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풀어놓음 (요 12:38-44)

첨부 1


풀어놓음 (요 12:38-44) 

■ 요한복음 12장 38절 ~ 44절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하신대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만 해도 지난주까지 45 가정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나라마다 다양한 장례법들이 고안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화장을 선호하고, 수목장(樹木葬)도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몽골의 풍장(風葬), 티벳의 조장(鳥葬), 북유럽의 빙장(氷葬), 미국의 우주장(葬)도 있습니다. 최근 홍콩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을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다이아몬드장(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법은 암석을 뚫거나, 자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다가가신 주님이 큰 소리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4).

완전히 죽었던 나사로가 분명히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외양적(外樣的)인 모습은 죽은 그대로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놓고 중요한 질문 두 가지를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왜 저들은 나사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다가가서 얼싸안고 기뻐하며, 그를 풀어줘야 하는데도 그냥 멍하니 보고만 서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사로와 관련하여 주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요 11:34) ‘돌을 옮겨 놓으라’(요11:39).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동문서답을 합니다(요 11:34). 즉각 돌을 옮겨놓기는커녕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옮겨놓지 않으려 합니다(요 11:39). 그러다가 마지못해 옮겨놓습니다.

둘째,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깨끗이 그를 묶은 노끈, 베옷, 두건까지 다 풀어버리시지 않으셨을까요? 살리시되 왜 수족(手足)이 묶인 채로 그냥 두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무덤이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셨을까요? 무덤의 돌을 옮길 힘이 없으셨을까요? 마지막 수족을 묶은 것들을 풀어줄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선, 저들은 지금 심각한 편견,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저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사흘 후 저들은 코로 확인까지 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싸늘한 시체로 영원히 꽁꽁 묶인 채 무덤에 있어야할 존재라는 선입견이 저들 뇌리에 꽉 박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꼭 알아야 할 사실이라도,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라면 두 눈을 감습니다. 이 같은 위험한 ‘의도적 외면’이 내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이 사건을 봅시다. 지금 내 곁에 주님이 이미 살려놓으신 나의 나사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그 어떤 선입견,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를 대하고 있진 않습니까? “안 돼, 저 인간은 소망이 없어. 내 남편은 하늘이 두 조각이 나도 안 돼, 이미 죽은 자야, 아무리 해도 예수 믿을 가능성이 없어.” 이들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는 진정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이 나사로가 언제 살아났을까요?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자’(요 11:7),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하셨을 그때 이미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이미 살려놓으신 자를 놓고 세 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를 살리는 이 일에 저들이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들(엡 2:1)이 언제 살아났습니까? 미리 아심-미리 정하심-부르심-의롭다하심-영화롭게 하심의 다섯 단계입니다(롬 8:29-30). 구원은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이 홀로 구원역사를 이루어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자가 본격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그분 앞에 무릎 꿇을 때가 언제입니까? 세 번째 ‘부르심’의 단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사로는 영적으로 1,2번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살아있지만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다가가 풀어놓도록 하는 일에 살아있는 오늘 우리가 그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고전 1:21, 3:9, 고후 6:1). 주님께서 이미 작업을 다 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의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길 원하십니다. 풀어놓는 일은 우리가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리라고, 그렇게 도도했던 나아만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었습니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되리라 누가 생각했었습니까? 이어령 교수가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자가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었습니까?

우리교회 한인순 권사, 한인숙 집사 자매가 있습니다. 친정 부모님을 구원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주일마다 우리교회로 모시고 나와 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지금은 홍제동에 계셔서 1부 예배를 드리고, 다시 달려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근처 교회에서 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제자훈련 과제로 부모님 중 한 분께 편지쓰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형제가 어머니에게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건강에 대한 염려와 어머니의 수고에 대한 감사와 함께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 나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글이 모두의 마음에 와 닿았고, 모두를 숙연하게 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의 편지를 받고, 그의 마음이 감동 감화를 입어서 빠른 시일 내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내 곁에 살려놓으신 나사로가 내 곁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가지도 않고, 말도 걸지도 않고, 다가가서 풀어주려고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를 죽은 사람으로 정죄하거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그냥 그를 내던져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가가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이미 풀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가서 풀기만 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답답하게 묶여있겠습니까? 그도 누군가가 와서 풀어주기를 원하고 있을 줄 믿습니다. 바로 그 나사로가 여러분 가정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에게 다가가 풀어놓는 역사가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성석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