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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머니같은 교회 (마 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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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같은 교회 (마 16:13-19)

거룩한 공교회를 믿으며

1. 여러분은 교회를 믿습니까? 

참, 뜬금없게 들리지요? 이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기도 하지만, 지난 보름 동안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주일마다 교회를 찾는 혹은 가끔이라도 교회를 찾는 분들이라면 늘 씨름해야 할 질문입니다. 

이 질문으로서 저는 “교회를 신뢰하는가?”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질문도 매우 중요합니다. 2012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Association of Korean Christian Pastors)에서 전문가에 의뢰하여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전체 응답자의 18.9 퍼센트만이 교회를 신뢰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3대 종교 즉 천주교, 불교, 기독교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민교회에 대한 신뢰도 조사를 하면 이것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오리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교회를 신뢰하는가?”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가?”라는 질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많은 질문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가? 나는 교회가 나 자신의 삶에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는가? 참된 신을 만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교회는 꼭 필요한 존재인가?

지난 주, KAL의 부기장이라는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 오셨습니다. 금요일에 와싱톤으로 오는 비행기를 책임 맡게 되어 이번 주말에 이 지역에서 머물고 주일 오후 비행기를 운항하게 되어 있어서, 이번 주일에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머무는 호텔로부터 교회까지 교통편에 대해 문의해 오셨습니다. 저는 예배를 향한 그분의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일에 민첩한 교우님에게 그분의 교통편을 부탁했습니다. 

열네 시간 동안의 비행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겹습니까? 갖다 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졸리면 자고, 심심하면 영화를 보면서 와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파김치가 됩니다. 그러니 그 시간 내내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비행사와 승무원들의 피로감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주일 아침에 한 잠이라도 더 자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메일을 보낸 것입니다. 

교회를 믿지 않으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삶에 매우 중요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 모두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사람마다 교회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교회가 중요하기에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교회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배당 건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히브리어로 ‘카할’(kahal)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합니다. ‘카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고, ‘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함께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교회에 간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교회로 모인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렇게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에 이름을 붙이면 와싱톤한인교회가 되고, 새빛교회가 되며, 애쉬번한인교회가 되고, 성마가교회가 됩니다. 각각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같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교회에 속했든지 서로를 한 교회에 속한 형제 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 연합감리교회는 아주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연대주의'(connectionalism)를 믿습니다. '연대주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자는 것이 연합감리교회의 주요 강조점 중 하나입니다. 교회와 교파의 구분을 초월하여 함께 손 잡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자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오늘 우리가 묵상하려는 고백 안에 바로 이 '연대주의'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에 대해 고백한 다음, 곧바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I believe the holy catholic church.

과거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

‘공교회’ 혹은 ‘공회’라는 말은 영어로 'catholic church'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catholic'이라는 말은 로마 가톨릭 교회 즉 천주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 ‘카톨리코스’(katholikos)는 ‘보편적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교회’ 혹은 ‘공회’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그 뜻을 금방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직역(verbatim translation)보다는 의역(paraphrasing)이 필요합니다. 이 고백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낳으셨다고 믿습니다.
I believe that the Triune God gave birth to the church.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모두 거룩하다고 믿습니다.
I believe that all churches believing in the Triune God are holy.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모두 하나라고 믿습니다.
I believe that all churches believing in the Triune God are one.

때로, “개신교에는 왜 이렇게 교파(denomination)가 많으냐?”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를 놓고 하는 질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교파들은 개혁과 갱신의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하나의 교단이 변질되거나 타락하면, 원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모체 교단이 그 도전을 거부하면 새로운 교파가 생깁니다. 천주교회를 개혁하려다가 개신교회가 탄생했고,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려다가 감리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교파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파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많은 것도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들이 서로 적대시하고 갈라져 싸운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부디, 와싱톤한인교회 교인들은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 사람들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교파와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형제자매로서의 사랑을 건넬 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의 정신이고, 그것이 연합감리교회의 특징인 '연대주의'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교회를 믿습니까? 
왜 이 교회가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합니까? 왜 우리는 교회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까? 

교회는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창조 사역(ministry of creation)과 구원 사역(ministry of salvation)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난 결과물이 교회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당신의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을 지속해 나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해 고백한 다음, 곧바로 교회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먼저 믿어야 할 것이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우연한 역사적 산물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창조해 낸 조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교회를 믿어야 옳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3) 제자들은 앞 서거니 뒤 서거니 대답합니다. 잠시 후, 예수께서는 다시금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5) 그 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6:16)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대답에 대해 매우 만족해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6:17-19)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 교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예배당도 사람들이 지었고, 교회 제도 역시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가 되도록 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교회로 모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조직, 어느 단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교회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 18:20)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이유는 그 안에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아무리 거룩해 보이는 행동을 한다 해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으로도 교회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금 영적인 존재로 돌아가신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우리는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라는 뜻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영예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팔이 되고 발이 되고 눈이 되고 입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것임을 알기에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교회로 모여 주님의 지체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압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믿습니다. 교회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는 것이 우리의 생애를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나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나 자신을 헌신합니다. 


4. 아,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모든 교회들은 ‘거룩하다’는 말이 이론적으로는 그런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거룩해 보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막상 교회로 모여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과연 이것이 주님의 몸인가? 과연 이것이 거룩한 교회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세 개의 고등 종교 중에서 가장 낮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교회의 신뢰도가 왜 이렇게 추락했습니까? 거룩한 모양은 있지만 실제로는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는 거룩하지 않은 모습들을 끊임없이 노출시켜 왔습니다. 교권의 세습은 이제 ‘그러려니’ 할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교회,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의 재정 비리 문제도 끊임없이 터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성 추문에, 최근에는 대형 교회 목회자의 학위 논문 표절까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과연 누가 “교회는 거룩하다”는 말을 곧이 듣겠습니까?

한국교회도 그렇고, 이민교회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든 교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깊이 회개하며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 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쇠퇴하고 기독교인의 수가 감소하는 현재의 사태를 되돌리는 방법은 교회마다 본질을 되찾고 거룩성을 되찾는 데 있습니다. 거룩성을 찾지 못하면, 교회가 커갈수록 더 큰 문제만을 만들어냅니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는 커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습니다.

제가 몇몇 뜻 있는 분들과 함께 '목회멘토링사역원'(Pastoral Mentoring Ministries)을 시작하여 젊은 목회자들을 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행하는 '목회자 학교'(School for Pastoral Leadership)를 성심껏 섬기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 두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목회자들과 씨름하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을 위해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목회자들을 위한 컨퍼런스가 많지만 대부분 교회 성장을 위한 기술을 파는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멘토링 사역과 목회자 학교에 저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쏟아 붓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 사역에 대해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을 구합니다. 이미 이 사역의 중요성을 알아채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재정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는 교우 여러분 모두가 이 사역을 마음에 품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또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사역, 교우 모두의 사역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멘토링 컨퍼런스에 멘토로 참가한 어느 선배 목사님이 그러십니다. 20년 전에 홍정길 목사님이 미국에서 코스타(KOSTA)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처음에는 아주 가망이 없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역에 가치가 있음을 확신한 홍목사님이 10년 넘게 우직하게 그 사역을 밀고 나가셨다고 합니다. 강사로 초청받지 않았을 때도 참가하여 뒤에서 궂은 일을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세계 전역에서 젊은이들을 회복시키는 거룩한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처럼, 목회자를 위한 멘토링 사역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우직하게, 꾸준히, 바보스러울 정도로 버틸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그 역할을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속으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저를 그렇게 믿어주시는 선배 목사님에게 감사했습니다. 둘째, 제가 그 짐을 감당하려면 제가 섬기는 교우님들의 전적인 이해와 기도와 헌신과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역을 섬기기 위해 교회를 비울 때마다 제 마음에 큰 부담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하자면 바깥 일을 하지 않고 교회 안에만 있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저에게 주신 소명이 있다면 불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우들께서 이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이 사역을 위해 제가 교회를 비우는 것에 대해 기쁘게 여겨 주시며, 제가 교회를 비울 때 저 열심히 모이고 헌신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를 방치하고 바깥으로 나돌아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회 요청이 끊임없이 오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있습니다. 제가 꼭 섬겨야 할 사역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멘토링 사역과 목회자 학교를 통해 젊은 목회자들과 씨름하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해서, 제가 저 스스로를 완전한 목사로 알고 있거나 혹은 우리 교회가 완전한 교회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목사로서 부족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부족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도, 그리고 우리 교회의 지난 역사도 한 가지 점에서는 분명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관된 초점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저 자신이 변질되고 타락하는 것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5.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나은 교회가 있고 비교적 못한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때로, 사도 시대(apostolic period)의 교회는 완전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목회했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바울 사도가 목회했던 고린도 교회에도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기 저기서 ‘좋은 교회’에 대한 소문이 있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예상하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parable of wheat and tare)가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을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를 교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종이 주인에게 말합니다. 밭에 나가서 가라지를 모두 뽑아버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종들을 말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마 13:29-30)

이 말씀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마치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주님께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도 있고,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으며, 이제 막 거듭 난 사람도 있고, 믿을까 말까 탐색하는 사람도 있고, 믿을 마음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악한 마음을 품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는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변화되고 성화(sanctify)되어 가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보는 문구가 있습니다. 

We are not perfect, just forgiven.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용서 받았을 뿐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잘 표현한 문구입니다. 하지만 이 말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I am not what I ought to be, but I am no longer what I used to be.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완전한 공동체일 수 없습니다. 겉으로 평안해 보이는 교회라도 끊임없이 소소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는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완전’이 아니라 ‘구별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고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별되었으며 주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기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완전하지 않아도, 때로는 이런 저런 문제를 겪어도, 그래도 교회는 거룩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어거스틴(Augustine)이 교회에 대해 한 말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창녀다. 하지만 그 여인이 내 어머니다. 
The church is a whore, but she is my mother.

충격적이지요? 당시 교회에 얼마나 문제가 많았으면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어거스틴이 주교나 되니 이렇게 말해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지, 제가 이렇게 말했다면 당장 불경죄로 고발 당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교회의 본질을 잘 표현해 준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안에 품어야 할 명언입니다. 

자기 어머니가 어떤 이유로든 성 매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자식은 참으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모른 체 하고 싶기도 할 것이고, 영영 절연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 없을 때의 생각입니다. 철이 든 사람이라면,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사랑하고 끝까지 돌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뼈가 으스러지더라도 어머니를 정숙한 여인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그래야 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현숙한 여인 같은 교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뉴스 매체가 좋지 않은 소식만 전해서 그렇지, 거룩하고 성결한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성결한 교회를 일구기 위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신실한 목회자들 그리고 신실한 성도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멘토링 컨퍼런스와 목회자 학교 사역을 하면서 그 같은 열심을 가진 목회자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볼 때 와싱톤한인교회는 얼마나 현숙한 여인입니까? 부디, 환갑이 넘었어도 여전히 매력 있고 기품 있는 여인 같다고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한국 방문 때 우리 교회를 거쳐가신 분들이 약 50명 정도 모였는데,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이 “와싱톤한인교회가 너무 그립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와싱톤한인교회를 기준으로 교회를 찾다 보니 몇 개월이 지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감사하게 느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믿습니까? 

예, 부디, 모두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취미생활 같은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내키면 나오고 조금 상처 받으면 발길을 끊어도 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정도에게 그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그런 정도의 무게밖에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어머니처럼 귀한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젊고 아리따울 때도 사랑하지만, 늙고 병들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대상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이 마치 어머니께 드리는 것처럼 귀한 헌신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이며 영예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아름답고 매력 있고 기품 있으며 순결한 여인과 같은 교회를 이루는 것이 이 시대에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일인지요! 거룩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가장 값진 헌신이요, 내 가족과 이 세상을 위한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이 귀한 정성으로 우선 와싱톤한인교회를 위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헌신하십시다. 그리고 와싱톤한인교회를 통해 교회 회복의 역사가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함께 섬기십시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은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교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몸의 지체가 된 영광을 알게 하소서.
주님을 믿기에 교회를 믿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기에 교회를 섬기도록
저희를 붙드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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