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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물(1) : 구원과 사죄 (엡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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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1) : 구원과 사죄 (엡 2:8-9)

: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찾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여러분에게 그 기쁨과 감격이 항상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낳은 자녀처럼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왜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까?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하지만 죄인인 사람을 위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죽게 된 사람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예수님을 주인으로 맞아 들여야 합니다. 다만 믿음으로 맞아들이면 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찾은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2-13) 

예수님을 믿는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영원한 사랑을 다시 찾았음을 확신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사랑을 다시 찾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선물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다시 찾은 사람들에게는 누려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복의 내용을 주일 예배 몇 시간에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성숙을 위한 기초 양육을 위하여 여섯 가지를 뽑아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누려야 할 하나님의 선물’(권지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신 첫 번째 선물은 구원과 사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과 자백을 통한 사죄의 확신을 가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 선물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에게 있는 기도 응답의 확신과 말씀을 통한 인도의 확신을 가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 선물은 십자가와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능력의 확신과 든든한 승리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상의 여섯 가지도 주일 설교 한 번에 다룰 수가 없어서 세 번에 걸쳐 들으려고 합니다. 주일 설교를 통해서 들은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당신이 누려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소책자를 통하여 통으로 암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후 예배 시간의 ‘새가족 섬김 세미나’를 통하여 숙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확신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정보는 많은데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펼치지 않아도 인터넷에 연결하면 정보가 넘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에서 보고 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모릅니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더 헛갈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확신이 없습니다. 

신앙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제법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는 못합니다. 그냥 그렇다더라고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에서 이런 단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확신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대 선물은 하나님의 선물과 함께 그 선물에 대한 확신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좋은 선물을 받아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선물을 자신이 받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선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확신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구원과 사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과 사죄를 확신하여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첫 번째 이야기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I.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당신은(=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2).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의심이 생길지 모릅니다. 

“내가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지금부터 뭔가를 잘못하게 된다면 나의 구원은 다시 취소될지도 몰라!”

이렇게 되면 당신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자기 모습만 바라보며 실망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처음에는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은 기쁨과 감격을 가졌지만, 자신의 삶에 변한 것이 너무 적은 것을 보면 정말로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자신을 볼 때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열심히 노력하여야 구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저는 1977년 1월에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방언을 하였습니다. 진동을 하는데 무릎을 꿇고 펄쩍펄쩍 뛰어 시골 예배당 마루 위를 밤새도록 돌아다녔습니다. 입신상태에 들어가서 누워있는 저와 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디론가 제가 끌어올려 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 생활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회개한 짓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의 모습이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부끄럽고, 여러분이 너무 실망할까봐 자세한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할 때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의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함과 더러움이 함께 있는 가증한 모습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 충만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전혀 충만하지 않은 모습에 절망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바울의 고백을 경험하였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가장 큰 고민은 이런 내가 지금 죽는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실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취소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자녀가 아닌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말씀은 에베소서 2:8-9 말씀입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 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믿어서 얻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여기에서 ‘선물[dw'ron/도론]’은 ‘희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곧 구원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우리가 잘해서 받은 것이라면 잘못하면 취소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중대한 교통사고를 내면 정지되거나 취소되는 운전면허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은 본래부터 우리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구원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자랑하려면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우리가) 구원의 이유를 당신(=자신)의 행위에서 찾는다면 분명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서 찾는다면, 감격 가운데 확신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구원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1:29 말씀입니다.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후회하심[ajmetamevlhto"/아메타멜레토]’이라는 말은 ‘취소할 수 없는’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부르심은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빼앗았다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2.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들을 당신의 마음에 새겨 놓으십시오. 그리고 의심이 생길 때마다 이 말씀들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구원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에스더라는 책 이름과 같은 이름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사 나라에서 아하스에로 왕의 왕비가 된 인물입니다. 이 당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은 많은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몹시도 싫어한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만은 왕에게 유대인들이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으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에 3:8) 모함하였습니다. 하만은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왕은 자신의 도장을 찍어서 ‘유대인을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에 3:13)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후 왕비 에스더를 통하여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이미 자신의 도장을 찍어서 한 번 내린 명령을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다’(에 8:8)는 것이 그 나라의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왕의 도장을 찍은 새로운 조서를 내렸습니다.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도록 하였습니다.’(에 8:11)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왕의 도장을 찍은 명령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도장을 찍은 구원의 약속이 취소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벧전 1:19)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신학적으로 논쟁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취소될 수 없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구원 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기에 고민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변하지 않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죄를 짓고, 잘못을 해도 좋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 구원 받은 이후에 짓는 죄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죄 사함에 대한 것입니다. 

  
II. 자백을 통한 사죄의 확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당신은(우리는) 때때로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당신을 찾아와 이렇게 비난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봐라! 너 또 죄 지었지? 그러고서도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 할 수 있느냐!”

먼저 알 것은 구원받은 신자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여전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으로 엄청난 잘못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우리가) 영적으로 게을러질 때, 진리의 말씀을 의심할 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할 때 얼마든지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신자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방해할 뿐 결코 구원을 취소시키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잘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자녀가 큰 잘못을 하였다고 해서 “아들아!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또는 “딸아! 네가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내 딸이 아니다!”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그렇게 말하는 분이 계시더라도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딸을 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잘하든 잘못하든 자식은 자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끊을 수 없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해도 잘못하면 뒤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라고 항상 관계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님 앞에서 제대로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잘못된 관계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범죄 한 신자에게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요한일서 1:9 말씀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에서 ‘자백하다[oJmologevw/호몰로게오]’는 말은 ‘동의하다’, ‘찬성하다’, ‘인정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것을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1:10). 

하나님께서 잘못하였다고 말씀하시면 ‘예 그렇습니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백이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킬 것을 분명히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우리가) 자백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모든 더러움에서 당신을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 자백을 통하여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자백이라는 말은 그렇게 유쾌한 느낌이 드는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백은 ‘자기가 저지른 죄나 자기의 허물을 남들 앞에서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백은 죄와 허물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자백’이라는 말은 무고한 사람에게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여 없는 죄를 만들던 공권력의 어두운 그림자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백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핑계나 회피가 아니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깨끗함, 즉 사죄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는 잘못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백하면 씻어주시는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죄만 기억하고 죄를 씻어주심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책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자백한 죄에 대한 즉각적이고 온전한 회복의 보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1:18 말씀입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새]고 선포하십니다.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2. 자백으로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나누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결국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에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고 하였습니다(눅 15:11-24).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종으로 맞아들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아들로 맞아주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주로 모시기 위한 회개는 일평생 한 번만 하는 것이지만, 자백은 외출 후에 돌아오면 손발을 씻는 것처럼 수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골동품 수집이 취미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수집벽은 유난해서 원하는 물건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당장 사와야 직성이 풀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여행가로부터 유럽 왕실에서만 썼다는 옛 도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들뜬 수집가는 도자기가 있다는 유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도자기는 이미 다른 데로 옮겨가고 난 뒤였습니다. 수집가는 도자기가 바로 자기가 사는 나라의 어느 사업가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곧 자기 나라로 돌아와 사업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도자기는 이미 그 사업가의 손도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다시 수소문을 거듭해 맨 나중에 도자기를 갖고 있었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자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넘겨주었다는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수집가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그것은 수집가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집가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골동품을 보관해 두는 지하 창고의 문을 열고 불을 켰습니다. 수집가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돌아다녔던 도자기는 바로 그의 집 창고의 진열장 한 쪽에서 은은히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 도자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헛고생을 하고 돌아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찬송가 429장 가사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1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영원한 사랑을 다시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함께 놀라운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 선물은 구원과 사죄입니다.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백을 통한 사죄의 경허을 하여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과 사죄를 확신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확신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인 동시에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믿는 여러분에게 구원과 사죄가 있습니다. 구원을 확신하시고, 고백을 통한 사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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