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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별과 만남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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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만남 (행 1:6-11)

 
우리 도시인들은 정이 없습니다. 제가 비판할 목적으로 이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바쁜 도시인의 삶에 목가적인 정서는 맞지 않습니다.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서 저녁 식사를 하기도 힘든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오실 때 가족이 다 나와서 인사하는 집은 이상한 집입니다. 오히려 자녀가 집에 올 때 부모가 인사를 합니다. 

몇 년 전 신문을 보니까 어느 아버지가 딸의 컴퓨터 모니터를 창밖으로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지나가던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사연을 알아보니까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딸이 인터넷 하느라고 본체만체한 것에 아빠가 화가 나서 컴퓨터를 창밖으로 집어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매일 모든 집에서 컴퓨터가 날아올 것입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김포공항에 가면 이민 가는 사람의 교회 교인들이 다 배웅하러 따라 나와서 거기서 서로 둥글게 서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부둥켜안고 울고 작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부둥켜안고 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한 번 이민을 가면 다시 볼 기약이 없었지만 요즘은 해외여행을 밥 먹듯 하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에 있는 사람보다 더 자주 봅니다. 그리고 그런 정서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80년대 초에 정부가 해외 교포 청소년들을 초청해서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두 주 동안 한국으로 초청하는 프로그램으로 온 적이 있습니다. 새마을교육 연수원에서 숙박을 하면서 한국 가정도 경험해보라고 이틀 동안 홈스테이를 주선해서 지방의 어느 가정에 가서 이틀을 머물다 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저도 어느 가정집에 배정받아서 그 집 식구들과 저녁도 먹고 하룻밤을 자고 애들과 같이 야구도 하고 돌아왔는데, 여학생들은 단 하룻밤을 지내고 오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헤어질 때 울더라구요. 그 홈스테이 하던 집의 식구들이 울더라구요. 

교포 학생들이 버스타고 떠날 때 호스트 집 여학생들이 정이 들어서 배웅을 하면서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서요, 정이에요. 시골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도시인들은 그 정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하도 정이 없다 보니까 서로 대할 때만 냉정한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성경말씀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쓴 책인데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성경을 읽다보니까 깨달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친구>를 보면 네 명의 친구가 등장하지 않습니까. 준석이라는 친구가 동수라는 친구의 살인교사를 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요. 또 다른 친구 상택이가 면회를 갑니다. 준석이를 면회 가서 ‘니 와 그랬노?’ 왜 유죄를 인정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안 했다고 하면 풀려났을 텐데 왜 유죄를 인정했느냐? 그 자리에서 준석이가 말하기를 ‘내가 건달 아이가? 건달이 쪽팔리게 그럴 수 없는 거 아이가?’ 이 말에 상택이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때 교도관이 ‘시간 됐습니다.’ 하고 준석이를 다시 감방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순간에 상택이가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내가 다시 올게! 내가 또 올게!’라고 인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상황에서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언어중의 하나가 ‘내가 다시 오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기 전에 내가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재림의 교리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오실까? 오신다면 언제 오실까? 어떤 방식으로 오실까?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오리라’고 말씀하시고 떠나가신지 벌써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으셨고 우리가 사는 동안 예수님이 오실 확률보다는 그 전에 우리가 세상을 떠날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믿어야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사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설교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 막연하든가 아니면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더라는 이상한 종말론이 되든가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시한부 종말론이 판을 치느냐? 그렇게라도 해야 재림의 교리가 우리에게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의구심을 그런 사이비 예언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우리 간의 사랑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놓고 떠나가실 때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실 때 무슨 석양의 카우보이처럼 말을 뚜벅뚜벅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지평선을 향하여 떠나가신 것이 아니에요. 20세기 서구문명은 인간의 작별을 그런 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장엄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작별, 떠나는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배웅하는 사람도 손을 흔들지 않는, 기둥 뒤에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그런 식의 작별을 묘사했습니다. ‘나도 너를 잊을 테니 너도 나를 잊어라.’,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슬피~ 운다’ 이런 식의 작별. 

왜 20세기 도시인들이 인간의 이별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 간다!’ 그러면서 냉정하게 제자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안다면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제자들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여러 번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비유에 그 약속이 나옵니다. 달란트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포도원 농부의 비유, 그 이외의 여러 비유에 ‘인자가 다시 오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유뿐만 아니고 직설적으로도 말씀하셨어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라고 말씀하셨고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뿐만이 아니고 모든 서신에 일관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리가 나오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신약성경의 마지막 고백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고백으로 신약성경이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지켜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늘에서 내려오신다는 뜻일 텐데 상상을 초월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어렵게 생각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교리적으로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정든 사람과 이별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동네 어귀까지 나와서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가 메마른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떠나가실 때 왜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시고 왜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 정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세기 바이올린 대가 중에 최후 주자라고 불렸던 예휴디 메뉴힌의 비디오를 보니까 그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독일에서 독주회를 마치고 차를 타고 떠날 때 팬들이 자동차 주변에 모여서 창문을 두들기고 차에 손을 대고, 그리고 메뉴힌을 배웅하는데 메뉴힌이 눈이 오는데 창문을 열고 그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는 장면을 찍었어요. 이것이 이별의 아쉬움이고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정인 것입니다. 메뉴힌의 경우에는 그가 이제 떠나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별은 인간에게 있어서 결별이에요. 다시보지 못하는 때가 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희를 영접하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게 다시 올 것을 약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배를 마시면서, 제자들은 울지만 소크라테스는 차분하게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그는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적했지만 그는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가는 길이 있을 뿐 오는 일이 없는데 유일하게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이것을 제자들이 간절히 믿었고 기다렸고 그리고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가 말하기를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초대교회 메시지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믿고 기다리고 그것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정녕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에요.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붙들려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자들이 다 도망가는 것으로 끝이었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워할 수는 있고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다는 사실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결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간절히 기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고 그들이 믿을 수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과의 정식 작별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 작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손을 흔들면서 서로 아쉬워서 부둥켜안으면서 ‘내가 다시 올게.’ ‘네, 주님 다시 오세요.’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작별이 있어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을 기쁜 마음으로 믿고 전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끌려가셔서 비명횡사하시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것이 끝이었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고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일 제가 어떤 일이 있어서 멀리 오랫동안 떠날 일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인천공항으로 저를 배웅하러 나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래서 서로 같이 기도 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그리고 ‘제가 다시 옵니다, 성도님.’ 그래야 성도님들도 ‘목사님, 곧 오세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제가 어느 날 밤에 괴한들에게 납치돼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면 성도님들이 저를 그리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누구도 ‘목사님이 다시 오신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를 말하는 것조차도 꺼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그 때의 상황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떠나가신 다음에 제자들은 아쉽지만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이것이 그들의 고백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이나 원망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대하고 기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중대하고 기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둘째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냥 당신에게 갈 것을 기대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를 영접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한 손님이 집에 찾아올 때 주인이 거실 소파에 앉아서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문 밖에까지 나가서 손님이 오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것이 예절이지요. 우리 대통령이 중국으로 방문을 갈 텐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모르긴 몰라도 중국의 외교부장관과 총리가 나와서 영접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 간의 외교 예절입니다. 

예수님이 사실 우리를 그런 식으로 영접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접을 받으시고 예수님이 높은 분이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에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내가 다시 와서’라는 말은 재림에 대한 말씀인데 곧 이어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를 영접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타당성이 있는 이유는 지난 2,000년 동안 살다 죽은 모든 기독교인들과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사는 동안에 예수님이 올 가능성보다는 그 이전에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많은데 예수님의 재림이 이 모든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되느냐에 대한 해답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이 떠나신 것이 우리를 내버려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한 때 사랑하던 사람을 내버려두고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이의 양지>라고 국내에서도 그런 식의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지요. 젊은 남자가 가난할 때 자기를 정성껏 보살피고 도와줬던 여자를 성공하니까 헌신짝처럼 버리고 부잣집 딸에게 장가가는 그런 줄거리가 아닙니까. 사람은 자기가 일하던 직장보다 더 좋은 직장에서 오퍼가 오면 지금껏 일하던 직장을 버리고 더 좋은 데로 갑니다. 목사님들도 자기가 있는 교회보다 더 크고 유명한 교회에서 청빙을 하면 그 교회를 버리고 더 좋은 곳을 향해 갑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셨습니다. 더 좋은 데로 가셨어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를 버린 게 아니에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잊지 못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도 당신을 기다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정서를 떠나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보탠다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잊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외국에 가면 잊어버립니까? 아니에요. 요즘에는 카톡이 있어서 세계 어디서나 문자를 공짜로 주고받을 수 있고, 스카이프를 통해서 화면을 보고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 있고, 전화를 하고, 그리고 다시 오는 날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말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오리라. 깨어 있어라. 내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잊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잊어버리지 말고 예수님을 고대하라는 얘기에요. 

‘나의 맘에 나의 맘에 예수님이 계셔서 비인 영혼 영원토록 가득하게 하시네. 내가 천국 가는 동안 오시기를 바라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쁜 찬송 늘 하리’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이건 상관이 없다고 잊지 말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셔서 내가 천국 가는 동안 오시기를 바라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쁜 찬송을 하며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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