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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을 끼치노라 (요 14: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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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끼치노라 (요 14:25-31)


테레사 수녀가 인도 방갈로르의 한 신학교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 후 한 수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님, 당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공짜로 주어서 그들을 버릇없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중이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숨을 죽인 채 쳐다보았습니다. 
테레사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을 버릇없게 만드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안경을 쓰지 않고도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짜로 시력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주신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이 내야 하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대기에 있는 산소를 공짜로 주셨기에 우리는 아무 값도 치르지 않고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가 네 시간 일한다면 두 시간 동안 햇빛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테레사의 대답이 떨어지자 질문을 던진 수녀는 물론이고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야말로 무수한 은총의 선물들을 무상으로 받고 또 받는, 버릇없는 이들이 아닙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도 이왕이면 가장 좋은 것으로 선물하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고 있습니까? 오히려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보다는 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꾸미려고 하고 가꾸려고 하고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아바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가 우리들을 위해서 보내 주신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생명 이상으로 귀한 선물을 또한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모든 은혜와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성령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약속 가운데 가장 귀한 약속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을 잘 설명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무어라고 했습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은 가장 확실하게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많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외에는 언제든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육체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모두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길을 이제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떠나가지만 하나님께서 내 대신 나와 똑같은 그런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보혜사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말 그대로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속에 계실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옷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이 이제 우리 심령 속에 함께 계시도록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실 때는 누구나가 다 주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영이신 성령께서 이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주를 믿는 자들이 다 주와 함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육체를 빚어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령이 된 것처럼 이제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로 하여금 생령 곧 산 영이 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3장이나 6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너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 성전이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인데 같은 집이라도 일반인들이 사는 집은 집 가(家)를 붙여서 부릅니다. 하지만 벼슬을 하는 사람의 집에는 집 관(館)자를 붙여서 부릅니다. 그래서 총리 공관이다 외무부 장관 공관이다 그런 식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임금이 사는 집은 궁 또는 전 그런 말로 부릅니다. 그러니까 성전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거룩하신 임금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할 때 임금 되신 성령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들어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왕이신 하나님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즉 우리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집이라고 했을 때 잘못하게 되면 빈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한 귀신이 집에서 나갔는데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마땅히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있던 집으로 다시 돌아와 봤더니 그 동안에 깨끗이 수리를 했습니다. 누가 사는가 들여다보았더니 아무도 살지 않아요. 빈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귀신이 자기보다 악한 귀신을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래 빈 집의 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해도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빈집으로 그냥 놔두면 금방 집이 어수선해지고 썰렁해지고 망가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초가집이라고 해도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은 비록 낡았다고 해도 온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도 오래 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이 빚으실 때처럼 우리 안에 생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시는 생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령이 되지만 그 생기가 사라지면 죽은 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빈집은 누가 주인 노릇을 합니까? 노숙자와 같은 사람들이 들어와있으면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런 집은 결국 누구 차지냐 하면 온갖 짐승들이 차지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결과 얼마 안 있어 집은 여기저기 허물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소위 흉가라고 하는 말도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면 바로 악한 영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그리고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고 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서 온갖 죽음의 칠을 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형편이 어찌 되겠습니까? 잠시는 멋진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뻔합니다. 보세요 도둑이 언제 집에 들어옵니까? 주인이 없을 때에요. 물론 강도는 주인이 있어도 들어옵니다. 그런데 든든한 파수꾼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강도라도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냥 자리 차지 하고 앉아서 그저 낮잠이나 주무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믿음 안에 든든히 서는 자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영접하는 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지켜주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치 별장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별장은 집은 집인데 경치 좋은 곳에다가 집을 딱 지어 놨는데 주인이 거기 항상 머물러서 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주하지 않습니다. 그저 때에 따라 식구들 데리고 와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는 다시 떠나 버립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들어가 살다가 어떤 때는 떠나가 버리는 집 그것이 바로 별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이렇듯 별장처럼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좋을 때는 열심을 내다가 조금만 힘들고 하면 마치 성령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낙심하고 좌절하고 근심하며 염려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란 성령님이 주인이 되어 항상 머물러 계셔야 되는데 다시 말해서 상주를 해야 되는데 상주를 한다고 해도 그게 다 좋은 집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감옥 같은 곳은 상주를 한다고 해도 몇 년 동안 꼼짝을 못하고 그 안에 들어가 살지만 거기서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하지만 결코 그곳이 좋은 곳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집으로 비유한다고 할 때 빈집이 되면 마귀가 들끓는 곳이 되기 쉽습니다. 누군가는 주인으로 모셔야 되는데 주인이 있다고는 해도 입주 주인이 들어와 산다고는 해도 별장과 같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런 집이 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상주를 하되 마음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곳 다시 말해서 안주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지 감옥과 같은 곳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그것이 가능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나는 마귀의 이끌림에 놀아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도록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우리 마음에 모시어 들여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주 성령님이 들어오신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항 머물러 계시되 마음 편히 내 안에 계실 수 있도록 항상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뜻대로 즉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참된 성전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할 때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하신 약속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더불어 계십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ㅋ데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보혜사(保惠師)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이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말인데 우리말에 적당한 말이 없으니까 한문 세 글자를 모아서 이 말을 붙였습니다. 보존할 보(保)자, 은혜 혜(惠)자, 스승 사(師)자. 글자 그대로 한다면 은혜로 보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도 되고 또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잃지 않도록 보존시켜 주는 분이다 그런 말도 됩니다. 그런데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법정에서 쓰는 용어로서 대언자 즉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는 대변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변호사라는 말이죠. 

하지만 변호사는 내 대신 변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대신해 준단 말에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대신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옆에 항상 계신 분이시오 내 곁에 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 나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며 더 나가서 내가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들을 또한 생각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내 옆에 계시면서 보호해 주시고 항상 인도해 주시며 가르쳐 주시죠. 또 그 전에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내 곁에서 내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파라클레토스가 갖고 있는 뜻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이를 나타내려니까 파라클레토스를 보혜사라 이렇게 번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도록 나는 성령과 동행하며 同事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다 성령과 동행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하게 되면 처음에는 잘 하는 것 같으나 곧 힘이 빠지고 지쳐 버리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권능 즉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게 힘이 되어 주시고 나를 지켜 주시며 나를 인도해 주시게 되면 우리에게 능력이 더해집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허락하시는 능력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고 더 나가서 힘차게 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내 안에 언제든지 내주하시도록 우리가 살아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은 말씀의 영이요 주의 영이 되시기 까닭에 우리는 먼저 성령님이 내 안에 풍성하게 거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해야 됩니다. 즉 회개함으로 우리 마음을 깨끗케 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내 안에 편히 계시도록 만들어 드려야 하고 이 성령이 힘차게 역사하시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내 심령을 채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내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성령은 내 안에 편히 계셔 나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내 안에 거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를 힘차게 인도하시도록 그렇게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찬양의 사람 감사의 사람 되심으로 주께서 내게 선물로 주시는 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성령님이 허락하시는 능력 가운데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게 되면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흔히 영안이라고 하죠? 영의 눈이 열립니다. 내 마음의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요 따라서 그 앞에 내 모든 죄를 다 자백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 우리 안에 자리 잡았던 모든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모든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첫째로 평안입니다. 
우리 몸은 며칠을 굶게 되면 속이 다 텅 비게 되고요 힘이 다 쭉 빠집니다. 아무리 힘을 내어보려고 해도 잘 안되죠. 몸은 으슬으슬 더 춥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음식을 먹게 되면 속에서부터 힘이 흘러넘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때를 따라 속을 채워야 됩니다. 

우리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시도록 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가 하면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즉 평안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즉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안은 이 세상의 평안과는 다릅니다. 

이 평안을 가리켜서 전인적인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려면 한두 번만 평안해서는 평안이 안 됩니다. 전인적인 평안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뭘 말하는가 하면은 몸이 평안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만 평안하다고 평안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또한 평안해야 됩니다. 또 심령의 평안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다 함께 평안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밀려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피곤하다고 해서 누워서 쉬기만 한다고 평안해지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몸은 평안한지 몰라도 할 일이 있으니 마음이 평안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 또한 우리 심령이 평안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몸도 건강해야 되고 마음도 편해야 하며 우리 심령도 평안할 때 거기에 참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래야 우리 영과 혼과 몸이 다 평안하고 이 전인적인 평안이 우리에게 있을 때만 참된 평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평안하다는 것도 사지백체가 다 평안해야 그 몸이 평안한 것처럼 몸과 마음과 심령이 다 평안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부분적인 평안만 찾습니다. 귀만 즐겁게 해 주는 것 눈만 즐겁게 해주는 것 몸만 즐겁게 해 주는 것, 마음만 즐겁게 해 주는 것을 찾지만 주님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전반적인 삶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평안인 것이요 또한 한 걸음 더 나가서 이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영구적인 평안입니다. 이 세상의 평안은 잠시는 평안한 듯 하다가도 잠시 후면 또 불편해 집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늘나라에 이르도록 우리가 누리는 평안입니다. 어제는 좋다가 오늘은 나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이르기 까지 아니 하늘나라에 가서도 여전히 즐겁고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살면서부터 하늘나라를 누리며 사는 것이 영구적인 평안입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에게 있을 때 비록 남들처럼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남들처럼 내 세울 것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심령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이 평안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평안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홉킨스(Henry L. Hopkins)씨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는데, 그는 1945년의 얄타 회담에 참석했던 사람입니다. 얄타 회담에는 당시 세계의 지도자들인 처칠, 스탈린, 루즈벨트가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홉킨스 씨는 자기 아들에게 기념으로 주기 위하여 소련의 화폐인 1루불짜리 지폐에다 세 지도자의 싸인을 모두 받았습니다. 그 당시 1루블은 미국 돈으로 약 10달러의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1981년에 이 1루불 짜리 액면의 지폐가, 미네소타 주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5천 달러에 팔려갔습니다. 그것은 불과 미국 돈으로 10달러의 가치밖에 없는 돈이었지만, 세계의 지도자 세 사람의 싸인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무려 500배 이상으로 뛰어버린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어떤 인간의 싸인으로 비교할 수 없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도장이 꽉 찍혀 있다는 사실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성령임이 내 안에 계시는 바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라 불립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것도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안하고 즐겁습니다. 

비록 당장 망해서 가진 것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합니다. 이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삶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날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이 평안함 그래서 나만 평안한 것이 아니라 이 기쁨과 이 즐거움과 이 평안을 이웃과 나누고자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도 전하게 되는 것이요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삶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도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베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100배 60배 30배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순간순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의 열매들이 맺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화평 즉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감사하며 두 렙돈을 주님께 드렸던 과부처럼 우리의 마음을 담아 주님께 감사함으로 물질로도 하나님 앞에 풍요함을 누리는 성도들이요 흩어 구제하는 일에 힘씀으로 더욱 부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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