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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을 배우라 (딤전 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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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을 배우라 (딤전 6:6-10)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 위기의 신호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채 6월 중순도 되지 않았는데 날씨가 마치 한 여름 같습니다. 전력 당국은 벌써부터 대규모 정전사태(black-out)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정부의 말을 떠올리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절전만 당부할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대책이 원전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됐습니다. 

얼마 전 원전 가동 중단 사태가 벌어졌고, 그 까닭이 냉각 작동 제어 케이블의 불량에 있었다니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것은 안전 계통에 제어 신호를 보내는 핵심 부품이었는데, 자칫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당국이 조사를 해보니 문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부품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원전을 세우고 운영하고 감시하는 이들이 동문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은 자기 사람 심기에 바빴고 서로의 비리에 눈을 감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논과 밭을 지키기 위해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몸부림을 두고 국책 사업을 반대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한다고 엉너리치던 언론조차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큰 도둑을 안에 두고 있는 격이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기계가 정밀해지면 사고의 위험이 사라진다는 말을 애당초 믿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기계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똑같은 현실이 달리 보입니다.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판단이라는 게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편견에 찬 존재임을 인정하는 게 대화를 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기계 장치를 정교하게 하고,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시스템을 잘 갖추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변화입니다. 

기후 변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에너지를 어떻게 생산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에너지 집약적인 삶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언젠가부터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문명이 지속 가능하려면 지금 당장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해 전부터 ‘즐거운 불편’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생태적 삶으로 회심한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 경험상 GNP의 증가가 행복의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합니다. 돈의 논리가 들어가면 가족 관계가 무너지고 오랫동안 오순도순 살아가던 공동체도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얼마 전 유산상속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동생이 홧김에 형 집에 불을 질러 여러 사람이 죽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극심한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서구의 거대 자본이 들어가 조상대대로 이어내려오던 공동체적 삶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 욕망의 지배

신약성경은 거의 2천 년 전에 기록된 책이지만 인간의 비루한 욕망에 대해서 기가 막힐 정도의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인간성이 크게 진보하지 않았다는 반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야고보서는 통찰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1:14-15)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약4:2a)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는 사람들 속에 있는 ‘욕망’을 부추기는 일에 명수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광고와 접하며 삽니다. 멋진 남성과 여성 모델들은 여러 가지 상품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데 일조합니다. 언젠가부터 가수 이효리 씨는 톱스타임에도 불구하고 광고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나온 광고를 본 지인이 거금을 들여 다이어트 제품을 사는 것을 본 후 상업광고를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기호’라고 말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간단합니다. 사람들은 제품의 질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사회적 위신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브랜드 제품을 소비한다 해서 그의 위신이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속의 허함을 내보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변변치 않은 데도 당당한 사람을 보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들을 게으르다고, 무능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마4: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의 문제가 사소하다고 말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밥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 하셨겠습니까. 하지만 밥의 문제에만 붙들려 살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아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수행하며 살 것인가도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뜻이 부족해서 우리 삶이 빈곤합니다.

한국교회는 70년대와 80년대에 ‘번영의 신학’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과 영혼 평안의 복을 받는다는 말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던 그것은 진짜 복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조율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치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나머지 것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과 말을 뒤집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팽개치고 복에만 매달렸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바꾼 결과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이미 받은 은혜가 큰 데도 그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결핍에만 눈길을 주며 살아갑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9)

이건 일종의 경고의 나팔소리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야말로 사탄이 틈타기 좋은 마음입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바울은 돈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지만, 저는 ‘더러’를 ‘많이’로 바꾸고 싶습니다. 

• 경탄을 잃어버린 현대인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삶을 단순하게 바꾸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더’의 삶에서 ‘덜’의 삶으로 개종해야 합니다. 덜 먹고, 덜 쓰는 삶 말입니다. 어느 분은 ‘더럽다’는 말은 ‘덜 없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비우지 못하는 것이 곧 더러움이라는 말일 겁니다. 누가 비우며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말을 두고 자연과학자들과 맞씨름을 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과학의 언어와 종교의 언어는 서로 문법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몇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어떤 것도 인간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원으로 봅니다.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동원되거나 파괴되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변형을 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은 꼭 필요할 때, 최소한으로만 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inter-connectedness)을 믿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아시지요?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인 샴쌍둥이가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의 문제 말입니다. 랍비는 어느 한 사람에게 아픔을 가했을 때 함께 아파한다면 한 사람이고, 아파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이들은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매우 인간 중심적 단어입니다. 환경이란 사람이나 사물이 들어가 있는 조건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때 우리와 환경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인간의 생명도 생태계의 순환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환경 보호라는 말보다는 생태계 보전이라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셋째, 모든 생명은 상호 책임지는(inter-responsible) 존재입니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추적하여 그들의 생태를 보여준 박수용 감독의 책을 읽으며 감동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연의 한 부분이 되지 않고는 자연의 신비와 만나기 어렵다면서, 자연의 더 깊은 곳을 보려면 비탈에 선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글을 읽다가 ‘아!’하고 감동한 대목이 있습니다. 숲을 걷다보면 부엉이가 토해낸 펠릿(부엉이 같은 맹금류가 새 같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 뒤 소화가 되지 않은 털과 뼈를 뭉쳐서 입으로 토해낸 것)들이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답니다. 

부엉이는 잠을 자는 공간과 쉬는 공간, 사냥터를 구분하는 영특한 동물입니다. 펠렛이 보인다는 것은 그곳이 부엉이의 쉼터라는 뜻이기에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올려다보면 부엉이는 쉼터를 버리고 다른 쉼터를 찾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부엉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그냥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박수용,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김영사, 201쪽). 올려다보고 싶지만 올려다보지 않는 것, 부엉이에 대한 배려입니다. 배려와 돌봄으로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질 때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 대안 공동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헛헛함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은 헛된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홀로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새로운 삶에 눈을 뜬 사람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협동하고, 새로운 삶의 모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은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마을 공동체 살리기를 통해 품위 있고 즐거운 삶을 모색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재능 기부와 같이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모임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운동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히(Ivan Illich, 1926-2002)가 말하는 자율적 공생(conviviality)의 삶이 바야흐로 전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애굽의 대안으로 등장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나눔과 돌봄에 근거한 세상의 꿈은 그렇게 탄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맞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이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밥을 함께 나누어먹고, 서로의 약함을 돌보아 주고, 삶을 함께 경축하며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꿈 꾼 세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생태계에 부담을 덜 주며 살게 됩니다. 호세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새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2:21-22)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고, 땅과 곡식이 응답하는 세상, 바로 평화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열어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에 눈을 뜨십시오. 척박한 이 세상 현실을 명랑하게 돌파하십시오. 없는 것을 애달파 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돈이 많은 부자가 되기보다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나눔의 부자가 되려고 하십시오. 자족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삶의 보화입니다. 자족은 우리에게 정신적 자유라는 선물을 안겨줍니다. 이런 소중한 선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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