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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기와 희생의 영성 (막 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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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와 희생의 영성 (막 1:16-20)

지난 2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재미교포 강영우 박사 이야기입니다.그는 중3 때 축구를 하다 실명했습니다. 그 후 홀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시고,누나가 자기를 포함한 세 동생들을 위해 공장에 다니다 과로로 죽게 됩니다.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시각장애인으로 어린 두 동생을 돌볼 수 없어 결국 셋은 뿔뿔이 흩어집니다.그런 그에게 무슨 미래가 있었겠습니까?암담했을 것인데 다행히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고난 가운데 승리합니다.미국유학을 가서 장애인으로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부시행정부 시절에는 국가장애인권위원회 차관보를 지냈습니다.무엇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10월에 췌장암 진단을 받은후 담담하게 인생 정리했습니다.장학기금으로 25만불을 기부하고,성탄절에는 온가족 3대가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좋은 시간을 가졌고 임종하기 얼마 전 아내에게,두 아들과 지인들에게 3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그 중에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 중 한 대목을 소개해 드립니다.“눈 먼 고아로 어린 동생 둘과 세상에 남겨졌던 나에게 누군가 나에게 지금과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면 나는 아마도 거짓말을 해도 좀 믿을 수 있게 하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역경을 신앙으로 이겨낸 것은 축복입니다. 신앙생활의 꽃이 축복이라면 신앙생활의 열매는 포기와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옛날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30년 동안 교회의 종을 치던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30대에 아이들과 교회에 오면서 그 집사님의 종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분이 60대에 손자들과 교회를 오면서도 그 집사님의 종 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30년 동안 변함없이 종을 치는 그분의 이야기는 오늘날 거의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보면 "보잘 것 없는 일도 꾸준히 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보잘 것 없는 일이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라면 꾸준히 감당하는 것이 바로 사람됨이고,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기쁘게 동참하는 것이 사람됨입니다.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도 성실하면 우리에게 하늘 냄새가 날 것입니다.30년 동안 그 집사님은 교회 종치는 일만 했지만 그분에게서는 하늘 냄새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잘것없는 분으로 보았지만 담임목사님은 그분을 성자로 보았습니다.하나님은 그분을 어떻게 보셨을까요?어느 위대한 목사보다 위대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의 어느 날,그분이 돌아가셔서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수많은 높은 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교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고 보니 그 보잘것없는 집사님의 아들이 그 당시 장관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살다보면 좋은 뜻을 세우고도 얼마 되지 않아 금방 그 뜻을 접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처음의 뜻을 굳게 유지해서 결국 알찬 삶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도 성실한 자에게 반드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혹시 남들이 자신의 고충을 몰라주는 것 같아도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를 꾸준히 지켜주십시오.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켜준다는 것이 원래 쉽지 않은 일이고,때로는 권태도 생기고,때로는 어려움도 있고, 때로는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빨리 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있듯이,자기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조금 시류에 느린 것 같은 사람이 세상의 희망이고 교회의 희망이 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고 시류에 느린 조치입니까?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자리에서 성실한 사람을 반드시 더 축복된 자리로 부르실 것입니다.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옛날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30년 동안 교회의 종을 치던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어떤 분은 30대에 아이들과 교회에 오면서 그 집사님의 종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분이 60대에 손자들과 교회를 오면서도 그 집사님의 종 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30년 동안 변함없이 종을 치는 그분의 이야기는 오늘날 거의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보려면 "보잘 것 없는 일도 꾸준히 하는가?"를 보면 됩니다.보잘 것 없는 일이지만 내가 맡겨진 일이라면 꾸준히 감당하는 것이 바로 사람됨이고,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기쁘게 동참하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도 성실하면 우리에게 하늘 냄새가 날 것입니다.30년 동안 그 집사님은 교회 종치는 일만 했지만 그분에게서는 하늘 냄새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잘것없는 분으로 보았지만 담임목사님은 그분을 성자로 보았습니다.하나님은 그분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어느 위대한 목사보다 위대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의 어느 날,그분이 돌아가셔서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수많은 높은 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교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알고 보니 그 보잘것없는 집사님의 아들이 그 당시 장관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살다보면 좋은 뜻을 세우고도 얼마 되지 않아 금방 그 뜻을 접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처음의 뜻을 굳게 유지해서 결국 알찬 삶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그만 일에도 성실한 자에게 반드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고 시류에 느린 조치입니까?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자리에서 성실한 사람을 반드시 더 축복된 자리로 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모를 보고 부르지 않습니다.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4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그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바닷가에서 낚시하며 때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하나님은 나태한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성실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 진리는 결코 예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더욱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지금 현재 주어진 내 일에 충실한 사람을 반드시 불러 사용하십니다.오늘의 충실함은 내일의 축복으로 귀결됩니다.우리가 지금 조그만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큰 일에서도 결코 충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모두 조그만 일에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하나님은 안전한 착륙을 약속하셨지,날지 않는 삶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재의 위치와 신분이 무엇인지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은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름 받은 4명 모두 갈릴리 어촌에 살던 보잘것없는 어부들이었습니다.예루살렘에 살던 수많은 지식인들, 높은 사람들을 놔두고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하나님은 자질 있는 사람을 부르지 않고, 부르셔서 자질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시선은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나 현재의 신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하나님이 진짜 관심을 두고 보시는 분야는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내일입니다.그 가능성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우리는 평범한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비범한 존재입니다.우리가 정말 비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우리는 남이나 우리 자신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를 보면서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신해야 합니다.주님을 따를 때 어떻게 따라야 할까요?

1. 비전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비전이 무엇입니까? 믿음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큰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사람이 비전을 발견하면 비천한 사람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될 수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은 '비전이 없는 끝'을 보지만 믿는 사람들은 '끝없는 비전'을 봅니다.

비전은 전염이 됩니다.비전은 심한 풍파 속에서도 우리를 낙심하지 않게 만듭니다.비전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게 하고, 생명력을 주고,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비전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과 욕심을 혼동하면 안될 것입니다.마음속에 욕심이 있는 한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순종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의 네 명은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순종하고 따랐습니다.순종은 축복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건입니다.사실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사실'보다 '순종하는 마음'이 더 위대한 축복의 통로입니다.기독교의 선택은 사명을 맡기기 위한 선택이지 그 사람만 축복하기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그것을 오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선택받은 것으로 인해서 더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축복은 선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하나님은 선택받고 불순종하는 사람보다 선택과 상관없이 순종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하루는 밀림에 있는 뱀의 꼬리가 머리에게 그 동안 항상 가졌던 불만을 쏟아냈습니다.항상 머리가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니까 이제는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처럼 꼬리가 불평하니까 하루는 머리가 "네 가고 싶은 대로 가보라!"고 양보했습니다.꼬리는 신이 나서 열심히 가다가 가시덤불로 들어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꼬리는 반드시 머리를 따라가야 합니다.꼬리가 머리를 앞서면 불행하게 됩니다.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 말씀에 앞서려고 하면 반드시 피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영광을 보기 원하면 말씀에 순종하십시오.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더욱 축복해주실 것입니다.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약점보다는 우리의 불순종 때문입니다.혹시 삶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면 더 헌신을 다짐하고 더 순종을 다짐해보십시오.순종은 축복을 줍니다.그러나 사실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3. 자기의 것을 희생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부름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8절 말씀을 보십시오."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0절 말씀을 보십시오."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그들은 자기의 소중한 것들과 인간관계를 희생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더 소중한 분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다 이런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대교회 성도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4:32),그런 삶이 능력 있는 삶이고,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소유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나눔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적 아닙니까?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하면 치유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야 진짜 능력인 줄 알지만 그러나 오늘날 진짜 기적은 돈과 소유가 우상이 된 이 시대에서 진실로 기쁜 마음으로 "이것 중 어느 하나도 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사실상 신앙생활에서 주머니를 비우는 능력이 없으면 바른 신앙을 가지기가 힘듭니다.그래서 성경에는 돈 얘기가 참 많습니다.성경 전체에 기도에 관한 말씀이 500구절 있고,믿음에 관한 말씀도 약 500구절 나오고, 사랑에 관한 말씀이 약 700구절 나오는데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은 2000구절 넘게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려면 돈 씀씀이에서 희생이 있어야 함을 잘 알 수 있습니다.신앙생활에서 십일조는 내가 돈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좋은 증거가 됩니다.그러나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십의 구를 가지로 어떻게 쓰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돈을 가지고 내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나의 가치관과 삶의 질이 나타나게 됩니다.돈을 의지하면 쌓아놓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쾌락을 좋아하면 쾌락에 사용할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한 일,좋은 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쓸 것입니다.우리가 희생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내 호주머니를 털고 내 손을 펼 때 하나님은 그때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시고 더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희생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이 세상에 희생이 없는 성공이란 없습니다.희생이 없었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 있던 누군가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우리 대신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뒤를 따르는 누군가가 우리 때문에 성공할 것입니다.모든 위대한 성취는 누군가 희생을 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우리의 희생이 없으면 성공도 없고, 리의 희생이 크면 하나님의 축복도 커질 것입니다.그런데 우리가 희생할 때 나도 모르고 내 주변 사람도 몰라야 진정한 희생이 됩니다."내가 이만큼 희생했어!"라는 생각이 들면 그 희생이 공로의식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조용히 우리의 것을 희생하면 하나님은 그 희생을 기억해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삶이 이전보다 불편해질 수 있지만 그 삶은 가장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왜냐하면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성공시키고 우리에게 최선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힘들어도 오직 주님만 끝까지 따름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갈매기의 죽음

영국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해안지방을 지나가다가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바다는 청정했으며 갈매기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기에 분명 예사죽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죽음의 원인을 물어보았다.그러자 그가 대답해 주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과자와 사탕 등 맛있는 먹이를 던져줍니다.그것은 갈매기들에겐 해로운 것이지요.갈매기들이 이 맛있는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답니다.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바닷속의 많은 먹이를 놔두고 여행객들이 음식만을 기다리다 굶어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들은 때론 너무 달콤하여 우리 몸과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양식들을 잊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남태평양의 섬들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고 합니다. 나무에 줄로 묶어 놓은 여러 개의 야자열매에 작은 구멍을 내고 땅콩을 잔뜩 넣어 두고 멀리 숨어서 잠시 기다리면 원숭이들이 땅콩 냄새를 맡고 하나 둘 몰려옵니다. 주위를 살피다가 야자열매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땅콩을 한 줌 콱 쥡니다. 그 때 사람이 줄을 들고 나타나서는 원숭이를 잡는 것인데, 원숭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만 할 뿐 도망을 가지 못 합니다.왜냐하면 야자열매에서 손이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콩을 놓아 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땅콩을 포기해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이 원숭이들은 생각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포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들은 한 줌의 땅콩과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맞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포기는 성숙을 향한 발판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우리 문화에서 '포기'라는 말은 '패배' 혹은 '좌절'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때 우울한 감정을 느낍니다.그러나 '포기'라는 단어에 대한 이런 부정적 생각들은 '포기'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극히 단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원숭이 잡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포기야말로 우리의 삶이 성숙과 성장, 자유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포기는 우울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새 것을 얻기 위해 옛 것을 버리는 현명한 태도입니다.우리는 유아 시절의 의존심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성숙한 성인으로써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우리는 또 청소년기의 책임 없는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책임성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우리는 외모와 인기,멋진 몸매와 같은 청년 시절의 관심거리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진지하게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는 불멸에 대한 환상을 버림으로써 죽음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인생의 진실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미련을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서 더욱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고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함으로써만이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우리는 세상을 보는 나만의 안경을 고집하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이렇듯 포기란 우리의 삶을 더욱 성숙하고 더욱 의미 있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엔진의 역할을 합니다.포기하지 않는 삶은 우리를 영원히 과거와 미련과 자기연민의 감옥에 묶어 두는 것입니다.

피터팬 증후군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우리는 '집착'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집착이라는 접착제로 삶이 과거에 고정되어 버린 사람들을 가리켜 '피터팬 증후군' 환자라고 부릅니다. 미국 심리학자 댄 카일러 박사가 1983년 '피터팬 신드롬' 이란 저서를 발표하면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책임 있는 자리로 나가기 싫어하는 '무책임',이기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지나친 자기애',유아기적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왕자 병', '마마보이' 등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포기해야만 할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만큼 안쓰럽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포기란 삶의 태도는 영적 세계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격으로 포기를 종종 너무나 중요하게 거론하셨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런 욕심은  집착에서 옵니다.불행의 모든 원인은 집착이 아닐까 합니다.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지난 것이든 앞으로 일어날 그 무엇이든,또 보이는 물질이든 보이지 않는 정신이든 그 무엇에 붙잡혀 있는 것,집착은 정말 금물입니다.삶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지 고정된 사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변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저녁노을은 영원할 수 없고 금방 내 어둠이 내려옵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착합니다.아침햇살에 비친 영롱한 거미줄에 집착하고,노랗게 물든 저녁노을에 고정됩니다.그래서 한낮에 햇빛에 빛나는 녹색을 보지 못하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지 못합니다.집착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정말 쪼잔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집착은 무지의 산물입니다.

집착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지혜중의 지혜입니다.십자가 경험,그것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입니다.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 위에 역사하십니다.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선교 열매는 희생에서 나온다. 주변을 감동시키는 것은 힘의 과시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니다.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힘과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희생입니다.

포기가 응답이다

포기는 응답이며 회복의 은혜입니다.포기는 응답과 치료를 가속화시킵니다.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헤일 수 없는 축복과 은혜 속에 살지만,또한 예수님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지금,왜,그 렇게 갈등하고 힘들어하며 속상해 하는 것은 포기하지 못하며,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침묵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막힘을 통하여 여시며 아픔을 통하여 성숙케 하시며 포기를 통하여 응답하십니다.축복이 신앙의 꽃이라면,포기는 신앙의 열매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매보다,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축복을 선호합니다.그러나 생명은 꽃에 있는 것이 아니라,열매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는 포기의 쓴 열매들을 통하여 생명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고 진짜 '명품신앙인'으로 성화 되는 것입니다.신앙의 출발은 소유와 누림이지만,신앙의 마지막은 포기와 내려놓음입니다.그러므로 초보 신앙인들은,믿음 때문에 얻은 것이 많다고 간증하지만,신앙이 성숙하신 분들은, 예수님 때문에 버리고 포기한 흔적이 많다고 간증합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함을 아십니다.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것을 내놓으라 하십니다.무엇을 건드리시면 우리가 꼼짝없이 하나님께로 나올 것을 아십니다.어떤 치부를 드러내시면 우리가 겸손하게 설 수 있는지도 아십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죽 잘 아시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혹,예수 안 믿을까 봐.혹,지옥 갈까 봐.혹,교만하여 하나님 무시할까 봐.혹,기도 없이 내 힘으로 살까 봐.종교인으로 머물까 봐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이끌어 내시려 하십니다.그 방법 외에는 어쩔 수 없는 극약처방으로 몰고 가십니다.그러나 지나고 보면,그것이 은혜입니다. 때는 없었으면 했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있었던 것들이 감사와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아브라함에게는 독자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물질도, 건강도,자신의 생명도 포기할 수 있었으나 귀한 자식 이삭은 내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하나님은 그 독자를 포기하라 하십니다.모세에게는 애굽의 궁궐을 포기하라 하셨고 마리아에게는 옥합에 든 향유만은 꼭 움켜쥐고 살고 싶었는데,그것을 내어 놓으라 하십니다.우리에게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옥합이 있고,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독자 이삭이 있고,더 오래 누리고 싶은 애굽의 궁궐이 있습니다.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포기하라고 재촉하십니다.포기하는 것이 쉽다면 무슨 연단이 될까요?누구나 포기할 수 있다면 그 포기가 무슨 축복이 될까요?

연단중에 마지막 연단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애정포기'이고 또 하나는,끝을 모르는 '기다림'입니다.하나님은, 이 두 가지 훈련과목을 통하여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 만들고, 곡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무정할 정도로 우리를 다그치시고 몰아 부치십니다.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주님만이 우리의 힘이시며,주님만이 우리가 붙잡아야할 끈이라 하십니다.그때마다 우리는,처절하게 저항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도망가는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우리가 포기할 수 없다고 저항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가십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그냥 포기한 분들 보다, 고통스러운 매를 맞고 포기한 분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우리는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포기 못하면 응답도 침묵하고,눈도 어둡고 귀도 막힙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기도하면, 눈도 열리고 귀도 뚫립니다.왜 응답이 더디 오는가요? 포기하지 않고 구하기 때문이고 움켜쥐고 구하기 때문이고 날 위해 구하기 때문입니다.

왜 늘 목마르고 답답한가요?하나님의 포기요구와 나의 탐욕과의 충돌현상 때문입니다.포기는 높은 수준의 영성입니다.사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포기를 통한 성숙과 자아의 죽음입니다.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불같은 시험과 고난을 주시는 것은 너의 옛사람,편견,고집, 자존심, 고정관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은혜로 살라고 하시는 싸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포기하면 열린다/

하나님의 길은 포기하면 열리고 하나님의 치유는 포기하면 시작됩니다.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하고 항복할 때 비로소 일하십니다.하나님이 포기하라고 하심은 우리를 망하게 하심이 아니라 흥하게 하심이며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더 주기 위함이며,우리를 어렵게 하심이 아니라,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부자이면서도 물질을 포기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이지만,가난해도 물질의 종으로 산다면,가난은 옳은 가난이 아닙니다.

포기는 어려운 것이며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은혜로는 가능합니다.더 좋은 것이 생기면,덜 좋은 것은 포기하듯이 주님이 더 좋으면 덜 좋은 세상 것은,무엇이라도 저절로 포기하게 됩니다.더 큰 은혜,더 깊은 은혜 받으면,포기 안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그러므로 포기하려 노력하지 마시고 포기되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포기의 현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품고,포기와의 전쟁을 위하여 성소로 나아가 엎드립시다. 리에게 아무리 크고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 앞에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문제는 내 자신입니다.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엎드리지 못하고 매달리지 못하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은, 우리가 엎드리는 시간이며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타이밍은,내가 포기하는 순간임을 놓치고 살면 안 될 것입니다.‘내’가 ‘나’이기를 포기할 때/‘내’가 ‘나’이기를 포기할 때, 나님은 ‘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시행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나’이기를 고집할 때는 하나님께서 일 하실 수가 없습니다.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그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었습니다.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말입니다.

하나님은,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기의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은,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내가 나를 포기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하고 붙잡는 끈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추적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낙타 무릎

낙타가 유별스럽게 눈썹이 긴 이유는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끝도 없는 사막에 모래바람이 붑니다.모래 언덕에서 뜨거운 모래바람이 앞을 가릴 때,오직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낙타뿐입니다.낙타는 커다란 혹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유도 역시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가도 가도 목이 타는 사막에서 갈증을 이기는 길은 자신 속에 물을 저장에 두는 길뿐입니다.낙타는 무릎에 굳은살이 유독 눈에 띄게 두껍습니다.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 닥칠 때에는 낙타라고 해도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그때에는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그 모래 폭풍이 지나가기를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을 흔히 ‘낙타 무릎’이라고 부릅니다.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많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무릎에 굳은살이 두껍게 생긴 덕분입니다.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고난에서는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그들은 다만 인생의 깊은 고뇌 속에서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지금의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의 삶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할 때 무엇이라고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앞에서 진실한 신뢰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포기하는 곳에 힘이 있습니다.하나님은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아브라함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롯이었고 좋은 땅이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롯에게 주자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집착하고 있는 것을 버리기 전까지 더 좋은 것이 보이지 않지만 집착을 버리면 더 크고 넓은 세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뜻을 집착하는 한 넓은 세계, 은 생각,넓은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내 생각,내 집념 ,내 욕심 포기할 때 더 넓은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1절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였습니다.장성하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누리기 위해서는 떠날 줄 알아야 하며 더 풍성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합니다.옛 정욕,옛 습관,옛 생각을 버려야만 내 생각이 충만해지고,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내가 양보해야 하고,내가 손해를 보아주어야 하고, 겸손히 섬겨야 이웃이 생기도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이 따르고 동료가 생깁니다.더 넓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한 알의 밀알처럼 내가 죽고,내 것을 포기하고,내 욕심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고,주고,섬길 때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버리고,양보하고,포기하며 이웃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땅을 정복하는 믿음의 첫 번째 법칙입니다.

포기하는 곳에 힘이 있습니다.섬길 때 풍성함이 있습니다.내 것을 웅크리고,내 것을 주장하고,  것을 욕심 부릴 때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지만 내 것을 포기하고 내 것을 줄 때, 내 것으로 사랑할 때 거기에 정복하는 위대한 힘이 나옵니다.포기하고 주고 사랑하며 섬길 때 거기에 새로운 세상,영원한 세상,넓은 세상,행복의 세상이 다가올 것입니다.포기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신앙생활의 출발이 소유와 누림에 있다면 신앙생활의 완성은 포기와 거절함에 있습니다. 우리의 갈등과 상처,목마름과 속상함의 원인도 포기하지 못함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루도 기대와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하나님에 대하여,사람에 대하여,수많은 것들을 요구하며 기대합니다.그 요구와 기대에 대하여 거절 당할 때 우리는 쉽게 모래성과 같이 무너지게 됩니다.그러나,예수님을 깊이 믿다 보면 인생은 나의 기대와 요구대로만 되어지지 않음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듯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우리는 살고 싶은데,성경은 죽으라고 요구하며 우리는 소유하고 싶은데,성경은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누리고 싶은데,성경은 누림조차도 포기하라고 가르칩니다.예수는 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죽으라고 믿는 것인데 죽어야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더 많이 소유하고 가지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버리고 포기하려고 믿는 것입니다.포기하고 버린 만큼 내 것으로 하늘에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나의 욕심과 소원을 채우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비우려고 믿는 것입니다.하나도 남김없이 비워야 신령한 것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식은 세상식과 많이 다릅니다.세상은 강한 자가 큰 자이지만 성경은 약한 자가 강한 자라고 말하며 세상은 많이 소유한자를 부자라 부르지만 성경은 많이 비우고 포기한 자를 부자라 말합니다.주님의 영성은,포기의 영성이셨습니다.하늘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고,예루살렘을 포기하시고 변방으로 가셨고 호텔을 포기하시고 말구유에 나셨습니다.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포기에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영광을 포기하고 광야를 택하였습니다. 

바울은 요즈음 말로 '잘 나가던 분'이었으나, 주와 복음을 위하여 전부를 포기했고,그리스도 한 분을 소유했는데. 바울의 통장에는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이었습니다.바울에게 있어서 주와 복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의 전부였고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소유함의 크기가 영성의 크기가 아니라,버림의 흔적이 영성의 크기일 것입니다.예수 믿고 난 후에 받은 복이 많은가요?아니면 버리고 포기한 흔적이 많은가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쉽고 넓은 길인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은 그리 쉽은 것이 아닙니다.내가 포기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도,십자가에 매달릴 수도 더군다나 십자가에서 죽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 하셨습니다.우리는 언제나 갈등합니다.예수는 잘 믿고 싶은데, 자가는 벗어버리고 싶은 갈등입니다.우리에게 응답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음과 더딤은 십자가를 벗으려 하기 때문이지 모릅니다.나를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믿기는 쉽습니다.그러나 나를 포기하고 예수를 믿는 일은 죽을 만큼 힘이 듭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포기의 영성이었습니다.독자를 바치라 하심은, 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를 물으심이었습니다.

포기의 test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셨습니다.포기하는 곳에서 우리는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기막힌 포기 속에서 우리는 기막힌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날 위해 오신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과 감동은 우리도 주님처럼 포기하며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세상과 이웃들에 대하여 요구하고 기대하던 마음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나의 안락함과 편안함, 나를 위한 여러 종류의 혜택과 누림 들을 주를 위하여 포기함이 마땅치 않을까요? 

'포기하는 날'로 정하고 포기함으로 얻은 시간,물질,건강,재능,지식들을 주와 이웃들을 위하여 불태웠으면 좋겠습니다.누가 나를 힘들게 하고 누구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있는가?누가 마음에 안 드는가?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가?나를 섬겨주고, 겨주기를 바라는가?나만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가?전화 한 통 없다고,격려의 말 없다고,위로하지 않았다고,내 힘든 것 알아주지 않았다고 속이 많이 상해 있는가요?남편 대우 안 해 준다고,아내 수고 몰라준다고 제때에 밥 안 챙겨 준다고.선물은 안 사오고 아이들것만 사왔다고,아내와 남편에 대하여 기친구에 대하여 기대하는가요?기력을 잃었는가요?전화 한 통 없다고 자식에 대하여 기대하는가?속히 포기하고 넉넉히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기다려주고 주님께만 아뢰시기 바랍니다.그 사람이 밉다고,싫다고,그사람때문에 속상하다고 통곡하고 싶을 때 포기하느라 힘이 들고 죽겠는가?오죽하면 병이 날까요?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더 많이 포기함으로 죽으라는 것입니다.그사람이 나에게 그럴 수 있어?목사님이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도들이 나에게 그럴 수 있어?이런 저런 이유들로 속 끓여야 하는가?포기하시기 바랍니다.충분히 그럴 수 있고,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으로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이해하겠는가요?부질없는 일입니다.속끓임과 분함에 십일조의 시간을 기도에 투자하시기 바랍니다.기도 없는 속상함의 10년보다,기도하는 10분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전부를 포기했던 바울 사도를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고 계셨습니다.이보다 더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가능한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훈련을 하고  포기되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포기하는은혜만이 최악의 삶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도록 도와줄 것입니다.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 것은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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