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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고후 6: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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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고후 6:14-7:1)


신22:10에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 합니다. “겨리”란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입니다. “겨리한다”는 것은 소 두 마리가 짝이 되어 한 쟁기를 끌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말씀은 소든지 나귀든지 같은 짐승을 짝지어 논밭을 갈게 하고, 종류가 다른 두 짐승이 한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수레나 자동차가 바로 가려면 좌우 바퀴의 크기가 꼭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레나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뱅뱅 돌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키와 몸집과 힘이 각각 다른 두 짐승으로 하여금 한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게 하면 논밭을 가는 작업이 잘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명령은 효율적인 농사의 방법 중 하나를 가르치는 말씀이긴 하지만 단지 농사의 요령 즉 짐승 부리는 방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주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금지명령에는 분명 영적인 의미, 신앙적 교훈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하는 데 그 명령을 활용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권면을 시작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지를 수사학적으로 표현을 바꾸어가며 여러 차례 반복하여 묻습니다. 14절 하반절부터 16절 상반절까지를 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벨리알은 사탄의 다른 이름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렇게 다섯 차례나 반문을 거듭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종류의 두 짐승에게 한 멍에를 메우는 것을 영적인 일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예는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는 신자들이 또한 우상의 신전에 드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체의 행위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사도 바울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 16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하고는 이어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처소로 여겨진 것은 모세 때는 성막이었고 솔로몬 왕 때부터는 그가 지은 성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이 될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알려준 말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한 것이었으며 “임마누엘”이란 말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마1:23). 

또 요2:18-21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표적을 보이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고 유대인들이 되묻기를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골2:9).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새 성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쓰고 난 후에 이어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뽑아 그 근거로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 하반절부터 18절까지가 그 말씀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에 대한 사도 바울 자신의 설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의 이유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7:1에서 그 물음에 답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약속을 가진 우리”라고 한 데서 “이 약속”이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라는 말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그 말들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라는 말 사이의 관계성입니다. 이 두 말은 긴밀히 연관된 것입니다. 거룩함의 본뜻은 구별됨입니다. 만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당신 외의 모든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온전히 구별되는 것은 바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 또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 사이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 또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데로 나아가야 하고 또 그것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면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행실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그 동기가 되고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허사가 되기 쉽습니다. 거룩해지고 깨끗해지려는 의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면 쉽게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순수성과 기준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과 담 쌓고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이 세상과 완전히 담 쌓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과 담 쌓고 산다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5:13) 하신 말씀이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하신 말씀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하신 지상 명령도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과는 분명히 달라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행복관이 다르고 삶의 목표와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의 정체성이 상실되거나 희석되기 쉽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은 믿지 않는 자들과 상종하거나 접촉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과 같아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면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짠 맛을 잃는 소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불 꺼진 등이 어둠 속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만 살고 이 세상에서는 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며 이 세상을 참으시고 이 세상을 용서하시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과 같아져서는 안 되고 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 이것은 역설인 것 같지만 진리입니다. 

이 세상과 함께해야 하지만 이 세상과 멍에를 함께 메지는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을 더럽히는 온갖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모든 불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의 모든 어두운 생각과 행실을 쫓아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온갖 사탄의 역사를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온갖 우상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한 시도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쉴 새 없이 우리의 영과 육을 더럽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날마다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성령님께 간구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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