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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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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1-14)

디베랴에 나타나신 주님

부활 직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마28:7) 그 약속대로 주님은 갈릴리 호수 서편에 있는 디베랴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1) 

주님이 나타나실 무렵에 거기에는 일곱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2) 

베드로는 모인 무리에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 하고 배로 나섰습니다. 

“배”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은 것을 보면 그 배는 이전에 알려진 어떤 배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앞장서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본래 직업이었던 고기잡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고기잡이를 하게 된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엇갈린 평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세상 직업으로 돌아간 것은 타락한 것이며 잘못한 일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제자들이 빈둥빈둥 놀지 않고 고기를 잡은 것은 잘 한 일이라고 합니다. 제가 볼 때에 고기잡이는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한두 번 목격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지시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직업적으로 복귀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소일거리로 나섰을 뿐입니다. 나다나엘이나 도마는 직업적인 어부로 나타난 적이 없는데,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신다면 언제든지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고기잡이 현장입니다. 고기잡이 현장은 제자들에게 최선의 敎育場입니다. 주님이 맨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고기잡이 현장에서 깨우침을 주셨습니다.(누가복음 5장) 이제 새로운 깨우침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다시 고기잡이 현장에 나타나셨습니다. 

고기잡이는 인생의 두 가지 현장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우리가 살아가는 직업적인 일의 현장이요, 둘째로는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현장입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장면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은 장면입니다. 셋째는 153 마리의 물고기와 주님의 식탁입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첫 번째 장면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장면입니다.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3-5)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첫 번째 교훈입니다. 고기를 잡지 못한 원인이 뭘까요? 기술 부족인가요? 일기불순인가요? 아니면 어구가 나빴을까요? 노력 부족인가요? 결과적으로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최선의 조건을 다 갖추었고, 최선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기를 못 잡은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못 잡은 것입니다. 여기에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은 삶의 조건과 노력입니다. 조건만 좋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노력만 하면 만사에 안 될 일이 없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잘못된 假定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12사도 중에 일곱 명 이상이 직업적인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베테랑 어부들입니다. 어부는 전문 직업인입니다. 어떤 분은 어부라는 직업에 대하여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부는 일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다. 어부는 용기와 신념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깊은 곳으로 나아갈 줄 안다. 어부는 인내하고 견디는 사람들이다. 어부는 서로 힘을 합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어부는 숙달을 요하는 직업인이다. 배를 움직이고 도구들을 사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 

제자들은 밤중에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직업적인 어부들은 대개 밤중에 고기를 잡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안개와 수초와 기온을 피부로 다 느낄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배와 어구를 다루는데 익숙했습니다. 갈릴리 호수 구석구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옷을 벗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인생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의 조건 속에서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깨달음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면 된다!”는 신념에 가득 찬 단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이러한 신념으로 살아갑니다. “노력만 한다면, 성실하기만 하다면, 인생은 성공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세상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 갖출 것 다 갖추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알 때쯤 되면 사람들은 늙어 죽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6) 

세상살이에서, 또는 영혼 구원하는 일에서 우리는 이러한 자신의 무능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해도 안 되는 것이 인생임을 알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自暴自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혁명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세상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2013년 현재, 세계 지도를 펴 놓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세요! 무엇이 나아졌습니까? 여전히 죽이고, 여전히 전쟁하고, 여전히 속이고, 여전히 병들고, 굶주리고, 미워하고 여전히 모순에 가득 찬 채로 돌아갑니다. 혁명과 개혁을 한두 번 했습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사람의 모든 수단으로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신앙이 시작됩니다.
  
빈 그물로 돌아온 제자들에게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5) 주님은 제자들이 헛수고 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너희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것을 내가 안다. 이제 너희의 한계를 알겠느냐?”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얘들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례적인 호칭입니다. “얘들아!”(Paidiva)는 보통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통상 “소자들”(τεκνια)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제자들은 어린 아이(children, AV)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아무 소득이 없지 않느냐?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성실하고자 애썼는데, 조건도 좋고 환경도 좋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지 않느냐? 그런 분에게 주님은 오늘 다음 명령을 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두 번째 장면은 주님의 명령과 제자들의 순종입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6)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장면을 놓고 이것이 이적이냐 아니냐 논쟁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른편과 왼편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적이냐 아니냐, 또는 왼편이냐 오른편이냐 하는 논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명령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니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들 수 없더라”(6) 성공은 행운이 아닙니다. 순종의 결과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성공과 실패는 배 한 칸 사이”라고 했습니다. 배의 왼편에서 오른편까지 거리는 몇 발자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거리가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공을 찾아 우왕좌왕 몰려다닙니다. 성공은 누구를 모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께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성공 내용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순종의 개념을 상실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살던 곳은 서울 변두리의 빈민촌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다 드나들었습니다. 거의 매일 술주정뱅이들이 와서 소주병을 사 날랐습니다. 술에 취해 길에 누운 아버지를 아이들이 나와서 떠메어 가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 아버지가 술 취했다고 아버지를 멸시한 아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지니까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요즘은 세대가 달라졌습니다. 부모가 술 먹고 자식들에게 싫은 소리 몇 마디 잘못했다간 맞아 죽습니다. 부모가 명령한다고 순종하는 자식들이 별로 없습니다. 부모들이 먼저 자식을 불순종 하도록 길들여 놓습니다.  
  
언젠가 저희 집 큰 아이가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는데 가훈을 써 오라는 거예요. 위에서 물려받은 가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평소 가장으로서 자녀들에게 가졌던 신조를 써 줬습니다. 첫째는 화목, 둘째는 순종, 셋째는 진실! 그리고 특히 순종에 대해서 강조해 줬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너희보다 못 배우고, 너희보다 못났어도 너희의 부모이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 집 전통이다. 반항하고 불순종하면 국물도 없다!” 

저는 불순종에 대하여는 매우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애들이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순종의 훈련을 시켰습니다.  때로는 매도 들었습니다. 처벌은 매우 중요한 교육입니다. 잘 못한 일에 대하여는 당연히 벌을 받아아 합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처벌을 달갑게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반항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엄히 다스리면 아이들이 부모를 싫어할 줄 아시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왜 아이들에게 푸대접 받는지 아세요? 자업자득입니다. 어려서 철저히 훈계하지 못한 부모는 늙어서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저는 아이들을 많이 벌주고 훈계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좋아합니다.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이 제 앞에서 떼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번 안 된다 하면 그것으로 대법원 판결입니다. 별 이의가 없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 아이들은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효자들입니다. 제가 아이들을 엄히 다스렸던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자는 것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도 순종하지 않는 놈이 커서 하나님께 순종할 리가 없습니다.  
  
순종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행동에는 질문이 필요 없습니다. 실행에 옮기면 즉시 결과가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왜 떠나야 합니까? 어디로 갑니까? 단 한마디의 질문이 없습니다. 다만 떠나라 하니 떠났을 뿐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에 그는 이른 새벽에 집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왜 바쳐야 합니까?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질문이 없습니다. 그냥 바치러 나섰습니다.

순종은 질문이 없습니다. 순종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역사는 바로 순종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오직 한 가지 해답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앞으로 전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마라의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뭇가지를 집어 물에 던져 넣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서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사막의 반석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명령대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는 것이요, 여리고 성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명령을 따라 하루 한 바퀴씩 성을 도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질문은 없었습니다. 오직 순종의 행동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적은 일어났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절대적인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좋은 신앙은 순종하는 신앙이요, 제일 나쁜 신앙은 불순종의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도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도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저는 지금까지 많은 신학 교육을 받았고, 많은 성경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믿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켜 온 신앙 노선은 오직 한가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자! 저는 순종 속에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일 설교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저는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 정확히 전달해야만 저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르게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축복의 비결입니다.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순종하여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 순종하여 축복에 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153마리의 물고기

주님의 명령대로 따를 때에 153마리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11) 

153이란 숫자에 대하여 古來로 수많은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생략합니다. 숫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물고기가 많았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을까 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물고기를 주신 것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풍성한 축복의 의미입니다. 많은 물고기는 곧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순종의 결과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축복이 순종 속에 따라 옵니다. 제자들은 양식을 위해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양식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물 가로 나오자 주님은 식탁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숯불이 지펴져 있고, 떡과 생선이 놓여 있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12) 

주님은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서 식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 식탁을 천사가 준비한 식탁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성실히 살고자 힘쓰고 노력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십니다. 육의 양식도 준비하시고, 영의 양식도 준비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10) 

이 말씀 속에는 강한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밤새 허탕 쳤으나, 내가 잡게 해 준 생선을 함께 먹자!” 하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재산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과연 그렇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게 순종하라! 그리하면 많은 양식을 주리라!
  
둘째로,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려주신 영적 각성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그 까닭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시려는 의도 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영의 눈을 뜨게 만듭니다. 많은 고기가 잡히자마자 사도 요한은 언덕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최초로 부름 받을 당시(누가복음 5장)와 아주 흡사한 장면입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은 즉각적으로 호숫가에 서서 명령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시라!”(7)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다가왔습니다. 베드로가 최초로 주님을 만났을 때는 주님께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장)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그는 주님 곁으로 헤엄쳐 왔습니다. 이 당시 베드로가 겉옷을 걸치고 물로 뛰어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예의였다고 합니다. Barrett에 의하면,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인사는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당연히 옷을 벗은 상태에서 인사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목욕탕에서는 인사하면 안 되었습니다. 모두 다 벗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옷을 걸치고 뛰어든 것은 주님에게 대한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계시다면 어디까지나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며 따른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튼 요한은 물고기를 통하여 주님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고, 베드로는 주님께로 다가가는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물고기를 잡은 일 때문에 제자들은 모두 주님 곁에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사명에 대한 각성입니다. 잠시나마 목표를 상실했던 제자들,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잃었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제자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당시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었습니다. 그 당시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이제 주님은 여기서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잠시나마 삶의 목표를 잃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복음 5장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처음 장면에서는 그물이 찢어졌는데 여기서는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 영혼도 놓치지 않고 정확히 구원하리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주님에게 떠나달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주님에게로 기쁘게 다가 왔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일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고기 교훈에서 사명을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 속에서 사명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고기잡이는 영혼 구원의 사명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에서 인간 영혼을 낚는 것과, 물고기를 잡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어부들은 산 고기를 잡아 죽게 만들지만, 우리는 죽은 고기를 잡아 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잠시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명 잃고 방황하지 마세요. 부활하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명 찾으세요. 그리고 다시 고기 잡으러 가십시다. 갈릴리 바닷고기가 아니라 세상에 널려 있는 죽은 영혼들을 잡으러 갑시다! 그것이 오늘의 말씀이 전하는 최대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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