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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단 쉰천지의 성경해석 (롬 3:7-8) -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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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쉰천지의 성경해석 (롬 3:7-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성령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썼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2가지가 꼭 필요하다. 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② 사람들이 쓰는 글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이 2가지 중에, 하나라도 부정하면, 이단이 된다. 

우리는 쉰천지를 ‘이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왜 이단이냐면서, 성경으로만 성경을 풀고 해석하는데, 어떻게 이단이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용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53: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분명히 나온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이는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니, 성경을 이렇게 사용하면,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다. 쉰천지는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해석 방법은, 내용을 왜곡하는, 조작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1. 쉰천지는 모든 성경은, 짝이 있다고 말한다. 신약과 구약이 짝을 이루듯이, 예언과 성취가 있다고 한다. (사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쉰천지는 ‘이것들’은 성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빠진 것이 없이, 다 짝이 있다고 한다. 만약 그들의 말이 맞으면, 이처럼 짝을 찾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면, 잘못된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올바르게 판단을 하려면, 전제되는 내용이,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사34장)내용은, 여호와가 원수 에돔 땅을 벌한다는 내용이다. 소제목을 보라. 그래서 그 땅은 불로, 밤낮 연기가 끊임없이 떠올라, 황무하게 된다. 그 땅에 사람들 대신, 당아새와 고슴도치, 부엉이와 까마귀, 이름 모를 들짐승, 이리, 숫염소, 이러한 짐승들이, 차지하고 살게 된다. 

이것들(짐승들)이 짝을 이루어, 거기에 모인다는 말이다. 음산한 짐승들이, 짝을 이루어 번성하게 된다는 말이지, 어떻게 신약과 구약처럼, 말씀에는 짝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런 모든 짐승들”으로, 새번역은 “이 짐승들”로 번역했다. 

이처럼 황폐하게 된 에돔 땅에, 짐승들을 명하여 살도록, 명령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은 짝이 있다면서, 짝을 찾으려는 행동은, 잘못된 일임을 알 수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에, 이러한 행동을 하면 할수록, 더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 

쉰천지는 새는 영인데, 부정한 새와, 부정한 짐승을 마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정한 새와 짐승들이 다 짝을 이루게 된다고 했으니, 마귀들이 들끓도록,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했고, 여호와의 영이, 부정한 마귀들을 모은다는 말인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인가? 

성경을 이렇게 잘못 사용하고 있으니, 자기 멋대로 만든, 창작품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서로 다른 개념을, 살짝 붙여놓은 것뿐이다. 

옛날, 어떤 시골 마을에, 어리석은 선비가 살고 있었다. 신분은 양반인데, 생각이 모자라다 보니까, 나이가 들도록, 사람들한테 업신여김을 당했다. 선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꼴이 한심해보였다. 어린 시절에 함께, 서당을 다니던 친구들은, 과거에 급제를 하거나, 벼슬을 했다. 

그런데 자기는,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벼슬 한 자리를 해야겠는데, 과거에 붙을 자신이 없으니,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늘 궁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비는 어린 시절의 친구 하나가, 서울에서 꽤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 그 녀석은 나만큼이나, 공부를 못하던 녀석인데, 어떻게 그렇게 높은 벼슬에 올랐지?” 선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은 이 친구는, 서울생활을 하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한테, 뇌물을 바쳐서 잘 보였기에, 벼슬을 했다. 이를 모르는 선비는, 친구를 찾아가서, 벼슬자리에 오르는 비결을 물었다. 

“여보게, 자네는 서당 다닐 때, 공부를 못해서 나랑 같이, 훈장님께 늘 종아리를 맞았는데, 어떻게 그런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나? 제발 좀 가르쳐 주게.” 그 말을 듣고, 동무는 껄껄 웃으며, “벼슬? 그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야, 서울에서 한 삼 년만 뒹굴면, 벼슬길이 보일 거야.”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거였군! 알겠네, 나도 그렇게 해 보겠네, 고맙네 그려.” 선비는 더 이상 친구의 말을 듣지 않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길 한복판에 누워, 데굴데굴 뒹굴기 시작했다. “삼 년만 뒹굴면 벼슬이 생긴다! 벼슬만 생긴다면, 내가 그까짓 일을 못할까 보냐!” 

선비는 계속 굴러다녔다. “아이고, 생각보다 힘들구나, 하지만 벼슬이 생긴다는 데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선비가 하는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원,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가 미쳤구먼!” “글쎄 말이야, 서울에는 별 희한한 미치광이들이 다 있다니까…” 그런데 선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뒹굴었다. 

데굴데굴…, “삼 년만 뒹굴면 된다!” 데굴데굴…, “나도 벼슬 한번 해 보자!” 데굴데굴…, 여기서 친구가 말한 ‘뒹굴다.’는, 길거리에서 몸으로 뒹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살면서 이것저것 경험하고, 터득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선비는 ‘뒹굴다’는 뜻을 착각하고, 길 한복판에서 누워 ‘데굴데굴’ 뒹굴면, 벼슬이 생기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 가운데는, 이렇게 서로 비슷하여, 혼동을 줄 수 있는 언어들이 많다. 

어떤 언어를 잘못 썼는지, 살펴볼 줄 알아야, 엉뚱한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이 주스 병을 손에 들고 있어봐, 이제 너는 병들었으니, 병원에 가야 돼!’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다. 보배는 금은방에다, 팔아먹을 수 있으니, 어린이는 금은방에, 팔아먹을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 해석인가! 


2. 쉰천지는 성경 말씀을, 비유로 푼다. 

(마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했다. 그렇다면 모든 말씀이 다 비유인가? 

만약 모든 말씀이, 다 비유라고 하면, 쉰천지의 말이 맞지만, 어떤 경우는 비유로 말씀하고, 어떤 경우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 말씀하신 경우가 있다.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다. 

만일 비유라면, 부활은 무엇이고, 생명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다 비유로 해석하면 잘못이다. 비유(파라볼레)는 파라(곁에) + 발로(던진다)는 뜻이다. 하나의 신학적,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의 상황을 빌어서, 예증하는 방편이, 비유이다. 

따라서 비유는, 일종의 은유와 직유이다. 그 문장에서, 한 가지 중심 진리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쓰인 수사법이다. 가장 중요한 해석법칙은, 문맥을 떠나면 안 된다. 이단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성경을 제 멋대로 편집해서 말한다. 마음대로 편집한 내용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막4:3-9)과 (마13:3-9)의 비유는, 4가지 땅의 비유이다. 그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하면서, 2가지 씨를 말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떨어진 씨에, 초점이 맞추고 있다. 이 말씀들은 한 결 같이, 씨가 여러 종류의 토양에, 떨어졌다는 사실과, 그 떨어진 씨의 운명에, 집중되어 있다. 

2가지 씨를 뿌렸다는 내용은, 결단코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성경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또 다른 씨는 다른 비유로, 가라지의 비유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비유를 편집해서, 쉰천지는 하나님의 씨로, 가라지는 일반 교회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씨’가 모두, ‘말씀’으로 비유되지는 않는다. 

‘식물의 씨앗’(창1:11-12)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만일 씨가 말씀이라면, 말씀을 맺는 채소와, 말씀을 가진 열매 맺는 나무(사람)이라는,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씨는, 그냥 씨다. (요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여기서의 씨는 후손이다. 만일 말씀으로 해석하면, 다윗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는,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엉터리 해석이 된다. 같은 (마13장)에서도, 씨는 여러 가지로 나온다. 씨라는 말에 말씀을 넣으면, 말과 내용이 이상해진다. 

(마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여기서는 ‘아주 작은 것’이다. (마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비유되었다. 

(마13장)에는 7개의 비유가 나온다. 7개의 비유를, 자기 마음대로 편집해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상관없는, 창작품이기에 이단이 된다. (렘31:2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쉰천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엉터리로 해석하게 된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으로, 말세에 사람의 씨(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구원받는 자)와 짐승의 씨(마귀의 말씀을 받아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나오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를 쉰천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 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니까, 사람을 하나님으로, 씨를 말씀으로 보고 사람의 씨는, 하나님의 씨고, 짐승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 또는 마귀의 자식이라 한다. (계13:1-2)을 보면, 짐승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유1: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러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문맥을 보라. (렘31장) 말씀을 그런 뜻이 아니다.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이런 뜻이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와서, 사람들과 짐승이 많이 늘어난다는 말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로 나뉘는가? 이것은 자기 멋대로 꾸며낸, 창작품일 뿐이다. 말씀의 내용을 모르니까, 엉터리로 연결해도 모른다. 원숭이 똥구멍 이야기로, 연결된 조작일 뿐이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원숭이 똥구멍이 빨갛다는 말과, 빨가면 사과라는 말은, 같은 낱말들이지만, 개념이 다르다. (먹는 밤, 깜깜한 밤), (타는 차, 마시는 차), (잔디밭에 있는 풀, 종이에 붙이는 풀), (미안할 때 하는 사과, 맛있는 사과),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낱말은 같지만, 전혀 다른 뜻이다. 그러므로 다른 개념이 연결됐음을 알 수 있다. 개념과 낱말이 이렇게 다르기에, 어떤 말을 쓸 때, 그 말이 어떤 개념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 헌병 아저씨가 고물상에, 헌 병을 팔았다는 같은 개념인가? 다른 개념인가? 

다른 개념인데, 엉터리로 연결해 놓고, 하나님 말씀으로만 해석한다면, 상식을 파괴하는 주장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지금 쉰천지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고, 이X희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3. 거짓말이 하나님의 모략이라고 한다(롬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그래서 쉰천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거짓말 하는 것을 ‘모략, 모사, 성스러운 거짓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이러한 거짓말을 소위 ‘밥 먹듯’한다. 성도들을 유인하기 위해, 선교사, 목사, 등을 사칭한다. 부모를 속이고, 친구에게 핑계를 댄다. 이를 전부 모략이라고 한다. 그 근거가 본문이다. 

본문이 과연 그런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 정말 그것이 맞는다면, 한국교회는 물론, 전 세계교회의 선교전략이 대거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전혀 발견되지 못했던, 기가 막힌 세계 최고의 선교 전략이 세워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그런가? 밑줄 친 부분만 보면, 정말 그런 뜻처럼 보인다. 

로마서의 저자 사도 바울이, 자신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과,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읽혀질 것 같기도 하다. 성경 이해의 핵심은, 언제나 문맥에 있다. 문맥을 무시하고 읽으면, 자살 행위와 같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보다도 못하다. 말씀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엉뚱한 논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포장되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구절만 잘 읽어도, 잘못된 내용인지를 알 수 있다.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유대인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는 말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내가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앞에서 말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엉터리 말은 하는 자들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이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 종살이를 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 그래서 요셉이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나중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요셉아, 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은, 다 우리 덕이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지 먹지 않았다면, 네가 어떻게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겠느냐? 그러니 너는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한다면, 괴변이고,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몹시 강조했다.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것들을 부인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도 폐하고, 선행도 도덕도 부인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8下)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피우고, 자기 죄를 정당화하니,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이다. 

(딤전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거짓말을 하나님의 모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허무맹랑한 논리에 불과하다. 

이리 한 마리가 살았다. 이리는 작은 동물들한테는 강했지만, 곰이나 사자처럼 큰 동물들한테는, 늘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나는 왜 이리 약할까?’ 이리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다.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에, 이리는 들판을 걸어가다가, 문득 자기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는 엄청나게 길었다. 

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것은 내 그림자인데, 엄청나게 크군, 내가 이렇게 큰 동물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이리는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낯에는 내 그림자가 작았는데, 저녁이 되니까 그림자가 커지는군!…, 그렇다면…?”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리는 곧 엉뚱한 착각에 빠졌다. “옳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를 낮에는 작아지고, 저녁만 되면 커지는 동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야!” 이리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기뻤다. 이리는 자기의 커다란 그림자를 보며, 으스대었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저녁에 사자 녀석과 싸운다면, 거뜬히 이길 수 있을 거야, 이 괘씸한 사자 녀석, 어디 혼 좀 나 보라지.” 이리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사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자한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어흥, 이놈 사자야, 무섭지?” 

사자는 이리의 꼴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달려들어, 이리를 단번에 때려 눕이고 말았다. 이리는 사자의 발톱 밑에 깔린 채, 구슬피 울었다. “아이쿠, 내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구나, 그림자가 크다고, 나까지 커지는 건 아니었는데…” 

전제는 옳지만, 결론을 전제와 맞지 않게, 엉뚱하게 내렸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것과, 몸뚱이가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런데 이리는 그것이 상관이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착각일 뿐이다. 

(벧후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성경을 전혀 엉터리로 해석하고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런 해석방법을 주셨다는 말은, 스스로 잘못된 엉터리임을 밝히며, 상식도 없는 말이니, 이런 엉터리에 이단에 빠지지 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건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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