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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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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2-17)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기뻐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썼습니다. 4절 끝에서도 “기쁨이 넘치는도다.” 했고, 7절 끝에서도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했으며, 9절 첫머리에서도 “내가 지금 기뻐함은”이라 했고, 13절 중간에서도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했으며, 16절 끝에서도 다시 한 번 “기뻐하노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기뻐한 것이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세운 교회입니다. 당시 그리스의 대도시이면서 아가야라는 로마 지역의 수도로서 세계화되었던 고린도는 번창하는 상업도시이며 자랑스러운 문화도시였지만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가운데 도덕적 부패가 극심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서기는 했지만 그 안에는 많은 도덕적 문제들과 당파와 분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가 점점 더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두 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바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방문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교인으로부터 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거짓 사도라는 비난도 받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모금한 연보에서 이득을 취했다는 오해도 받는 등 심한 모욕과 반대에 부딪쳤으며 그와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지속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를 떠나온 사도 바울은 그가 계획했던(고후1:16) 대로 또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대신 그가 고린도에 머물 때 그 교인들이 보여준 행태를 엄하게 꾸짖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꾸짖은 것은 아마도 그에 대하여 거짓되고 부당한 비방과 공격을 퍼부은 자들과 그들에 대항하여 바울을 바로 변호할 줄 몰랐던 교인들의 행태였을 것입니다. 그 편지는 지금 남아있지 않지만 소위 <눈물의 편지>라는 이 편지에 관해 사도 바울은 고후1:23과 2:1과 3-4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 자신이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썼다고 했고 분명 강경하며 격정적이고 비판적인 어투로 썼을 그 편지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근심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편지였지만 사실은 그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 대해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쓴 편지였고 고린도 교회와의 화해와 신뢰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편지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대신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며 이 편지를 교인들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고 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습니다. 드로아는 에베소의 북쪽에서 마게도냐와 마주보고 있는 소아시아의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 훨씬 더 가깝기는 했지만 어쨌든 에베소에서 육로로 고린도로 가기 위한 중간지점이었기에 거기서 바울은 디도를 다시 만나 그로부터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의 편지를 받아 본 결과를 보고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대했던 대로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고린도 쪽으로 더 가까운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고후2:12-13에서 사도 바울 자신이 그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복음을 전하러 드로아에 가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디도를 빨리 만나는 데 더 가 있었으며, 그러기에 거기서 전도의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마음이 편안하지 못해 다시 마게도냐까지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애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부터 돌아오는 디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도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사도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는 등 상당한 성과가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그 기쁨을 글로 표하며 또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본문 2절을 봅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거두는 연보를 통해서 이득을 취한다는 오해와 비방을 받았습니다. 또 그가 가르친 엄격한 신앙의 원칙을 따르려 하니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기도 하고 생활에 불편이 많다는 것 때문에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며 자기가 행한 일이나 가르침에 아무런 불의한 일이나 악한 의도가 없었으니 자신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화해하고 서로 간에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해명을 한 사도 바울은 그 해명이 혹시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그런 오해를 한 자신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염려하여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덧붙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그의 마음속에서 변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쓰기를 그들과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합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산다는 것보다 친밀감과 일치감을 강하게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한 데서 “함께 죽는다”는 말이 “함께 산다”는 말보다 먼저 나오는 것은 그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들의 죽고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어야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와 같이 주 안에서 죽고 주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들을 위하여 자기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그들이 이해하고 그들도 자기를 향하여 그런 사랑을 가짐으로써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한 것은 고후4:10-15에서 쓴 것을 다시 한 번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잇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비록 디도 편에 보낸 <눈물의 편지>에서 강한 질책을 했지만 사실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임을 밝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조금 더 위로하며 격려하고자 하여 쓴 글이 본문 4절입니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 담대하다는 것은 앞선 그 눈물의 편지에서 보듯이 아주 솔직하게 할 말을 하며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다”는 말은 비록 그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솔직한 말로 꾸짖기는 했지만 사실 그들에게 자랑할 것도 많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하면 온갖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그들로 인하여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칠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사도 바울인데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들을 심하게 질책한 <눈물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며 회개하고 다시 바울을 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기쁨이 더욱 컸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5-7절입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내친김에 너무 솔직하고 격정적인 <눈물의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내고 나서 후회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아주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 편지 때문에 회개하게 되었고 신앙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8-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말과 “세상 근심”이란 말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하나님이 주신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근심이란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하는데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는 사도 바울의 말 때문에 우리의 회개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은 구원에로 택하신 이들에게 믿음을 주시며, 그 믿음을 가진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참된 회개를 할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종종 하게 되는 참된 회개는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진전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 사도 바울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한 데서 구원은 이 믿음의 성장과 진전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은 진실한 회개로 나아가지 않은 채 근심에 싸인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상 근심”은 앞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는 달리 단순한 후회와 거기 따르는 걱정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하고는 상관이 없는 근심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애통과 바람직한 변화가 없는 근심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하나였던 가룟인 유다의 근심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와는 달리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것으로 그의 삶을 끝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작심하고 보낸 <눈물의 편지>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근심하게 한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본문 11절에서는 그 근심이 갖는 신앙적 의미를 반추해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 근심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변증하게” 하며 “분하게” 하며 “두렵게” 하며 “사모하게” 하며 “열심 있게” 하며 “벌하게” 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했다는 것은 더 진지하고 더 부지런히 신앙적으로 자신들을 돌아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변증하게” 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을 변호하며 증명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분하게” 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을 공격한 자가 분히 여길 만큼 그를 질타했다는 말입니다. 
“두렵게” 했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할 만큼 단단히 경고했다는 뜻입니다. 
“사모하게” 했다는 것은 자기들 때문에 상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들에게로 돌아오고 그들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갈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열심 있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도 바울을 위한 열심히 더 커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벌하게” 했다는 것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엄히 다스리게 했다는 뜻입니다. 

11절 끝에서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한 말이나 12절에서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한 것은 사도 바울의 그 <눈물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 때문에 그간 사도 바울과 사이에 있었던 긴장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잘못 때문이 아님이 밝혀졌고 바울을 위한 그들의 간절한 마음은 더 참되게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한 번 더 다둑거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16절의 글로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과의 사이에 있었던 불신과 의심과 긴장과 갈등과 근심이 사라지고 위로와 기쁨과 안심과 신뢰와 존중과 순종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재확인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15절은 우리에게 디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였다고 바울에게 보고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것을 디도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이 이미 두려워하며 떠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보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무슨 잘못이 있을 때 솔직한 질책이나 권면이 얼마나 신자 개인과 교회 전체에게 유익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교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무조건 침묵하며 덮고 지나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 어린 솔직한 질책과 권면은 회개를 낳고 신앙의 성장과 진전을 이루며 성도 간에 신뢰와 사랑과 존경과 기쁨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며 모두가 더욱 진실해지는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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