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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삼하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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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야 기도를’ 13. 6. 16. 영광. com  (삼하 21:1-14)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인 14절 말씀을 보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 고 합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기도하는데,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방금 전 읽은 말씀에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는데 언제 들어주시는가?  ‘그 후에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기도가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응답에 대한 분명한 원칙하나를 말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면 됩니다. 그 이전을 넘어 그 이후로 가면 됩니다.  그 이전 상황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오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면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주신 말씀 잘 기억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어, 부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굉장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21장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연거푸 삼년동안이나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오질 않습니다. 3년이나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1년만 기근이 와도 전국이 난리일텐데... 그 당시 농업사회에서 3년 연이은 기근이라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다윗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없이 3년이 지났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나? 답답해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문제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값으로 지금 너희들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먼저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참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다윗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울이 살아있을 적에 한 행동이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그냥 그 사람만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울의 죄가 장성하여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라는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잊혀진 사건을 되살리실까요?  저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실의 일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아예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사울의 학살이 추억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현실입니다.  둘째로는 사울의 행동이 언약을 어기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일까요? 또 살인죄를 지은 것은 사울이니 사울만 벌하시면 될 것을, 왜 온 백성에게 이런 엄청난 벌을 내리시는 걸까요?   여호수아서 9장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며,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맞서 싸울 생각을 거두고, 다 헤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서 여호수아를 찾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청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꼼꼼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저들에게 속아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을 맺어 주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속은 것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저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400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사람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왜 저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아닌데, 그것도 선지자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은 가증한 것들 아닌가? 내가 왕이 된 이참에 아예 저들을 정리하리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2절) 결국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살지 못하도록 그들을 해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나 할까요? 성경은 이것을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민족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마땅하거늘, 그 맹세를 저버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민족주의적임 감정으로 400년 이상이나 같이 살고 있던 저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맹세를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씨앗입니다. 잘못 심은 씨앗입니다. 나중에 악한 열매로 돌아옵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다 댓가를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는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죄책감도 다 던져버리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감당하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뭡니까?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죄였습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일방적으로 깨트린 하나님의 언약은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년 기근은 죄의 댓가라기 보다는 언약회복의 댓가 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말씀을 더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화근이 되어서는 안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덕분에 내 자식들이 복을 받을지언정, 부모 때문에 화를 입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가장 자녀들에게 안 좋은 것이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자녀 3-4대까지 내려간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을 받거나, 우리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기근의 고통을 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이 다윗의 질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합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은 ‘나의 나라. 내가 다스리는 나라’ 가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가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업입니다.  깻잎 밭, 인삼 밭, 직장이나 사업이 여러분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 기업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소출이 풍성하고 땅을 더 사서 밭과 논이 늘어나고 인정받고 승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정한 기업은 밭이나 논, 직장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부모는 부자인데 자녀는 손을 대는 것마다 망해서 거지가 되는 것과, 부모는 가난한데 자녀는 갈수록 부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복입니까?  자녀가 잘되는 것이 복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자면 ‘나이 들어서 혼자 살겠다. 자녀들 힘들게 안 하겠다’ 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집에서 넓은 방에서 대접 받으면서 호강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아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업인 여러분을 복 주시고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인들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왜냐면 교인들이 목사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잘 되고 형통하고 복 많이 받는 것이 곧 목사가 복 받는 것입니다. 교인이 많아지는 것이 기업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저들은 은과 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배상금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는 말은 이스라엘중에 섞여 사는 자기들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족을 살해한 죄는 금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무참한 학살에 동참했던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할 장소로 “사울의 고향 기브아” 에서 목매달아 죽이되 “여호와 앞에서” 죽이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이로서 모든 죄와 원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 “여호와 앞에서”은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는 것이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인 3년 기근을 진정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언약 위반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언약을 회복하고 3년 기근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의 요구대로 사울 집안의 7명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저들에게 넘겨주었고, 저들은 그 일곱 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입니다. 사울 왕의 언약파기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정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일곱 아들에게 카메라를 비추어 봅니다. 저들 아들들의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들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저는 ‘이어짐’을 느꼈습니다. 누구의 탓 만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의 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어집니다. 사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울은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죽으면 그 책임도 끝납니까?  아니오! 이어집니다. 마치 부모님 사업이 잘되면 자녀가 외국 유학이라도 부담 없이 가지만,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를 이어가는 사울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죄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는 행동이 죄를 끊어버리는 행동입니다. 또 ‘리스바’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포함한 7사람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 왕의 첩 리스바는 바위에 굵은 베를 가져다가 펴고 죽은 7시체들의 곁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그 시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10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언제 부터입니까?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입니까?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입니다. 보리를 베는 봄부터 정상적인 우기인 가을까지는 약 6개월입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낮에는 공중의 새가, 밤에는 들짐승이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리스바는 아들의 시체가 포함된 7사람의 시체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낮에는 중동지방의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저녁에는 광야의 추위와 무서움을 이겨내며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가 무슨 비입니까? 3년 기근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지는 비입니다. 우기를 맞아 내리는 그런 비가 아니라 악인에 대한 형벌을 보시고, 공의의 심판을 보시고, 언약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표시로서 내리는 비입니다.  ‘리스바’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새와 짐승의 위협을 막아내는 정성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시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보기에 흉할 정도로 뼈만 남았을 것이고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바’는 그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저들의 어머니이기도 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어머니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녀는 그냥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시체를 지킨 것 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라고 성경이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스바’의 행동의 핵심은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입니다. 그래서 ‘리스바’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이, 7명의 죽음이 아버지 사울의 죄의 댓가로 인한 징벌적인 죽음이 아니라 언약을 회복하고,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비를 오게 하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러한 ‘리스바’의 행동은 죄를 끊고 축복을 회복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해하게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다 이 ‘리스바’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성도여러분, ‘리스바’의 행동은 또 다른 화해를 불러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윗 왕이,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침내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13-14절)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라고 합니다. 조상의 묘실에 장사합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성벽 위에 내다 걸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되어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뼈를 이장하여 가족의 묘실에 장사지내 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7명의 뼈도 같이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였습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준 것입니다.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아비의 묘에 장사하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도 국장에 참여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왕의 명대로 좇아 행했더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일은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해입니다. 또한 사울 집과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의 화목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백성과 기브온 주민과의 화해도 됩니다. 사울이 자기 조상들과 자기 때문에 죽은 7명의 아들들과의 화목도 됩니다.  나아가서 다윗과 사울 집과의 화목도 됩니다.   사무엘하 21:14 하반절에는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화해를 온전히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문과 가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힌 것을 온전히 풀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벧전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사이에도 막힌 것이 없어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와 막힌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사람사이에 막힌 것이 화해를 통해 허물어 졌을 때 그때 하나님과의 사이에 기도도 열립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그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는 방해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화해를 이루면 응답 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또 태풍이 비껴가고, 수확이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리스바’같은 여인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원수 갚는 일을 잘 합니다. 때론 원수 잘 갚는 사람을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은혜를 갚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시고, 그 은혜 갚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은 하늘의 자비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리스바’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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