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 1:10-17)

첨부 1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 1:10-17)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후서가 쓰여 진 중요한 2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1)‘글로에’라는 고린도 교회의 여성도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당파에 관한 소식을 듣고 2)고린도 교회로부터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들-이를테면 분쟁 문제 외에도, 불륜사건, 소송 사건, 혼인 문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집회 시 부인의 수건을 쓰는 문제, 성찬 문제, 헌금 문제, 부활문제 등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쓰여 졌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서론적 부분인 문안과 감사가 끝나고, 곧 이어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본론 중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우선적으로 다룬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문제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하여 얼마나 상심하고, 또한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10-4장까지는 바로 이 분쟁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인 10-17절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실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11절에서도 ‘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싸움쟁이들아!’ ‘이 골치 아픈 사람들아!’ ‘이 배은망덕한 사람들아!’ 이렇게 부르지 않고, ‘형제들아!’ ‘내 형제들아!’ 하고 불렀습니다. 이 같은 사도 바울의 호칭에서 ‘베자’라는 주석가는 두 가지 깊은 의미가 함축되었다고 말합니다. 

1)‘형제들아!’ 하는 이 말로서, 책망의 도를 완화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채찍을 가진 교사의 책망이 아니라, 사랑이외의 감정은 도무지 가지지 않는 사람의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2)‘형제들아!’ 하고 부른 이 말 자체가, 서로가 아름다운 형제애를 갖고 살아야 할 고린도 교인들에게, 분쟁과 불화가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깨닫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라는 호칭 자체가 그들의 일치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1-10절까지 에서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10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쓰려고 하는 편지의 내용들은, 모두가 다 어려운 문제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 어려운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곧잘 법이나, 규정이나, 규칙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수단방법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이 같은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어려운 문제의 중심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에 의한 해결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1)그리스도의 인격과 권위를 배경으로 한 권면이며 2)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순종을 전제로 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분쟁을 없애기 위해 가져야 할 적극적인 자세를 권면합니다.

1)같은 말을 하라-이것은 의견 발표를 의미하는데, 발언하는 자가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편당의 인상을 주지 않도록 말하라는 뜻입니다.

2)같은 마음을 가지라-입으로는 같은 말을 해도, 같은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진정한 화합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빌 2:2-3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3)같은 뜻을 가지라-같은 뜻이란 말은 꼭 같은 판단을 내림을 의미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말을 했으면, 같은 판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암 3:3절에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같은 뜻을 가지고 인생길을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온 성도들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고, 천성 길에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온전히 합하라-여기 ‘합하라’는 말은 의학적인 용어로, 부러진 뼈를 고치거나, 어긋난 뼈를 바로 맞출 때,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분열은 우리 몸의 뼈가 어긋났을 때처럼, 매우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교회라고 하는 몸의 건강과 힘을 위해서도, 속히 고쳐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 합한다는 말은, 옷의 헤어진 곳을 가리키는데, 고린도 교회는 헤어진 옷과 같이, 보기 흉하게 될 위험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의 이 같은 위험과 분쟁의 진상은 무엇이었습니까? 12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네 개의 분파를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신앙이나, 무슨 깊은 신학상의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인간 지도자 숭배에서 비롯된 감정적인 것이었고, 정작 여기에 나오는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 같은 훌륭한 인물들은, 분쟁과 하등 상관이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의 분파를 위해서, 지도자들을 마음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네 개의 당파를 보면,

1)바울 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였으므로, 그 교회의 주류적인 인물들은 사도 바울의 지도를 따르게 되었고, 그를 존경한 나머지 바울 파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일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당파에 대하여 책망할 때, 맨 먼저 바울 파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벵겔은 “바울은 베드로 파만큼이나 바울 파를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2)아볼로 파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뛰어난 웅변가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도시는 특히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그 한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집에 있었던 318명의 개인 군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였습니다. 헬라인은 숫자를 표시하는데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318을 의미하는 문자는 이오타와 에타를 나란히 세운 것인데, 이것은 예수를 표시하는 십자가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볼로의 능통한 성경 지식, 깊은 비유 해석, 뛰어난 웅변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는 아볼로 파가 생겨난 것입니다.

3)게바 파 곧 베드로 파

이 파는 수사도격인 베드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바울 파에 비해, 그 대부분이 유대인으로 구성된 율법적 극보수 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4)그리스도 파

이 파는 앞의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를 탓하고, 이러한 당파에서 초연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당파를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직접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매우 그럴듯한 주장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잘못은 많았습니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를 너무 낮추어, 한낱 당쟁의 당수로 여기는 잘못을 범했고, 자기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믿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네 개의 당파는 저마다 그럴듯한 구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당파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바울 파에 대해서도, 전연 호의를 갖지 않았습니다. 13절을 주목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그리스도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고,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여러분이라면, 여러 종류의 그리스도파가 가능하겠으나, 주님은 한 분이심으로, 신자들이 분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강경하게 책망하는데, 이러한 책망 속에서도, 사도 바울의 위대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있는가? 혹은 베드로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있는가? 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사용한 당파를 매섭게 책망합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진정한 용기, 정직성, 그리고 그의 겸손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당파에게, 내가 당신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당신들의 구주가 되고, 그리스도라도 된다는 말이냐? 나와 당신들의 구주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신데,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니, 그 무슨 정신없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냐? 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함은, 세례 받은 자가 그 이름에 속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은 마 28:19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모든 사역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의 바울 파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세례 받은 일이 없거늘, 어찌 나를 그리스도와 같이 높이려느냐? 라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이 심한 교회에서는, 세례까지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이리 저리 나누어지고 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두 세 사람 정도에게만 세례를 준 일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감사하는데, 15절의 말씀처럼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바울의 말은 무교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세례를 무시한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최후 명령 속에는, 분명히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다만 17절 말씀은, 복음전도와 세례의 관계에 있어서, 전도가 더욱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Godet는 “복음 전도는 사도의 본연의 일이었던 그물을 던지는 것이고, 세례는 잡은 고기를 그릇에 넣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1)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언변과 2)복음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지식이 풍족했고 3)모든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풍성한 교회였으며 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며 살았던 귀한 교회였습니다. 이토록 축복을 많이 받았고, 감사할 일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였으나, 지상교회요, 유형한 교회인지라, 문제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많은 문제 중에서도, 사도 바울이 맨 먼저 다룬 문제가, 고린도 교회내의 분쟁 문제였습니다. 그 같은 분쟁의 초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가 쟁점이라기보다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시시하고 지엽적이고 가소롭고 부질없는, 당파 싸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사도 바울의 중심은 무엇이었습니까? 

1)예수 그리스도를 문제의 중심에 모셔 들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아주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책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촬스 M. 쉘든 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소설인데, 1897년 초판 발행 이래 미국에서만도 3천 만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하는 베스트셀러입니다. 꼭 한 번 일독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도 교회와 교계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2)사도 바울의 위대한 불편부당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추종하는 바울주의, 바울 파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맨 먼저 바울 파를 날카롭게 책망한 것입니다. 오늘 교계 안에 이러한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인 현상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소위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교계 안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1959년 통합 측과의 분열 이후의 모든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참으로 죄스럽게도 지역적인 파당 싸움과, 교권 싸움 때문에 기인한 것으로 봅니다. 참으로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으면 무조건 아부하고, 무조건 두둔하고, 그러다가 이해가 엇갈리면, 세속 정치인들처럼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초대 교회, 영적 생명력이 가장 풍부했던 초대교회에도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그렇다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유형교회, 육신을 입은 인간들의 한계성을 느끼면서, 우리 모두 자신들을 성찰하며 겸손해야 할 것밖에 없는 줄 압니다.

당파만큼 종교와 종교의 생명을 좀먹는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이고 당파심은 사랑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래 오늘까지, 교계 안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있어 왔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약함, 어리석음, 욕심, 악덕에서 생긴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갈 5:19-24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성령의 소욕과 아주 상반되는 육체의 소욕, 육체의 일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분쟁, 당 짓는 것, 분리함 등을 들고 있으며,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 7:16절에도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위대한 찬문학자였습니다. 그는 중세기 암흑 속에서 그의 마음을 해바라기처럼 하늘로 향하여 해와 달과 별을 살피다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에 위압을 당하여, 늘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스스로 자신의 비문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바울에게 주신 친절도 말고, 베드로에게ㅐ 내린 은혜도 말고, 저에게는 그 강도에게 주셨던 용서만을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이런 놀라운 겸손을 배우면,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문제가 아닌 줄 믿습니다. 어떤 분의 칼럼입니다.

맛있는 비빔밥은/밥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나물만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고추장만으로도 만들지 못합니다./밥과 나물이 고추장과 함께 비벼져야 합니다./재료들이 ‘같이’ 해야 비빔밥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인간은 사람(人)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사람과 사람 사이(間)가 잘 어우러져야 인간이 됩니다./‘나’라는 사람과 ‘너’라는 사람을 연결하는 문(門)에/서로 햇살(日)을 비추는 사이(間)가 되어야/비로소 인간(人間)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 사이가 어떠냐를 보고/인간이 된 사람인지 안 된 사람인지를 판단했습니다.

/햇살을 주는 좋은 사이면 ‘그 사람 인간됐다’라 하고/햇살을 주지 않는 나쁜 사이면 ‘인간 같지 않은 놈’이라 했습니다./‘같이’ 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송정 중앙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지고 융화되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치 단합된 힘으로 힘찬 전진을 계속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