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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늘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는 세 가지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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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는 세 가지 (행 5:1-11)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의 뜻은 ‘가장 큰 자’이고 바울의 뜻은 ‘가장 작은 자’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가장 큰 자가 가장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스스로 가장 큰 자라고 여길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장 큰 자로 여겨주었습니다. 

사울은 나사렛 청년 예수를 거절했고 예수 믿는 이들을 가혹하게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늘로부터 강력한 빛을 받고 땅에 엎드려졌고, 눈이 멀었습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는 중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17-18절= “···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사울은 사흘 동안의 흑암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기 ‘비늘’이라고 번역된 ‘레피데스’는 ‘레피스’의 복수형으로 의학 문헌에서는 살갗에 생기는 비늘과 같은 껍질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뜻으로 보아 사울의 눈에서 아마도 물고기 비늘과 같은 일종의 막(scales)이 떨어져 그의 시력이 회복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것은 영적 각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흘 동안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다시 회복한 것입니다.  

의사이기도 한 본서 저자인 누가는 그의 기술 습관대로 사울의 눈에서 일어난 변화를 의학적인 시각으로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해답을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집사 스데반을 죽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스데반을 고소하는 자들이 거짓 증인들까지 동원하여 했던 말 속에 핵심적인 세 단어가 있습니다. 

행 6:13-14=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위에서 세 단어 ‘이 거룩한 곳(성전)’,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율법)’ 그리고 ‘나사렛 예수’ 이 세 가지는 유대인의 입장과 그리스천의 입장이 너무나 달라 그 때문에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유대인들이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에 사흘 동안 어둠 속에서 헤매이던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우리의 주목을 집중케 합니다. 

18절= “···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성전과 율법, 그리고 나사렛 예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또한 영적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전과 율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성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사울은 유대교에 충성한 바리새인으로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는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솔로몬 성전이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특히 지성소를 가득 채우기도 했습니다. 

왕상 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성전을 우상처럼 받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단지 건물일 뿐인데 그들은 때로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 건물을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사울에게 성전 건물은 최고의 가치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비늘이 벗겨진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새언약의 세계에 대하여 명확한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더 이상 물리적인 성전 안에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이제는 성령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 이라고 불리는 교회입니다.

신약이 말하는 유일한 성전 건물은 사람들로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후일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바울의 눈은 구약의 성전 건물 대신에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바라봅니다. 

바울은 신약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또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면서,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교에서 그토록 성전을 우상시하던 것은 사실은 구약의 뜻도 아니며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뜻도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말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선지자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들이 솔로몬 성전이 있어 자신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화를 입지 않으리라고 거짓 위안을 일삼는 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우리도 바울처럼 눈의 비늘을 벗고 구약의 성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다녀오시다가 수가성 여인을 만나 대화하시는 장면에서도 이미 새언약 안에 있는 성전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인이 물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9-20).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1-22). 

그리고 계속하여 가르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성도 여러분!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거룩은 땅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도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구약시대는 성전의 지성소만 지성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진 후로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곧 성소이며, 십자가 보혈로 적셔지는 곳이 곧 지성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장소 성전’이 ‘마음 성전’으로 바뀌어 다시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더욱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되기 바랍니다. 
 

2. 모세의 율법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그의 눈에는 모세의 규례 즉 율법이 다시 보였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오직 율법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나사렛 청년 예수가 유대교에 반기를 들고 율법을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내세웠던 주장들을 들어보면 바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 6:14).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이 모세의 규례를 고치려고 한다고 생각하니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으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나니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 받고 달라져도 바울만큼 달라진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가 쓴 로마서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그의 변화된 사상과 믿음의 체계를 잘 보여줍니다. 마틴 루터는 바울의 로마서로 종교 개혁을 이루었고, 어떤 신학자는 ‘로마서가 나를 흥분시킨다’는 책을 썼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득의의 진리는 비늘이 벗어진 바울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진리로 부각되었습니다. 

롬 10:10,13=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율법과 복음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sola fide)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마틴 루터와 존 칼빈, 쯔윙글리와 얀 후스 같은 이들은 중세의 흑암 속에서 비늘을 벗고 믿음의 법을 바로 보았던 선구자들입니다.  

그들의 사역 덕분에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진리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이리도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떠 복음의 은혜를 더욱 분명히 보게 되기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나사렛 청년 예수라는 인물을 보는 눈 또한 달라졌습니다. 

과거의 그는 지독하게 꼬였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 증인으로 그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본 예수는 유대교의 배신자요 성전 파괴자였습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서, 자기 민족을 망하게 하는 이단의 주창자 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 의분을 가지고 그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에 앞장서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멀리 북쪽의 다메섹까지 자원해서 출장을 갔을 정도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했던 바울 자신의 간증이 생생합니다.

9절=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절=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절=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절=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그러했던 사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18절).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간 사울은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울은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에 그가 핍박하던 예수와 함께 그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세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며 그의 부활과 연합된 의식입니다. 따라서 세례 받은 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과거의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며, 그가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에게 이제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을 얼굴에서 수건이 벗겨진 것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 3:13-17=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비늘을 벗고 보니 나사렛 예수 그분은 바로 구약에서 그토록 여러 번 약속했던 인류의 구세주였습니다. 바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을 벗고 구약을 보니 그의 눈에 구절구절이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교수 페리칸 박사는 그의 책 <예수의 역사 2천년>에서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역사적인 해석, 영적인 해석, 문화사적 해석 등입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예수님 이후 2천 년 역사는 결국 <오직 예수>를 통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축복이냐 저주냐, 구원이냐 멸망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로 갈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의 운명은 결국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얻는 교훈은 아나니아의 안수에 의해서만 사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막이 벗겨질 수 있었던 것처럼,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세상 사람들의 영안을 가리고 있는 죄악의 비늘이 벗겨져 진리를 밝히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영의 눈을 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영적 소경이라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의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안을 덮고 있는 죄악의 비늘을 벗어버리고 영의 눈을 밝히 떠서 진리를 보고 그 진리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은혜로 인하여 영의 눈을 떠서 진리를 밝히 보고 그 진리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내린 경험이 있습니까?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의 권세와 보혈의 능력이 새롭게 다가온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고 구약의 율법 속에 가득히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시편과 선지서에 가득한 주님의 소망의 메시지에 새로운 힘을 받고 사역에 헌신하는 젊은이는 없습니까? 

그리고 신약 성경의 복음서, 서신서, 계시록에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모습을 발견하고 환희의 찬송을 불러본 경험이 언제입니까? 우리 모두 ‘오직 예수’ ‘오직 말씀’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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