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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부터 복을 주리라 (학 2:1-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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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복을 주리라 (학 2:1-9, 18-19)

낙관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잘 될 거야. 나을 거야. 문제없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합니까? 많은 경우 막연한 기대일 뿐입니다. 19세기에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자 사람들은 utopia 즉 지상낙원이 곧 이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 낙관적인 환상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입니다. 개발한 무기로 인하여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하고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에게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온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낙관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이 운명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운명론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건을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입니다.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하다보면 “해 보았자 야. 전에도 안 되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일거야. 다 쓸데없는 짓이야. 우리 힘으로 안 돼”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운명론적인 생각은 우리를 분노, 절망, 포기 등으로 이끕니다. 믿는 자들은 매사를 낙관해야 합니까 아니면 비관해야 합니까? 둘 다 아닙니다. 운명론적인 관념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초합니다. 어떤 면에서 믿음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초합니다. 

다만 운명론적인 생각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동적인 자세를 갖게 하는 반면에, 믿음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나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면서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빌 4:13)다고 말했습니다.  

살다보면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중단하거나 아예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질병이 있고, 심지어 죽음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했을지라도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암에 걸린 것으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암에 걸렸을지라도 주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고 정결해집니다. 침체에 빠지거나 벽에 부딪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오늘 학개서를 통하여 그 비결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만에 돌아올 때 그들 나름대로 꿈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복구하여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 보니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불타버렸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복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도 5만 명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그래도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하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타나 공사를 방해하고 결국 그들로 인하여 아닥사스다 왕이 건축을 중단하라는 조서를 보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전 짓는 것이 부담이 되던 차에 유다 백성들은 얼른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 재건이 주전 536~520년까지 16년 동안 중단됩니다.  

학개는 다리오 왕 2년 6월 1일부터 9월 23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백성을 ‘내 백성’으로 부르시지 않고 ‘이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왜 유다 백성들을 못마땅해 하십니까? 그들이 지금은 성전 재건을 할 때가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4절) 

하나님의 집은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는데 너희들의 집만 완성해 놓고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살기 어렵다면서도 너희들의 집은 잘 꾸며놓고 산다는 책망입니다.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의 결과가 과연 어떠한 지 그들의 삶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느냐고 따지십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들의 행위를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즉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단하라고 합니다. 산에 올라가라. 나무를 가져와라, 성전을 건축하라. 이제부터 성전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라고 촉구합니다. 성전 건축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의 메시지를 듣고 감동을 받아 중단했던 성전 공사를 재개합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의 마음이 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7월 21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에게 다시 임합니다. 유대인들의 삼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어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그러니까 21일이면 초막절 마지막 날입니다. 초막절은 한해 농사를 짓고 추수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기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짓다가 침체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기대한 변화가 당장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1장에서 그들이 먹고 살기 힘들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이유가 성전 재건을 중단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전 재건은 하지 않고 자기 집짓고 자기 일을 하는데 온 신경을 쏟았다는 지적을 받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금방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다 되도록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게 느껴집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다시 놓으려고 합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동안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안 나가던 새벽기도도 나갑니다. 교회의 봉사에도 참여합니다. 그런데도 형편이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마음먹고 신앙생활 하겠다는데 왜 하나님은 복을 부어주시지 않느냐는 불평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것을 나쁜 일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보험을 드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면 주님께서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기도했으니까 주님은 당장 응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원하는 응답이 없으면 주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의 큰 그릇을 준비하며 기다릴 뿐입니다. 채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2) 현재의 성전을 솔로몬 성전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짓는 성전을 과거 솔로몬 성전의 크고 화려했던 모습과 비교하였습니다. 솔로몬이 다스릴 때는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기 전입니다. 그때는 나라가 강성하여 인근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 은을 돌처럼 여기고 백향목을 뽕나무같이 여길 정도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그의 아버지 다윗은 성전 지을 재료를 풍성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공사를 담당할 일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전혀 다릅니다. 70년간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폐허 상태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필요한 건축 재료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성전을 짓는다고 주변에서 나서서 도와주기는커녕 도리어 방해합니다. 

게다가 솔로몬 성전을 직접 보았던 노인들은 작업하는 현장에 나와서 옛날 솔로몬 성전을 기억하면서 울었습니다. 왕년에 내가 본 성전은 이렇지 않았는데. 너무 초라해. 온힘을 기울여도 될까 말까 한데 곁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일할 기분이 나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있을 때는 포로 상태였기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성전을 짓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향에 돌아와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다시 짓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데 환경에 눌리다 보니 불평과 원망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없는 것을 인하여 낙심하기보다 하나님이 현재 내게 주신 것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일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옵니다. 일을 해서 백 불이나 벌었다는 것과 백 불밖에 벌지 못했다는 것에는 번 액수는 같지만 반응이 달라집니다. 백 불이나 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감사가 나오지만, 백 불밖에 벌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불평이 나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렇지만 ‘안 될거야, 해 봤자야, 그만둘 거야’ 하면서 입방정을 떨면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신 대로 행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들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가시 돋친 말, 뼈가 있는 말, 불평하는 말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 말, 격려하는 말, 기쁨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친교 시간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슬그머니 다가와 누가 어떠하더라 하며 만나는 사람에게 가십을 말하고 험담을 하고 불평을 주로 하는지, 아니면 칭찬하고 덕담을 하는지. 무엇도 부족하고, 누구 때문에 이 모양이고 하며 불평하는 대신 내게 주신 가정, 내게 주신 교회, 내게 주신 직장, 내게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격려하십니다(2:1-5) 

외부적인 위협도 문제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이나 절망감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유다 백성이 새 성전이 옛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웅장한 성전을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비전을 주고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침체에 빠진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일련의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무슨 뜻입니까?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초라하다는 것을 하나님도 다 아신다는 겁니다.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2:4)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격려하십니다. 나 자신만 들여다 볼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때 마음을 강하게 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2:5)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만 있던 오합지졸입니다. 그들은 군대로서 정규적인 훈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시키면 따라하는데 익숙하였고, 마음에 들면 기뻐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는 노예근성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분의 영이 머물러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9:45). 

그 말씀을 믿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때 자기들보다 강한 민족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벨론에서 돌아온 숫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숫자나 그들의 형편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학개 시대,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세대와 여전히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출애굽할 때 그들과 함께 하셨고 광야 한 가운데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던 것처럼, 이제 성전 재건 역사에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이 귀환 공동체 가운데에도 계속 머물러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비전을 주십니다(2:6-9) 

지금 그들이 짓고 있는 성전에는 영광의 구름도 없고 법궤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장차 이곳에서 엄청난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임재의 또 하나의 증거로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킨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9:18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온 산이 그분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어서 크게 진동하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계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까지 흔드실 것입니다. 만국을 진동시키신 후에 “만국의 보배”가 이른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존귀하게 여기며 기다리는 보배가 누구입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성전을 방문하시는 것이 구름이 임하는 영광보다 더 귀한 영광이요, 성전이 누릴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출애굽 사건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은도 하나님의 것이고 금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가 완성할 성전의 영광은 이 세상의 모든 보화로도 채울 수 없는 그 이상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현재의 초라한 성전은 건물 자체를 의지하게 하기보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성전은 장차 우주적 진동을 일으킬 것이며, 모든 민족이 이곳으로 몰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하나님은 귀환 공동체가 재건할 성전의 영광이 이전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클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칼을 들고 가족을 지켜야 했으며, 창을 들고 나라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샬롬을 선포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샬롬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임한 하나님 나라를 작고 초라하게 보지 말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꿈꾸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복을 주리라(2:18-19)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세 번째 말씀이 주어진 9월 24일은 성전 재건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날 때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게 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제사장은 부정해진 자가 만진 물건은 모두 부정해진다고 대답합니다. 

거룩함은 전이가 안 되는데 부정함은 쉽게 다른 것에 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그들의 손으로 행한 모든 일이 부정하다고 선언합니다. 즉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행위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이 드린 예물들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그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전 재건은 단순히 건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부정해진 공동체가 과거의 현재의 부정과 더러움에서 회복되어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일종의 정결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기초를 놓는 날인 9월 24일을 귀환 공동체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규정하시고 오늘부터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전 기초를 놓던 날은 유다 백성들에게 정말 어려운 때였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도 맺히지 않은데다 농사지을 종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밑천이 있어야 무엇을 해도 할 것 아닙니까? 특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종자는 남겨두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배가 고프니 씨를 뿌릴 종자까지 먹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성전의 기초를 쌓기 시작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기특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지만 이미 그들에게 복을 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만 생각지 않은 일들이 터지고 문제가 자꾸 생긴다면 믿음이 있어도 낙심이 됩니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유다 백성들에게 속히 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의 신앙을 더욱 확실히 붙들어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마음이 가난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급한 일이 생기면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마음이 교만해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방 회복시켜주지 않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형편이 좋아지면 자꾸 고개를 쳐드는 교만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하자마자 복을 주셨다면 그 복을 공로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일을 시작했으니 하나님이 당연히 복을 주신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제대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제는 복을 주어도 되겠구나. 이제는 복을 주어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판단하실 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는지, 복을 주실 때 감당할 만한지 test 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겠다, 굶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아갈 때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도움의 손길이 찾아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4-15) 

이것이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한 교제가 없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니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바뀌니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삶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합니다. 바쁘게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만 고난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낙심을 시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자기에게 향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귀와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7)라고 화답했던 마리아와 같이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보잘것없어 보이기에 겨자씨같이 작다고 하셨습니다(막 4:31). 

지금은 비록 작아 보이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 안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말세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세상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본질상 평강과 희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받아 누립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합니까? 성령 안에서 살아갑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있습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한 초대 교회는 성령 받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활기 있게, 능력 있게, 본이 되게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있는 곳에 치유와 화합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며 능력을 받으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학개 시대에 성전을 짓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지막 남은 동전 두 닢을 드린 가난한 과부처럼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보다 주님께 맡길 때, 내려놓을 때 더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학개를 통하여 약속하신 영광과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특권을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힘을 내라. 주의 일을 해라. 두려워 말라. 

지금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환경을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내며 특히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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