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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을 내밀라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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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내밀라 (막 3:1-6)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그의 책 『거룩하신 하나님』(God in the Wasteland)에서 현대인의 왜곡된 신앙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 앞에서 포기해야 할 하나님보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하나님을 의지해 왔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요 우리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워서가 아니라, 시장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우리는 교회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바꾼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그분의 실재를 우롱하고 자신의 모험과 경력을 선전하는 데 그분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하나님께서 잠자코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의 몰두라는 ‘철창’에 하나님을 가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화한 은혜의 햇빛이 우리의 예상만큼 따뜻하지 못하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번영과 성공을 쏟아붓지 못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여러분, 공감이 되십니까? 혹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의 입맛대로 하나님을 요리합니다. 그래서 내 필요와 요구에 맞게 내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착각해버립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나 삶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 속에 가둬놓고, 우리가 필요한 것만을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시장에서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골라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건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살면서도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회당에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당을 찾아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전 586년 바벨론에서 의해서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파괴되면서부터 회당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성전이 파괴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그 먼 이국 땅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회당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사는 가까운 곳에 회당을 짓고서 그곳을 중심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예배는 주로 말씀을 낭독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지기나 랍비들이 말씀을 낭독하고 그 말씀을 쉽게 풀어주는 - 오늘로 말하면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거기에 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왔지만, 예배를 드리거나 말씀을 듣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의 말씀에 의하면, 그날 그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고,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도 지금 예수님께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고발할까 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바램대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회당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것은 피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서 근육이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6장에서는 그 손이 오른손이었다고 가르쳐줍니다. 

초대교회 성서번역가였던 제롬(Jerome, 345-420)에 의하면 그 사람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우리는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한 때는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습니다. 비록 무거운 돌을 다루어야 하는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가족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오른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이 저려오면서 점점 힘을 잃고 맙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근육이 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힘을 쓸 수도 없을뿐더러 손을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이제는 일자리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을 먹여살릴 힘이 없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살던 가족들은 가난에 찌들어 너무너무 힘들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오른손의 근육이 마비가 되어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한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 건강을 잃어 일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가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그의 마음은 말 그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회당입니다. 회당에 오면 세상의 걱정과 염려를 다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그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회당엘 찾아왔습니다. 회당에 와 보니, 그날따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쳐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 교사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온 동네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회당에 들어왔는데 때마침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정말로 복 받은 날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자꾸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날 그 회당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만 자신과 예수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 시선이 결코 달갑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오른쪽 손 마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를 불쌍히 여기거나 그를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 불쌍한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려고 주시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치료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자기들의 법에 저촉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눈여겨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병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그의 가족들이 힘든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고발할 건수를 찾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바람처럼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바라보시며 ‘가운데 일어서라’고 말씀하시고는, 예의주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의 마음이 다 들통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어선 그 사람을 향해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를 고쳐주십니다.

오른손이 말라버려 일을 하지 못한 사람, 그래서 가족을 부양하지도 못하고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의 안타까움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해서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선을 행하신 예수님, 생명을 살리시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칭찬하고 ‘잘 했다’고 박수를 쳐주어야 마땅한데도, 그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습니다.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오히려 밖에 나가서 다른 무리들과 작당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하고 말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고장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쁨의 감정이 고장난 사람입니다. 연민의 감정이 고장난 사람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고장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른쪽 손 마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불쌍한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불쌍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고발할 건수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한 그 사람을 고쳐주었음에도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고침 받은 그 사람은 회당 안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회당 밖으로 나가서는 온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양 행복에 겨운 노래를 목청껏 불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병으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아도 되고, 가족들 굶지 않게 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밖으로 나가서 은밀하게 모의를 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행복에 겨워 소리 높여 노래하는 그 사람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병고침을 받는 것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박수를 쳐주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의 마음속에서 마귀가 속삭이는 분노의 소리만이 들릴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불쌍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진짜 행복한 사람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 것에서만 행복을 찾거나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에만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함께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의 웃음에 진정한 마음으로 따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행복에 함께 행복해 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남들은 ‘그가 당연히 당하는 일’이라고, ‘그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까지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그 자신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그 죄 때문에 당연히 그는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는 눈을 뜨게 고쳐주셨습니다.(요한복음 9장)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 취급을 하고 왕따를 시켰지만, 주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그를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누가복음 19장)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고는 살려 보내주십니다.(요한복음 8장) 귀신들린 사람도,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우리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는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도 많이 흘리셨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을 많이 만나 그들 때문에 마음 아파 하셨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며 곡해도 함께 울지 않는’(누가복음 7:31-32) 사람들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른쪽 손이 말라버린 사람도 참으로 불쌍하지만, 더욱 불쌍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메말라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손이 마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메말라버린 사람은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굳어져서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음이 굳어져 완악해진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분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되지 않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분노로 가득해서 예수님을 죽일 논의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6:11) 선을 행하시고 사람을 고쳐주시고 살려주신 예수님을 향하여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사람들 - 그들이 진정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 가운데 한 분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신부이면서 하버드 대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50여권의 책을 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교수였습니다. 

이런 그가 어 느날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 들어가 장애아들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은 중증 장애아 6명과 봉사자 4명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입니다. 나우웬은 그곳에서 아담이라는 지체장애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을 도왔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아침 아담을 깨워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밥 먹는 것을 도와주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그의 친구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느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신같이 유능한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이렇게 하찮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당신은 유능한 학생들을 가르쳐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을 때 나우웬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돌보는 아담이라는 아이는 내 친구요, 선생이요, 영적 지도자이며 나의 목사이다... 매일 아담과 보내는 두 시간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나우웬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중증 장애아인 아담을 통해서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러할 때 느껴지는 평화와 사랑의 감정을 비로소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장애아라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그는 그 아담이라는 장애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담 앞에 자신의 교수직이나 저술가로서의 활동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예일대학교나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수로서 명성을 얻고 존경을 받을 때보다도 장애아인 아담이라는 한 아이를 섬기며 돌볼 때에 그는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와 웃음과 함께 웃으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이 굳어 있진 않습니까? 오른쪽 손이 말라버려 모든 삶을 포기하고 고통 가운데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불쌍한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말라버린 사람입니다. 손이 마른 사람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말라버린 사람은 고침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일 방도만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는데,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그들은 생명을 죽이는 일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에스겔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 11:19-20)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마음이 돌처럼 굳은 마음입니다. 이웃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이 돌처럼 메마른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집니다. 그래서 손 마음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시며 그 손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손을 말입니다. 메마르고 돌처럼 굳어진 우리 마음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함께 울지 않는 메마른 마음에 성령의 단비를 통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에 행복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그 부드러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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