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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을 조심하라! (마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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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조심하라! (마 5:21-26)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큰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한 이야기 “스피치는 짧을수록 좋고 여자의 스커트도 짧을수록 좋다!”가 누군가 듣고 성적 수치심을 느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사실 요즘 심각하게 제기되는 성추행, 성희롱이라는 것이 참 애매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문제도 있지만, 듣는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면 희롱이 되니, 말을 참 조심해야겠습니다.
심지어는 자조 섞인 농담도 등장합니다. 잘 생긴 남자가 하면 유머고, 못생긴 남자가 하면 성희롱이 된다고 하기도 하죠.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이과수 폭포와 와이키키 해변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해변이 영상에 나오자 저를 쳐다보는 교인들이 아무도 없이 배경에 나온 해변만 봤다고 하더군요.

유재석의 소통의 법칙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마라.
뒷말은 가장 나쁘다.

2.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들을수록 내 편이 많아진다.

3.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된다.
흥분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가 힘이 있다.

4.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해라.
듣기 좋은 소리보다 마음에 남는 말을 해라.

5.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을 해라.
하기 쉬운 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라.

6. 칭찬에 ‘발’이 달렸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있다.
나의 말은 반드시 전달된다. 허물은 덮어주고 칭찬은 자주 해라.

7. ‘뻔’한 이야기보단 ‘펀(fun)’한 이야기를 해라.
디즈니만큼 재미나게 해라.

8. 말을 ‘혀’로만 하지 말고 ‘눈’과 ‘표정’으로 말해라.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더 힘 있다.

9. 입술의 ‘30초’가 마음의 ‘30년’이 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10. ‘혀’를 다스리는 건 나이지만, 내뱉어진 ‘말’은 나를 다스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한번 말한 것은 책임져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산상수훈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이 이전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22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율법이, 바리새인들이, 율법학자들이 너희에게 말한 것과는 다르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분명히 다른 기준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화법은 듣는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모세는 단순한 선지자의 차원이 아니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과는 달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놀랐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겁먹게 하고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주신 계명이 어느 순간부터 억누르는 짐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8-39절 말씀을 보세요.
“38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이 말씀은 서기관들의 행태를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법은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생각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에게 조금 혼돈이 올 것 같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이 오히려 우리에게 죄를 더하게 하는 것이라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까지도 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를 더 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생각마저 죄로 다루고 계시는지를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왜 ‘위선자’들이 되었나요?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든 자신들의 행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완전한지 모르지만, 우리의 생각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거룩’이고,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신 이유라면, 참다운 율법의 의미와 완성은 단순히 행위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율법의 차이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결국,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생각 마음이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숨겨도 마음의 생각이 결국은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고,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될 때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은 것은 ‘행동’에 초점을 두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에 초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없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한 것이고, 믿음은 선한 열매가 있고,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 하면서 악한 행동이 나오고,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마음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죠. 믿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일 수 있는지를 질책하시는 것이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3초간 (The Law of Garbage Truck)]의 저자 데이비드 폴레이가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상대편의 큰 잘못으로 사고가 날 뻔한 상황에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운전기사를 보며 ‘쓰레기차의 법칙’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쓰레기차와 같다. 마음속에 온갖 좌절과 분노, 실망을 꽉꽉 채운 채 돌아다닌다. 쓰레기가 계속 쌓이면 그들은 쓰레기를 쏟아낼 곳을 찾는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생기면 그들은 갖고 다니던 쓰레기를 우리에게 쏟아낸다. 누군가가 쓰레기를 쏟아낼지라도 기분 나빠하지 마라. 그 쓰레기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그 사람이 잘되길 빌어줘라. 그런 다음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된다. 내 말을 믿어라. 그러면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쓰레기차가 자기에게 쓰레기를 쏟아내게 놔두지 않는다. 누군가가 쓰레기를 쏟아내면 속상해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불쾌해하지 마라. 속상해하고 화내고 불쾌해하면, 당신도 결국 누군가에게 감정의 쓰레기를 쏟아내고 말 것이다.

쓰레기통 뚜껑을 잘 단속하라. 때로는 강철로 된 튼튼한 뚜껑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온갖 비난과 나쁜 소식, 분노로 가득 찬 쓰레기를 쏟아내는 날에는 더욱더 뚜껑을 단단히 닫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쓰레기를 쏟아내는 걸 막을 방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쓰레기통 뚜껑을 단단히 닫고 사람들에게 쓰레기를 재활용하라고 권면할 수는 있다!

행동으로 무엇이 나오기 전에 당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형제에게 노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노하는 것이 이미 살인한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죠.
‘라가’라는 말은 ‘바보’라는 뜻인데, 우리가 얼마나 쉽게 내뱉었던 말인가요? 그런데 이미 공회에 잡혀가게 되었다는 것은 살인죄가 성립되었다는 것이죠. ‘미련한 놈’이라는 말 역시 얼마나 쉽게 비교하며 던진 말입니까? 그런데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동안 종교인들이 이렇게 속으로 무서운 죄를 지으면서 겉으로는 얼마든지 선행을 하고 종교적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포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한 번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비방하는데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플라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왜 변명을 안 하십니까?”
그때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난을 종결시키는 것은 나의 변명이 아니다. 그들의 비난을 침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올바른 행위뿐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 어떤 행위를 해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의 기준을 새롭게 정해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기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작은 일 같은데 그 일을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죠. 본문 23~26절까지 말씀은 바로 앞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다음의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살인에 비하면 말 한마디는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우리는 예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자로서의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선한 일이 나올 수 없죠.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가 쓴 「하나님 나라 최전선에 서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심성은 착하나 욕을 잘하는 몇몇 일꾼과 함께 일하는 상황을 소개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그 일꾼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나우웬 자신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아무 말도 않다가 서서히 화가 나면서 마침내 폭발하고 말 것이다.
“욕하면 안 되는 거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우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토니라는 수도사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간 욕을 하며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조용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형제님, 여기는 수도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그분을 사랑하거든요.”
그 일꾼은 안토니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그분을 사랑합니다.”

두 사람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단순한 행동으로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진 빛과 소금으로 살 때, 주위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는다. 변화를 일으키는 열쇠는 거대한 프로그램이 아닌 ‘수도사의 선택’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한 영혼이, 성숙한 지성을 소유한 한 영혼이 성취하는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닮은 개개인의 행동이, 그리스도를 위한 작은 행동이 성취하는 일이다.

가만히 본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물을 가지고 제단에 드리려다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 어쩌면 내 형제가 무슨 일인가로 인해 나에게 원망을 할 수도 있겠구나!’
아마도 그렇게 큰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두 가지가 다 가능한데,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분명히 그 사람이 화를 냈을 거라는 생각, 다른 하나는 나는 잘못이 없지만,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많이 경험하는 일들이지요.
꼭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나에게 불편하게 느끼고 있다면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보다 제가 더 민감할 것 같습니다. 불편한 사람이 눈에 보이면 설교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24절의 말씀입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아마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혹은 “네 잘못을 빌고”라고만 되어 있다면 마음이 가벼울 텐데. 그런데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다시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라고 하셨을까요? 아마도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거죠.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는데, 예물을 가져가면 안 올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렵게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누구 편에서든지 ‘분노’와 ‘원한’은 영적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 때문에 화목이 깨어질 때 쉽게 보지 말고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누군가 성이 나거나 분노 때문에 화가 났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화를 내거나 민감했던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하루의 긴 사역을 마치고 배가 고프고 피곤할 때 절제하지 못하고 감정의 유혹에 넘어졌을 때입니다.
“화목하고 오라!”라는 것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고,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을 잘 생각하고 해결하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것들이 서로의 관계를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믿지 않는 자들과 달라야 하는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어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렇게 관계에 민감하라는 것입니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아시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크리스천의 양심을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는 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의식(儀式)’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 당시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와서 빚을 갚아주지 않는다면 그 감옥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실제적인데,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갈등을 해결하라는 실제적인 충고의 말씀입니다.

“급히 사화하라!”라는 의미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바로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갈등을 치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함께 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오늘 이 말씀을 오랫동안 묵상하며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이 말씀에서 일방적으로 불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나’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로 어떻게 화가 났는지, 갈등이 발생했는지는 따지지 않고, 일단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에 보면 분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를 화나게 하는 그들’이 아니라 ‘쉽게 화내는 나’다.
너무 쉽게 화가 나는가?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릇된 방법으로 성을 내는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나는가? 그것은 당신 안에 사랑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했다. “사랑은 분노에 역행한다. 사랑은 사소한 것 때문에 분노에 굴복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기 전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성냄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성내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돈이나 시간이 없을 때, 혹은 문제가 점점 커질 때 성내는 쪽을 택했는가? 그것은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대신 문제만 크게 보고 하나님을 향해 성을 낸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한 푼이라도”라는 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지 모릅니다. 우리는 심판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변명할 이유를 찾을지 모릅니다. 관계가 틀어진 이유를, 내가 화를 낸 이유를 얼마든지 상대방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단절’의 문제요,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죠. 이 문제를 푸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셔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거절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다가가 사화하려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권한을 다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절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했을 때, 우리는 가장 적절하게 사랑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기준입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이 상대방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의 내면을 보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 하시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쉽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한 문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주 다른 세 가지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말을 조심하라고, 그리고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말을 했거든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그다음은 너를 고발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과 예배, 그리고 심판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예배가 다른 것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심판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판이 얼마나 긴박하고 무서운 일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화된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산상수훈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습관에서 신앙적 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황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하라고 요구합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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