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치지 않고 계속해야 할 일 (행 5:33-42)

첨부 1


그치지 않고 계속해야 할 일 (행 5:33-42) 

불가항력(不可抗力)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irresistible force).
오늘 본문 42절의 말씀에 갖다 붙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의 그와 같은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그치지 아니한 일은 무엇인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이다. 무엇에 대하여? “예수는 그리스도인 것”에 대하여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위험 천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일과 전도하는 일로 말미암아 벌써 두 차례나 투옥당하고 혹독한 매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에게 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엄명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가르치는 일과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가르치기와 전도하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 사역이었음을 알게 된다.

앞선 본문에서, 대제사장이 사도들에게 추궁하였다.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이름을 예루살렘에 가득하여 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공회원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들의 분노가 얼마나 컷던지 심지어 사도들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 때에 공회원이자 바리새파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대학자 가말리엘이 조용히 일어섰다. 공회원들의 시선은 가말리엘에게로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는 사도들은 잠시 밖으로 나가도록 조치를 취한 후 그곳에 모인 공회원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 드다의 사건(36절)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드다는 자신을 엘리야로 자처한 선지자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400여명이나 따랐지만 그가 죽게 됨으로 따르는 무리들이 흩어짐으로 거짓 선지자였음이 드러났다.

2) 갈릴리이 유다(37절)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갈릴리의 유다는 열심당의 창설자로 알려졌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를 많이 따랐으나 그도 역시 망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 

가멜리엘이 두 사건을 예로 들면서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공회원들에게 부탁하였다. 
첫째 이유는, 만약 사도들의 활동이 거짓된 것이면 시간이 지나면 드다와 유다처럼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이니 소란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만약 사도들의 활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도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려 깊은 판단으로 소동은 진정되었고, 결국 사도들을 풀어주기로 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고 전도하지 못하게 엄히 경고하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공회의 압력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풀려난 사도들의 반응(41-42절)
1)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했다.
2)이전보다 더욱 더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도대체 무엇이 사도들로 하여금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는가?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인가? 깊이 묵상해 보았다.


1.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서로 다퉜다. 누가 더 높으냐? 예수님께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나 제자들은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를 몰랐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나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은 서로 동료로서 사랑의 대상이기 보다는 경쟁의 대상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부활하신 것도 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한 사건이 있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셨을 때 그때서야 비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훗날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렇게 증거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만져주셨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을 깨달았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왜 피를 흘리셨는지... 그리고 그 피가 얼마나 보배로운 것인지... 그 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새 계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십자가의 사랑, 갈보리 사랑을 깨달았을 때 마음 속에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담대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신전의식(神前意識)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들의 이와 같은 태도를 하나님 중심주의 또는 하나님 제일주의라 설명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태도를 가질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질 때 담대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자신이 먼저 앞서면 비겁해지기 쉽다. 

시험 치룰 때도 시험 감독관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치루기 때문에 컨닝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된다. 

직장에서도 상사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듯 하면 성실성을 인정 받는 것이다.
장사할 때도 저울을 속이지 않는다. 부정한 것 섞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장사하기 때문에 수입은 적어도 양심이 떳떳하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약해질 때 사람이 점점 커지고 하나님은 작아진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약해질 때 자신을 커지고 하나님은 작아진다. 

베드로가 그런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극구 만류하고 반대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태도는 180도 완전히 달라졌다. 공회원들의 위협과 박해 앞에서도 당당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3. 사명감

사명, 영어로 “mission".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난 후 생기는 것이 사명감이다. 사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가말리엘의 충고를 들은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그냥 풀어주지 않았다. 본문 40절에 보면 “채찍질”하고, 전파하는 것을 금하고 풀어주었다. 여기서 “채찍질”은 두 가닥 세 가닥 소가죽 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때렸다. 신 25장에 태형의 규례를 정하였는데 40대 이상은 때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 생명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39대의 채찍질을 당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태형을 당했다.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그러나 사도들은 반응은 어떠했는가?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1)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
2) 날마다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명감은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물질적 손해를 뛰어 넘는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달라졌다. 

행 4: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4. 가장 가치 있는 일

행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사도들이 곤욕을 치러가면서까지 가르치고 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4대 성인, 석가 공자 마호멧 예수 그들 중에 한 분일 뿐이다. 더 이상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뇨?”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치려고 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무시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증거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사도 요한은 계속 이렇게 증거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가르치고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 안에 지혜가 있고, 그 안에 기쁨이 있고, 그 안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되면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기 때문에 얻어 맞고 감옥에 갇혀도 가르치는 일과 전하는 일을 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자가 받는 복은 무엇인가?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우리의 할 일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말려도 그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어느 가수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어느 탤런트는 죽을 때까지 연기하겠다고 했다. 어느 농부는 죽을 때까지 농사일 하겠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만약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는 일과 전도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생업을 포기하고 다 신학교 가라는 말 아니다. 선교사가 되라는 말도 아니다. 우리의 삶의 현상에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예)혜성교회 권사, 전도를 가장 많이 한 성도. 그분은 약국 경영하는 약사다. 그분은 약을 조제하고 팔아서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주 목적이 아니다. 약국을 운영하는 주 목적은 전도하기 위함이라고 간증했다. 욕도 많이 먹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 사업가는 사업하는 일, 직장인은 직장에서... 군인은 군대에서,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자기의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가능하면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하고, 사업가는 최고의 사업가가 되도록 열심히 사업하고, 직장인은 자기 직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고, 군인은 적어도 장군은 되도록 열심히 충성하고,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알뜰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마치 목사로 선교사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먹혀 들어간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셨기 때문에, 신전의식, 사명감, 가치 있는 일이므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