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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전하고 정직하며 (욥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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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하고 정직하며 (욥 1:1-5)


제가 어릴 적에 원로목사님께서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의 뜰 안에는 교역자 사택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 가족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부목사님이 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목사님은 당시 우리 교단 내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언젠가 그 분의 사모님께서 머리에 파마를 하셨는데, 그 부목사님께서 그것을 보시고는 '경건치 못하다'고 단단히 혼쭐을 내셨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원로목사님은 항상 '시대를 앞서 나가는' 분이신지라 그런 면에 있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원로목사님의 사모님은 원래부터 '내추럴 파마' 즉 살짝 곱슬머리이셔서 굳이 돈 들여서 그러실 필요가 아예 없으셨습니다. 
하여튼 옛날 소위 '보수 교단'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목사는 항상 성경찬송을 고이 모시듯이 옆구리에 껴서 들고 고개는 항상 겸손하게 약간 숙인 자세로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도사님들은 단정하게 옷고름을 맨 흰색 저고리와 발목이 살짝 드러날 정도 길이의 검정색 치마만을 입고, 머리는 반드시 한가운데에 가르마를 한 소위 '쪽머리'를 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한 모습'이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가는 교단의 교역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진짜 경건한 신자의 모습은 결코 그런 '외형적인 거룩함'이 아니었습니다. 
1절에 "1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우스 땅'이 어딘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단지 3절 하반절에 보면 욥을 가리켜 "동방 사람"이라고 했으니 아마 가나안 동쪽 경계 지역 어디였을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14절과 19절을 미루어 볼 때에 '목축을 하기에 좋은 기름진 땅이면서도 사막이 가까운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욥"이 족장시대 즉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 보면 그가 환난에서 회복된 이후에 140년을 더 살았다고 했으니 전체적으로는 적어도 200년 이상을 살았을 것이며 이것은 족장 시대의 평균 수명과 비슷하기 때문인데, 그 외에도 수많은 간접 증거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책은 창세기이지만 그것은 족장시대가 한참 지난 후에 모세가 쓴 것이므로, 어쩌면 욥기는 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일 가망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욥에 대한 프로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순전"(blameless)이라는 단어는 '완전'이라는 히브리어의 어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도덕적으로 완전함'을 뜻하고, 이것은 곧 "악에서 떠난 자"와 직결됩니다. 
"정직"(upright)이란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함' 혹은 '곧음'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지 아니함'을 가리키며, 이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정직한 신앙'과 '순전한 생활' 즉 신행일치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욥이라고 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본문이 증거해 주는 사실만을 보면 실로 모범적으로 경건한 신앙인이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순전하고 정직했던 욥'이 보여 주고 있는 경건생활의 본은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인지를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금욕주의적 외식'은 결코 올바른 경건생활이 아닙니다. 

2절 이하 4절에 기록하기를 "2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라고 했습니다. 

욥은 우선 '자식 부자'였습니다. 
그의 "소생" 즉 '자녀'들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 즉 '7남3녀'나 되었습니다.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가끔 "전도를 못하면 자식이라도 많이 낳아서 신자로 키워라."고 말씀하시는데, 욥이야말로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자식이야말로 부모에게 있어서 진짜 복이요 최고의 재산이 아니겠습니까?

욥은 그런 자식 복만 가졌던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엄청난 거부였습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라고 했으니, 굳이 오늘날의 액수로 환산해 볼 필요조차 없이 당대의 '재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였다고, 즉 비단 재산뿐 아니라 인격, 명예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실로 크게 존경을 받는 최고의 유명인사였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를 경멸하면서 소위 '청빈'을 자랑하는 것이 경건생활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경건은 불교의 중들이 대단히 고상한 가치처럼 내세우는 '무소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거지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경건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경건이란 것이 모든 인간적인 즐거움을 멀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처럼 경건한 신자였던 욥이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생일잔치를 베풀어 준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라는 말은 '생일이 돌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항상 베풀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아들 중에 한 명이 생일을 맞이하게 되면 다른 여섯 형제들뿐 아니라 "누이 셋"까지도 다 함께 모여서 큰 잔치를 했던 것입니다. 

'동방에서 제일가는 갑부'였던 욥이 자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일 때에 그저 검소하게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고급 호텔의 식당에서 아주 '거하게' 파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므로"라는 언급은 그 잔치의 분위기 역시 그야말로 즐겁게, 흥겹게 진행되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녀들로 하여금 생일잔치 대신에 예배만 드리고 즐겁게 노는 대신에 얌전히 앉아서 성경 읽고 기도만 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서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사람이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이지 절대로 '불경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무슨 '속세를 떠난 수도자적인 생활'이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경건생활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원로목사님께서 대구에 있는 어느 교회에 '담임 강도사'로 부임하게 되셨습니다. 
그 교회의 예배당에는 어린이들이 정식 야구를 할 글러브나 배트가 전혀 없던 당시에 야구 비슷한 '찜뽕'이라는 것을 하면서 놀 수 있을 만큼 아주 넓은 마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의 장로님들은 교회 안에서 학생들이 운동을 하는 것을 아주 불경건한 행동이라고 못하게 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구식(?) 장로님들이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고쳤는지 아십니까?
원로목사님께서는 그 교회 마당에 붙어 있던 작은 창고 안에 탁구대를 설치해 놓으시고 교회의 학생들과 청년들과 더불어 탁구를 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니까 에어컨도 없던 시절에 무척 더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원로목사님께서는 그 교회 마당에 있던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 '옥외 탁구장'을 만드셨습니다. 
탁구대를 그 은행나무 밑으로 옮겨 놓고 사방에 나무기둥을 세운 후에 그 위에 그 당시 '스레트'라고 불리던 간이지붕을 설치하셨던 것입니다. 
  
담임 교역자가 그렇게 사시사철 교회 마당에서 탁구를 치시니 그 교회의 장로님들도 더 이상 어쩌지를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교회의 학생들은 저까지 포함해서 교회 마당에서 탁구뿐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찜뽕'과 배드민턴을 비롯하여 자전거 타기에 이르기까지 마음껏 놀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우성배 쟁탈 교구친선 농구리그'를 시작했던 것도 그런 원로목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우성 체육관'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교회 안에 있는 유일한 실내체육관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주중에 경향학원의 학생들만 사용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 대회를 창설했던 것이었습니다. 
또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 달란트' 교실 중에도 '축구 교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축구를 좋아하는 주일학생들은 저 드넓은 경향학원 운동장을 주일 오후마다 완전히 독차지하면서 마음껏 뛰며 공을 차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 대구의 어느 교회에 있던 고리타분한 장로님들이 보았다면 '목사 배척 운동'까지 불사했을 일이었겠지만, 다행히 우리 경향교회 장로님들 중에는 그런 분이 없었습니다. 
주일 오후에 어디 야구장에 구경하러 간다면 당연히 안식일을 범하는 '오락'이 되겠지만, 교회당 공간 안에서 교인들이 함께 모여 농구 리그를 하고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축구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도의 즐거운 교제'요 '전도의 장'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경건생활을 금욕주의와 혼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오락과 유흥을 무조건 다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대표적인 금욕적 경건주의를 주장하던 바리새인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받으시면서도 그처럼 '친구들과 먹고 즐기는 삶'을 공생애 기간 내내 계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청빈'이나 '금욕주의'는 절대로 올바른 경건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 앞에 좀 점잖고 거룩하게 보이는 행위'일 뿐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인생의 낙을 즐기는 자체는 결코 불경건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전인격자적 경외심'이 진정 참된 경건생활입니다. 

5절 말씀에 "5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욥은 자기 자녀들이 생일잔치를 즐기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후원했듯이, 그것이 끝나고 난 후에 사후처리 역시 세심하고도 정성스럽게 지도했습니다. 
즉 잔치가 끝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즉시 그 자녀들을 다 불러서 "성결케 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율법과 성막을 통하여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하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 이 족장 시대에는 집안의 가장이 그 직무를 대행했었습니다. 
  
즉 아버지가 자기 가족들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치고 그들을 축복해 주는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번제"는 이미 노아 홍수 이후부터 나타나는 제사로서 희생제물 전체를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인데, 욥이 드린 번제는 자녀들을 '성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일종의 '속건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 욥이 자녀들을 '성결케 하는 번제'를 그것도 "그들의 명수대로" 드렸던 것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욥이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기 자녀들이 잔치를 하면서 비록 직접적인 행동으로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겠지만, '마음으로'라도 범죄한 일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염려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고 한 것은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 자체를 완전히 버리는 '배교'를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이 잔치를 즐기는 가운데 혹시라도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쾌락을 더 사랑하는 죄나,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는 죄를 가리킵니다. 
욥은 이처럼 자기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그야말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도록' 철저하게 가르치고 세심하게 점검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욥의 경건생활이라는 것은 그 기준을 항상 '하나님 앞'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이들에게 이런 큰 생일잔치를 차려 주는 것이 내 양심으로는 아무 거리끼거나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자녀들은 다른 집 애들에 비하면 훨씬 품행방정하고 착한 아이들이니까 아무 염려할 것이 없다.'라는 식으로 속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기 자녀들의 모든 언행을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엄중히 판단하는 '신전인격자'적인 마음과 자세를 항상 적용하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경건이란 '사람 눈에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실족을 하거나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무조건 불경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 할지라도 그 어떤 죄도 짓지 않고 단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사 '몸'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지으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의 죄를 '성결케 하는' 제사를 스스로 매일 드리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하루도 빠짐없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날을 돌이켜 보면서 회개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역시 새 한 날의 삶을 두고 경건의 서원을 하면서 살고만 있으면, 비록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생활의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경외'란 문자적으로 '두려워함'이 아닙니까?
신자의 마음이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으면, 늘 그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겁을 낼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즐겁게 놀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않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경외심을 결코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경건'을 'godliness'라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 'godliness'를 좀 딱딱하지만 직역을 해 보자면 '하나님 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매사에 하나님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고 '멘토'로 모시면서, 그 '하나님 식'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곧 진정한 경건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어디를 가나 'CCTV' 카메라들이 곳곳에 장치되어 있습니다. 
'CC'란 'Closed Circuit'의 약자로서 개방되어 있지 않고 '폐쇄되어 있는 회로'란 뜻입니다. 
즉 일반 텔레비전 공중파처럼 아무나 수신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회로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도록 제한된 것입니다. 
바로 그런 'CCTV' 때문에 아무 보는 사람이 없는 으슥한 골목길에서 저지른 범죄도 자동적으로 녹화가 되며, 우리 교회에만 해도 복도나 주요 통로에 역시 장치되어 있어서 나중에라도 '어느 집 애가 교회 기물을 파괴했는지'(?)를 훤히 살펴보고 그 부모를 '추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이야말로 이 세상은 물론이요 우주 전체에까지 없는 곳이 없는 가장 완벽한 카메라가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일곱 개의 완전한 눈'으로 '온 땅'을 감찰하고 계시는데 그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얼마 전 주일 밤예배 시간에 설교 말씀을 통해서 들은 대로 '주일에 교회 안에서' 거룩하게 살지 못할 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목사치고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있을 때에 의롭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전도사치고 심방을 나가고 전도를 다닐 때 선하고 충성되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장로가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하거나 집사가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하거나 권사가 수요예배 찬양대석에 앉아 있을 때에 경건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별된 생활은 바로 엿새 동안에 각자의 가정과 학교와 생업의 터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역자에게는 평신도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가정으로 돌아갔을 때 그 곳에서도 늘 '자신을 성결케 하는' 독경과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지 아닌지 바로 여기에 진짜 경건생활이 있습니다. 
평신도에게는 교역자가 보지 못하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죄의 유혹을 받게 될 때 바로 그 자리에서도 오로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면서 '보디발 장관 아내의 손길'을 뿌리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진짜 '신전인격자적' 양심이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온 땅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언제 어디서나 의식하면서 그 앞에서 바르고 거룩하게 사는, 진정한 경건생활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언젠가 어느 목사님께서 제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교단에 속한 분은 아니시지만 평소에 늘 저의 설교를 듣고 계신 분이신데, 특히 그 해의 '6.25 기념주일'의 설교에 크게 공감을 하시고 제게 격려의 글을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편지 내용 중에 제가 다른 주일의 무슨 설교 도중에 우리 교회 청년들과 함께 야구장에 가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인용하는 것을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보수 꼴통(?)으로 알려진 석 목사님께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야구장 나들이를 하고 또 텔레비전 화면에 비칠 정도로 열렬히 응원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와 제 아내는 파안대소를 했습니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암시하듯이, 제가 한 두어 세대 전에 목사가 되어서 그처럼 토요일에 주일 준비에만 전념하지 않고 야구장에 갔더라면 아마 영락없이 교단에서 목사 제명 처분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요즈음은 토요일에 야구 구경을 가면 다음날 주일 설교에 지장이 있을 것이 염려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마음껏 응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주중 경기에만 가려고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겉보기에 거룩한 모습'이 결코 참된 경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생활은 그처럼 사람의 눈에 띄는 시간이나 장소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지는 못하는 곳,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은 어김없이 보고 계시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바로 하루의 고된 심방과 전도 사역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다시 한 번 자신의 하루를 돌이켜 보면서 기도를 하느냐 아니면 그냥 자느냐 하는 침상, 조금만 속이면 더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을 것이 분명한 거래를 하게 되었을 때에 적당히 세금을 떼어 먹느냐 마느냐를 망설이게 되는 계산기 앞, 눈만 조금 돌리면 옆자리에 있는 친구의 답안지가 다 보이게 되었을 때에 곁눈질을 하여 부정행위를 하느냐 마느냐 하고 갈등하게 되는 시험장, 온갖 음녀의 유혹이 손짓하는 어두운 밤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청춘남녀가 모텔로 들어가느냐 돌아가느냐를 결정하게 되는 길모퉁이 - 바로 거기에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저 위에서 지금 이 순간도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자신의 성결을 끝까지 지켜 내는 '경건한 신앙인'이 되느냐 아니냐가 판가름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몰래 카메라'는 무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일곱 눈'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조금도 안중에도 없는 듯이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식탐의 유혹과 게으름의 악습을 물리치고 부지런히, 규칙적으로 'exercise' 하고 절제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매사에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하고 '항상 감사하며 무시로 기도'하고 주일뿐 아니라 '주중의 예배와 기도회에도 규칙적으로 참석'하면서 자신의 심령을 꾸준히 단련시켜야만,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서의 신전인격자적인 마음과 생활'을 자연스럽게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육체의 연습'을 통하여 날씬한 몸매, 튼튼한 근육을 만들어 가는 것이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것처럼, 그렇게 성장하는 경건생활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 없이 '멋있게 보이고 흠모를 받게 되는' 최고의 '영적 매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택자까지 실족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 놓고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마귀의 미혹을 받을 때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신앙'으로써 '모든 악에서 떠난 순전한 경건생활'을 끝까지 아름답게 지켜내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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