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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못된 습관 이기기 (마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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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습관 이기기 (마 5:27-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느 군대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날은 저녁으로 돈가스 반찬이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모두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무엇인가 하고 보니 돈가스를 1인당 2개씩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스가 없다고 합니다. 부식 병이 보급받을 때 돈가스 한 상자와 소스 한 상자를 가져온다는 것이 실수로 돈가스 두 상자를 가져왔습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어떻게 소스 없이 돈가스만 먹는가?
“소스도 없이 돈가스를 2개나 먹으라는 말이야?”

그때 한 고참병이 말하기를, “야! 우리는 불평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지금 어느 부대 애들은 소스만 2개를 먹고 있을 거야.”

같은 사건을 두고서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감사한 마음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서 순간순간마다 선택해야 할 일이 있는데 불평을 택하지 말고, 감사를 택하십시오. 이것도 역시 습관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평을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불평하는 것도 습관이고, 감사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습관”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씀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보면 첫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남의 배우자와 동침하지 말라’는 계명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동침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희의 덕을 지켰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 마음은 너희 몸보다 훨씬 빨리 정욕으로 더럽혀질 수 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곁눈질도 너희를 더럽힌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에서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나 예수님의 기준은 마음을 품는 것부터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주 무거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이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법을 단련할 수 있습니까?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도 어느 겨울날 눈밭을 뒹굴고 있었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정욕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로마서 7장 21~24절에 그의 괴로운 독백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어쩌면 그 위대한 성자도 정욕의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이 위안이 될 수 있겠지만, 지키기 어려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올무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욕의 문제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세상과 동떨어져 산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중세 교회의 어두운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수도원 지하에서 발견된 갓난아이들의 유골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면서, 세상에서 음욕을 품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어려운 기준입니까?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세상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사는 신부와 수녀를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술과 담배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용납하기도 하죠.
얼마 전에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서 아마도 추기경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사진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별로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 사진입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결혼도 안 한 사람들이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는데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나요?

제가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크리스천들이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절대로 완전한 거룩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룩함을 향하여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습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한 시대에서 거룩한 습관이 어떻게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새로운 습관 만들기

제가 오늘, 이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습관의 문제로 풀어가려는 것은 ‘음욕’의 문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뿌리 깊은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습관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그 습관을 변화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흑인 인권운동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Jr 목사입니다.
이 일의 발단은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인이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경찰에 구속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전에도 그 해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어섰고, 서로의 폭력 때문에 상처를 받고는 시들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습니다.

킹 목사는 본인이 이 일에 연루되면서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집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죠. 집 안에는 아내와 딸이 있는데 말입니다. 집으로 달려갔을 때,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폭탄이 현관 앞에서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폭동이 일어나려는 순간 킹 목사가 군중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중하십시오. 폭력은 안 됩니다. 칼로 사는 자는 칼로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 그들이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세기가 흘렀지만, 이 말씀은 아직도 우리 옆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폭탄이 터진 그날 밤 킹 목사는 군중에게 “우리는 사랑으로 증오에 대응해야 합니다. 내가 사라져도 우리 과업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동이 정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을 하던 흑인들에게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인종차별은 심했고, 흑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일어나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피를 흘리며 희생당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백인이 가진 힘과 권력을 이길 수 없어 좌절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습관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대항하거나 싸우지 마십시오!

이 순간부터 흑인들은 어떤 힘에도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부터 그들은 폭력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에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원수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비폭력 운동이 이들에게 평등권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힘든 논리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합니다. 도저히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논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가지고 정의를 바로 세우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의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봄 직한 글을 소개합니다.

"습관이라는 무서운 병“

넘어졌다 일어나고
넘어졌다 일어나고
너는 불굴의 의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박수 소리에 취해 넘어지는 게 부끄러운 줄 몰랐고, 자꾸 넘어지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다 용서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만큼 넘어졌으면 지금쯤 안 넘어지는 방법을 터득했어야 했다. 패배도 습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이제부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모습이 아니라 넘어져 마땅한 상황에서도 절대 넘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박수받기를 원한다.

찰스 두히그 (Charles Duhigg)는 그의 책 [습관의 힘]에서 누구나 습관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면서, 좋은 습관을 지니기 위한 4단계의 법칙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도 아주 유용할 것 같아 소개합니다.

습관을 변화시키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잘못된 습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인 중의 많은 사람이 “삶의 변화”를 무슨 로또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죠. 성령의 충만함을 무슨 일회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경험”을 찾아다닌다는 것이죠.
성령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습관을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시며, 성령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습관을 고치도록 동기를 주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며 쓰러지지 않고 승리하게 되지요.

MIT 연구진에 의하면 모든 행동에는 단순한 신경학적 고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어떤 신호를 받아 반복적인 행동을 하고 거기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죠. 물론 이 연구는 성경과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기준과 삶의 패턴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것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반복 행동을 찾아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간음’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가?”라는 것이죠.
남자들이 모든 여자에게 음욕을 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 대상이 인격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보일 때입니다. 그러면 어떨 때 상대방을 성적 대상으로 보게 될까요? 제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일상을 떠나 있을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가정의 아들일 때, 성실한 남편일 때, 좋은 신앙인일 때 그럴 수 있을까요? 가만히 보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대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 음욕을 품고 상대방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다양한 보상을 생각해 보라!”라고 합니다.

무슨 보상이 있을까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본능적인 자극에 대한 충족입니다. 인간들은 본능에 충실할 때 만족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만족을 얻기 위해 잃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 보상의 단계에서 본능적 생각을 하는가? 이성적 생각을 하는가? 신앙적 생각을 하는가?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 29~30절이 시사하는 바가 크죠.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그리고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오른 눈과 오른손이 만족을 얻었지만, 그것으로 몸 전체가 상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본능적 만족으로 큰 것을 잃을 것인지, 본능적 만족을 이김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욕망’이 무엇입니까?

욕망에 휩싸이면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관계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욕이 가져다주는 보상과 그것을 이겼을 때의 보상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죠.
육체적 열망이 음욕을 유발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영적인 열망은 음욕을 이기는 동기를 만들어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떳떳한 배우자인지, 우리 자식이 결혼할 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같은 신앙의 공동체에서 우리는 영향력 있는 리더로서의 삶을 사는지.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욕망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아닌, 내 삶의 관계 속에서 가져다주는 만족, 영적으로 충만할 때 주는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져다주는 평안함의 보상을 생각하는 것이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신호를 찾는 것”입니다.

즉, 습관을 자극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침을 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시간이 되어서?
배가 고파서?
아이들이 밥을 먹기 때문에?
아니면 출근하기 전에는 습관적으로?
사실 우리가 밥을 먹지만 왜 먹는지 정확하게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이 밥을 먹고 나면 커피를 먹는 것이 참 익숙한 문화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점심 값보다 더 비싼 커피를 사 먹지요. 왜?
커피가 맛있어서?
오후를 활기차게 보내기 위해 각성 효과로?
늘 밥을 먹으면 커피를 먹었으니까 습관적으로?
아니면 식사 후에 친교를 위해서?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 보면, 습관의 신호를 찾기 위한 패턴을 연구하는 데는 다섯 개의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합니다.
장소 - 어디에 있을 때?
시간 - 몇 시에?
감정 상태 - 어떤 감정의 상태에서?
다른 사람 - 주변에 누가 있었는가?
직전의 행동 - 충동이 있기 직전에 무엇을 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빼어 내버려야 할 오른 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를 실족하게 하므로 찍어 내버려야 할 오른손이 무엇인지를 찾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죄는 “일상의 깨어짐”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일상의 깨어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깨어짐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덜 느끼기 위해 누군가를 자신의 죄의 영역 속에 끼워 놓으려고 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어떤 무리에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음욕을 품기 전에는 꼭 음욕을 자극하는 환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대표적인 죄가 ‘간음’입니다. 밧세바를 범한 것이죠.
다윗은 새벽을 깨우며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황혼에 침상에서 일어나 궁정을 거닐다 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그전에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환경 가운데서 다윗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과 대비되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유혹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상전이었던 보디발의 아내에게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다윗보다 더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황과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환경 가운데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이겨냈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위대함은 그가 이방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영적 습관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를 사자 굴에 던지게 된 이유가, 당시 왕이었던 다리오를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습관이 그를 붙잡아 주었던 것이지요.

네 번째 단계에서는 습관을 고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습관의 고리를 알아내면, 즉 습관적인 행동을 했을 때에 유발하는 보상과 신호, 그리고 그 습관에 따른 반복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변화시킬 준비가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갈 것은 우리가 습관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육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세상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삶으로, 육체적인 욕망에서 영원한 열망으로, 옛사람에서 거듭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을 향해 가던 삶이 천국을 향한 삶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습관에 대한 정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

“어떤 시점에는 의식적으로 결정하지만 얼마 후에는 생각조차 않으면서도 거의 매일 반복하는 선택”입니다.

음욕이 선택되고, 그 선택으로 간음하는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참 무섭지 않습니까?
요즘 일어나는 성범죄, 사이코패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예외 없이 그들의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포르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싶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습관을 고치기 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주부들의 일탈이 문제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여자 중의 대부분이 마음이 공허해서 호스트바를 찾는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넘어가는 첫 번째 이유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실제적인 소망과 생명력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곳 교회에서 어떤 여자도 누구의 남편과 누구의 엄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당당하게 불리고 사용되는 장소입니다. 가능하면 교회에 머무르는 시간과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계획인지 아시나요?
습관은 우리 뇌가 기계적으로 따르는 공식인데, 음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원’에 대한 관심과 ‘가장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죠.
짐 엘리엇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짐 엘리엇과 친구들이 에콰도르에서 아우카 부족에게 살해를 당한 후, 사람들은 왜 젊은이들이 쓸데없는데 생명을 버렸는지를 안타까워했고, 심지어는 그 무지막지한 부족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짐 엘리엇과 친구들은 오랫동안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매일 비행기에서 먹을 것을 주었고, 어느 주일 저녁 그 부족들이 찾아왔을 때, 드디어 이들이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은 창을 들고 무자비하게 쳐들어왔습니다.
물론 이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총을 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바보짓이 아니다.”라는 신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어린 딸과 함께 그 부족 안에 들어갔고,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난폭한 부족이었던 아우카 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먼 훗날 다섯 명을 창으로 찔러 죽였던 사람 중의 하나가 목사가 되어, 바로 그 죽음의 강가에서 순교자의 손자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가?
영원에 관한 관심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습관을 바꿀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 눈 하나, 팔 하나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팔이 하나 없고, 눈이 하나 없다고 음욕이 사라질까요? 문제는 우리의 관심과 습관을 올바른 곳에 고정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장용호가 쓴 [건축가, 세계에서 인생을 배우다]에 보면, 스티브 잡스의 30번째 생일에 사람들을 초대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인생의 처음 30년은 자신이 습관을 만든다. 그리고 인생의 나머지 30년은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갈 인생에서 여러분을 잡아 줄, 아니 영원을 향해 살 수 있는 삶의 습관은 무엇인가요?
물론 이 바쁜 세상의 생활 속에서 여러분이 계획을 세운다고 다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새로운 습관의 계획을 실천한 날이 그렇지 못한 날보다 훨씬 보람 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유익’ ‘영원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여러분이 음욕을 품을 만한 환경, 즉 에로틱한 영화나 사진 등을 보았을 때, 머릿속에서 그것들을 지우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우려고 하기보다 선한 것으로 다시 생각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기 교육으로 유명한 유대인들이 새기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11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습관은 생각 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반복되어야 하고, 실제적인 성취감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습관이 여러분을 지켜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함께 하셔서 일어난 승리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웨슬리 펠로우 집회에 김승욱 목사님이 둘째 날 설교를 맡았습니다. 그의 거룩한 열정이 전염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가슴이 뛰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하박국 2장에 보았던 하나님의 말씀,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하박국의 놀라운 감사의 기도는 그가 보았던 그 환상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패배자가 아니라 온 땅을 덮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가 품을 수 있는 삶의 습관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더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들이 되어 나가는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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