 내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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