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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가 되라 (요 20: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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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가 되라 (요 20:24-31)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24-31) 


도마의 의심

본문의 주인공은 도마입니다. 도마는 12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도마”란 아람어식의 명칭이고 헬라어로는 디두모(Divdumo"), 히브리 식으로는 테옴입니다. 서양 사람들 이름 주에 토마스, 톰, 토미 같은 이름이 다 도마에서 온 이름입니다. 

도마란 이름의 뜻은 쌍둥이입니다. 도마가 누구와 쌍둥이였는지는 성경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Plummer는 추측하기를 도마는 마태와 형제일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도마와 마태는 12제자 명단에서 항상 붙어 다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서에는 도마의 본명이 유다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마의 본명이 무엇인지, 누구와 쌍둥이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도마는 바로 오늘날 우리 모두와 쌍둥이다!”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점에서 쌍둥이란 뜻입니다.
  
도마에 대한 언급은 공관 복음에는 이름만 거론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세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에 가면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고 한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주께서 제자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러 가겠다고 하실 때에,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14:5) 질문한 장면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 말씀입니다. 모든 장면에서 도마는 얼마쯤 믿음이 모자라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마의 믿음은 항상 의심과 합쳐져 있습니다. 일단 의심하고, 일단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회의론자나 비관론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실증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증명 되면 믿는 사람, 이해되면 믿는 사람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4-25) 

도마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이르되..”(25)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르되” 하는 말은 어법상, 계속해서 말했다는 뜻입니다.(e[legon imperfect tense) 아마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나 열 사도들이 거듭 부활을 증거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좀처럼 믿지 않았습니다. 

25절의 “믿지 않겠노라”(ouj mh; pisteuvsw)는 말은 二重 부정으로 매우 강조적입니다. 나는 절대로 안 믿는다! 이런 도마의 모습은 곧,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늘 도마처럼 의심하면서 믿습니다. 보아야 믿고, 만져야 믿고, 증명되어야 믿고, 이해되어야만 믿습니다. 그 이전에는 모든 것을 의심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직업에 종사합니다. 그런데 직업에 따라서 사람을 다양하게 의심합니다. 범죄자를 취급하는 검찰이나 경찰은 모든 사람을 일단 도적놈으로 봅니다. 의사들은 모든 사람을 일단 환자로 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일단 돈 주머니로 봅니다. 술장사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술꾼으로 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서 “지적인 장애”(intellctual problem) 라고 합니다. 동양의고사성어로 한다면 식자우환(識字憂患)입니다. 의심은 정신적으로 불안정 한 상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의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의심은 파도와 같이 흔들리는 마음이요 두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서 불안 상태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사람들은 항상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고, 인간관계가 깨지기 쉽습니다. 의부증, 의처증, 다 의심에서 오는 병입니다. 

저는 드라마를 거의 안 봅니다. 최근 우연히 한 번 낚여서 보기시작 했는데, 여지없이 출생의 비밀이 등장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니 역시나 관계 파탄입니다.  그렇게 좋고 멀쩡하던 관계가 의심하는 순간 다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와는 마귀가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유혹할 때에,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잘못 판단했습니다.(창3:5)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항상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망하게 하는 게 아닌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17:7) 그래서 그들은 항상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종종 도마처럼 무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현대인을 가리켜서 흔히 군중 속의 고독 자들이라고 합니다. 도마가 왜 사도들의 모임에서 떠나 홀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때 도마가 낙심하여 “다 끝장났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고독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독에 빠져도 사도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고독에 빠졌더라면 일찍이 나타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리를 떠나 있는 바람에 남들이 다 목격한 주님을 혼자만 믿지 않고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고독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무리에 섞이지 않습니다. 독야청청 신자들입니다. 신앙에는 독야청청이 없습니다.  어울려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인체에 비유했습니다. 성도들은 지체입니다. 류현진 선수의 팔과 어깨가 아무지 좋다 해도 따로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인체는 어느 한 부위만 잘 될 수 없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다 피차 의심 많은 도마들입니다. 이 의심을 극복하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함께 하는 가운데 의심을 이겨 가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가 되라 

의심하고 있는 도마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지 8일 후의 일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6) 

“도마야! 너 나를 그렇게 의심할 수 있느냐?” 이렇게 따지려고 나타나신 게 아닙니다.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안 믿어지거든 보여줄 테니 믿어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보고 만지고 믿어라!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심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기드온이 하나님의 임재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삿6:36-40) 

부활하신 주님은 첫 날에 다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들에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베드로에게, 그리고 열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 40일 동안에 다섯 차례 더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회심시키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많은 증거들을 주십니다.  마음에 증거 하시고, 사람들을 통하여 증거 하시고, 환경을 통하여 증거 하십니다. 오늘 마음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증거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의심을 해결해 주시려고 친히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도마에게, 부활을 의심하던 모든 제자들에게. 그러나 보고 믿는 것이 신앙의 정수는 아닙니다. 참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가 증명이 아닌 믿음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베드로 사도는 신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 

알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알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연의 운행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도, 인간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도 알게 됩니다. 믿으면 알게 되고, 믿으면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콜럼부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체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기꺼이 맡기고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정보 가운데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정보가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이 확인하지 못한 정보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정보들을 믿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육체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만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성경에 기록된 정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분이 행하신 이적들입니다. 
둘째는 그 분이 살아가신 삶의 모습입니다. 
셋째는 그 분이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도마를 보세요! 그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만일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주님에 관한 다른 것들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도마에게 주님은 자신을 보이시고 만지게 하셨습니다. 보고, 만져서라도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많은 증거들을 우리 생애를 통하여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정 바라시는 믿음은 보고 만지고 믿는 감각적인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믿는 영적 믿음입니다. 도마는 보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도 제자들도 다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육안으로 본 적이 없어도 믿습니다.  주님은 그런 신자들을 복되다고 하십니다. 보이지 않아도 믿는 우리는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멘!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도마는 주님을 보고, 말씀을 듣고, 즉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도마의 신앙 고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멋진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 

베드로의 고백 속에는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고백이요, 
둘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께 대한 신앙은 언제나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사도 요한 역시 이 두 가지를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31절) 

예수는 메시야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전자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믿는 데는 쉽게 동의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은 인정하면서도, 신성을 인정하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해 온 메시야는 유대 민족의 해방자요, 국가를 재건하는 자요, 번영된 나라를 만드는 지도자요, 사회의 개혁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성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1:34, 세례 요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나다나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11:27, 마르다) 

사도 요한의 기록을 보세요.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1:1) 그는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1:14)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합니다.(10:30)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믿고 고백할 때에 참 신앙이 완성됩니다. 이 중대한 신앙 고백이 드디어 도마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의심 많은 회의론자, 실증주의자 도마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이 제대로 믿지 못했던 신성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은 요한복음의 주제요, 마지막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도마의 고백은 역사적 중요성을 지닙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중에도 신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십니까? 믿는다면 온전하겠지만, 인간 예수만 본다면 반쪽 신앙입니다. 메시야 고백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도마의 고백 가운데 또 한 가지 주목하는 것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oJ kuvriov" mou kai; oJ qeov" mou)이라는 고백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 객관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주님입니다. 

이 세상에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무신론자라도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을/ 인정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신자는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있는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 될 때 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란 말은, 곧 내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마음에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합니다. 주님과 교제합니다(13:34,15:10,17:21) 나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 뜻과 말씀에 복종합니다. 하나님은 내 생애를 축복하시고 모든 삶을 보장하십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 변화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 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도마는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고백했을 때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는 멀리 인도까지 가서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인도의 성 도마 교회의 설립자요, 순교자가 됐습니다. 여러분! 신의 존재를 믿는 자로 끝나지 마시고,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단계에 머물지 마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비로소 나의 모든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에필로그, 믿음과 영생

30절과 31절은 도마 이야기에 붙인 사도 요한의 에필로그입니다. 요한의 강조점은 두 가지에 집중됩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mh; givnou a[pisto" ajlla; pistov" ,27) 믿음 없는 (a[pisto", anti-faith, no-faith) 자가 되지 말고(mh; givnou, not be, 현재 명령형), 반대로(ajlla, but) 믿는 (pistov", faith)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를 자극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유발시키자! 수많은 이적들을 기록한 것도,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것도, 목적은 예수를 믿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믿는다”는 말을 100회 이상 사용했습니다. 예수를 보게 하고 만지게 하자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이적에 감탄한다든지 이적에 놀라자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자는 겁니다. 예수님 이적에 놀라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만지고 느끼고 믿는 단계가 있습니다. 보고 믿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품질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고품질 신앙입니다. 보고 만져야만 믿는 낮은 단계의 믿음에서, 높은 단계의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얻는 영생입니다. 신앙의 최대 결과는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31) 

지상에서 인생 최대의 원수는 죽음입니다. 생명의 반대편에 죽음이 있습니다.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어둠의 날들을 소망 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영벌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최대 선물은 영생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1:4) 

예수님이 곧 생명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바로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요한복음의 목표는 영생입니다. 이 영생에 필히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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