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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혹 흘러 떠내려갈까 (히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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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흘러 떠내려갈까 (히 2:1-4)


소설이나 영화에 보면 주인공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거나 기관 고장이 생기는 바람에 표류를 하게 되면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배는 그저 물결치는 대로 따라 흘러가다가 으레 어떤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고 그런 후에 그 섬에서 신나는 모험이 시작되든지 혹은 예기치 않았던 로맨스가 싹트게 되든지 하는 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표류를 하게 되면 일단 항로를 벗어나면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뿐 아니라 좌초의 위험이 아주 높아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동력을 잃고 표류 상태에 빠진 배는 약간의 파도만 들이닥쳐도 전복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표류란 뱃사람들이 풍랑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그처럼 원래의 항로를 벗어나 '흘러 떠내려가게 되는 표류의 위험'이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1절 하반절에 "1b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이것은 '바람에 밀려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상태' 즉 표류 혹은 조난을 의미하는 말로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구원의 항구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표류하다가 결국 파선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 하면, 그것은 현상 유지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불신앙의 바다 깊은 쪽으로 점점 더 표류해 갈 위험이 다분하다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치명적인 영적 표류에 자칫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생활 중에 '혹 흘러 떠내려가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앙의 표류를 깨닫게 해 주는 기준은 '성경 말씀'입니다. 

1절과 2절에 "1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2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들은 것"이란 바로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계시를 여기서 유독 '들은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앞의 1장에 나오듯이 이 성경이 하나님께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결과 우리가 '듣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에까지 보내셔서 친히 우리의 귀에 대고 말씀해 주신 직접계시'를 통해서 '듣게' 된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이보다 더 크고 뚜렷하게 들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므로" 이제는 그 모든 계시를 들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할 일은 오직 그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라는 순서뿐입니다. 
이 '삼가다'라는 우리나라 말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지나치지 않도록 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성경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번역은 아닙니다. 
'간절히 삼갈지니'라고 되어 있는 부분의 헬라어 원래 의미는 '더욱 많이 주의하여'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약간의 의역을 가하면 '주의를 집중하여'(pay the closer attention) 혹은 '굳게 간직하여'라는 뜻이 되며, 실제로 최근의 한글 성경들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모든 들은 하나님의 말씀들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고 자기 심령에 굳게 간직함으로써 혹 영적 방심에 빠져서 떠내려가게 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란 '아들을 통해 직접 주신 말씀'의 이전 단계의 계시인 구약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 구약을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천사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천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계시 수단을 통하여 전해 주신 말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 구약의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라는 말은 율법의 말씀 역시 '강력한 구속력이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어기는 범죄, 율법을 거역한 불순종도 다 "공변된 보응" 즉 '공의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에야 GPS 덕분에 지구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다물결만 보고서는 그 배가 어디로 밀려가고 있는지, 조류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 판단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움직이지 아니하는 기준점'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등대나 해안에 높이 솟아 있는 산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북극성을 기준으로 해서 '위도'를 측정하고, 현위치에서 태양이 남중하는 시간을 잰 후에 그것을 출발지의 시간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계산함으로써 '경도'를 측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지형지물이든지 별이든지 하여튼 어떤 '부동의 기준점'이 있어야만 자신이 표류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바로 그렇게 사용해야 합니다. 
설교 시간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들었던 모든 말씀들을 평소의 생활 속에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 기준'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서 과연 내 영혼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나의 신앙생활이 진보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혹은 똑바로 가고 있는지 곁길로 빠지고 있는지를 늘 체크하면서 살아야만 그런 영적 표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적 퇴보나 이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인 동시에 유일무이의 예방책인 것입니다. 

군대에서 '차렷!'이라고 하는 구호를 영어로는 'attention!'(주의집중)이라고 합니다. 
즉 지금 상관이 앞에 나타났으니 부하들은 온 정신을 그 상관이 하는 말에 완전히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바로 그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도 '간절히 삼가고 주의를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사령관이 분명히 내린 명령도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는 병사와 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방심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흘러 떠내려가서 신앙생활에서 남보다 뒤처지거나 혹은 아주 이탈하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에 이처럼 자주 그리고 명백하게 들려주시는 모든 말씀에 더욱 주의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 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표류를 붙잡아 주는 중심은 '구원 확신'입니다. 

3절에 기록하기를 "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의 계시를 통해 들려주고자 하시는 내용의 핵심은 바로 '구원'입니다. 
세상에 온갖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죄인 구원'을 주제로 기록된 책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타종교의 소위 '경전'이라는 것들 역시 사실상 '윤리, 도덕, 철학'에 관한 내용이지 성경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사불란하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구원을 가리켜 특히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구원'이라는 단어는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무슨 '가난에서의 구원', '질병에서의 구원', '소외와 압제로부터의 구원' 이런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두고 '큰 구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작은 구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큰 구원'은 바로 '사람을 죽음의 저주에서 살려 주는 것'이며, 이런 '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도 이런 엄청난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등한히 여김'이란 말은 영어로는 'neglect'(무시하다)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 십자가 구원을 '우습게보고 무시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불신자들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자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구원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명백히 계시된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그처럼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피하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는 바로 앞 2절에 기록된 사실 곧 '율법을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써 받게 된 공변된 보응'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 역시 '영벌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no escape' 즉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 구원을 아예 안 믿는 것이나 겉으로는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가볍게 여기는 것이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피장파장이요 오십보백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적어도 확고부동한 기독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절대로 그렇게 '등한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주"(Kyrios)라는 단어는 신약 성도들이 예수님을 칭할 때 사용한 대표적 명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처음부터 확실하게 선포하신 대명제가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 즉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화육강세하신 것이요 바로 이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그 구원의 복음을 "들은 자들" 즉 제1차 목격자들이 "확증한" 사실이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곧 '구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예수님 외에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다른 계시가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은 주님께서 몸소 찾아오셔서 전하신 것이요 직접 우리 귀에까지 들려주신 것이니, 이제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전해 준다 해도 그것은 참된 구원의 복음일 리가 없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제일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구원'이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은 '예수 구원 신앙'에 확고히 중심을 붙잡고 있는 신자는 자연히 절대로 흔들리거나 떠내려 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돛이 부러지거나 엔진이 고장을 일으킨 경우에도 닻만 있으면 그래도 표류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강한 파도가 덮쳐 와도 그것과 직각으로 배의 방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전복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닻이 해저에 박혀서 배를 붙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역시 '구원의 확신'이라는 닻에 확실히 뿌리를 박고 있으면 아무리 표면에는 좀 바람이 불고 물결이 쳐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좀 가난해도 천당 갈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그까짓 돈 때문에 '신앙까지 흔들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병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을 하거나 혹은 남보다 일찍 죽게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하더라도 나 자신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음을 입게 되고 이 죽을 몸이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신자라면 그 육신의 연약이라는 것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약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시험이란 것은 그 교인이 '구원 신앙'에서부터 확고부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교인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기도 응답을 못 받아서', '교회생활을 해도 축복이 없는 것 같아서'라는 말들은 다 핑계에 불과할 뿐이며 진짜 이유는 자기 속에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 한 가지에 있는 것입니다. 
항상 '작은 구원'들만 찾고 기다리느라고 안달하고 눈이 벌겋게 되어 있는 교인은 신앙생활에 아직 '닻'도 안 내린 사람이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흘러 떠내려 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이같이 큰 구원', '예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이 영생구원'을 한순간이라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늘 확실하게 붙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의 표류를 막아 주는 힘은 '성령 능력'입니다. 

4절 말씀에 "4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신앙을 확고부동하게 유지시켜 주는 '큰 구원'은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희'란 앞의 3절에서 '주로 말씀하신 바'를 '듣고 확증해 준'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하여 '함께 증거해'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증거물들은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표적"(sign)이란 육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초자연적 기적을 가리키며, "기사"(wonder)는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경이로운 사건들을 가리키며, "능력"(power)은 특히 '신적인 힘'(두나미스)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 셋 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란 바로 '성령의 선물들' 즉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사'라는 단어는 보통의 경우 'charismata'(카리스마타)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딱 이 한 구절에서만 특별하게 'merismoi'(메리스모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는 'distribution'(분배)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나라말 번역에도 '나눠주신 것'이라고 해 둔 것입니다. 
즉 이 단어는 '은사' 그 자체보다는 그 은사를 '나누어 주는 사람'을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 바로 앞에 "자기 뜻을 따라"라는 수식어가 함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고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마음대로 나누어 주신 선물'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선물'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주는 사람 마음대로'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신자라 해도 누구는 어떤 은사를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 쪽의 요구나 열성이나 공로' 따위에 차이가 있어서가 결코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혹 어떤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약하거나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당신 뜻대로 정하시고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구원 사건의 제1차 목격자들의 증언 즉 복음이 진짜인 것을 사람들로 믿게 하시기 위하여 초대교회들을 통하여 이런 여러 가지 기적들과 은사들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함께 증거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함께 증거하다'라는 말 역시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단어로서 '모든 증거를 다 합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최종적인 뒷받침'이요 '완전한 확증'입니다. 
성령의 기적적 역사와 은사들을 통하여 예수 구원만이 유일하고도 참된 구원인 것을 확증해 준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친히 최종적으로 확증해 주신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친히 선포된 '구원의 말씀'은 여러 가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증거'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구원은 세상의 정치가들이 헛되이 공약하는 '말로만 하는 구원, 듣기에만 좋은 구원'이 결코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통한 영생 구원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현인들이나 성자라고 불린 자들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구원,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구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각 신자의 심령과 삶 속에 실제적으로 체험된 표적과 기사들이며, 그 구원은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온갖 성령의 역사와 은사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증되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닻이 해저에 박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배와 연결시켜 주는 줄이 끊어져 버리면 역시 흘러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이 세면 셀수록 그 닻줄에 가해지는 힘도 더욱 강해질 것이고 그것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인장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고통, 세상의 환난, 마귀의 시험 등등의 강력한 도전 앞에서도 '구원 신앙'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붙잡게 해 주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입니다. 
나 자신의 인내력이나 열성이나 노력이나 간절함이 그 구원의 확신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에 그 세파의 도전을 이겨내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와 여러분은 그런 성령의 힘을 항상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성령께서 지금 그 사람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인생이 복잡하게 꼬이고 사회는 불안하고 세계정세는 어두워지기만 해도 '내 아버지의 집'에 찾아와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칠전팔기의 용기와 새 힘을 얻게 되는 것 역시 오직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인하여 벌어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온갖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들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성령께서 부단히 역사하시는 '기적의 현장' 한 가운데에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여러 가지 능력들과 나눠주신 은사'들이 충만한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한번 붙잡은 구원의 확신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성화의 완성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강은 아래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런 강물 위에 떠 있는 사람이나 배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자연히 강물과 함께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물결을 거슬러 헤엄을 치는 사람, 키로 방향을 잡고 엔진으로 스크류를 돌려서 전진하는 배만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가만히 있는 교인'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교회'는 반드시 아래쪽으로 표류해 가게 만드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구원 확신'을 중심으로 붙잡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함으로써 이 압도적인 '불신앙의 조류'를 거슬러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떠내려가는' 사람도 떠내려가지 않는 사람과 일단은 '똑같은 물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있으며 똑같이 아무 교회의 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똑같은 '물속'에 있는 사람들 중에 '혹 떠내려가는' 사람이 생길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물속에 있다고 절대로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경향교회 교인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목사나 장로 집안의 자녀라 하더라도, 아무리 경향교회 S.F.C. 출신이라 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절로 '떠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 설교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은혜가 되지 못하면 이미 흘러내려 가기 시작하고 있는 첫 징조입니다. 
'나는 예수 십자가로 구원 받은 몸이다.'라는 감격이 매순간마다 맥박처럼 치솟고 호흡처럼 느껴지지 않는 교인은 아직 신앙생활의 닻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사람입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세상의 조류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감으로써 성령의 법으로 지배를 받고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강권적으로 활동하는 강력한 지체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사실은 여전히 취약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을 간신히 영위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옛날 중학교 시절에 불렀던 이런 찬송이 있었습니다. 
'풍랑이 일고 바람이 불 때 그대는 닻을 쥐고 섰는가 / 거센 조수가 몰려 올 때도 요동함이 없이 서 있나 / 큰 물결 일 때도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분 있네 / 반석 되신 주님 섬기는 우리들을 지키는 닻 있네'라는 가사의 찬송이었습니다. 
'풍랑이 일고 바람이 불어도' '닻을 쥐고 서 있는 성도'는 결코 '요동함이 없는' 법입니다. 
'혹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말씀'에 더욱 주의를 집중하고 '예수 구원'의 감격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며 '교회 중심의 생활'을 통한 성령의 강권적인 힘을 입음으로써 끝내 '저편 포구'의 영화의 자리에까지 꼭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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