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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백성과 주의 백성 (출 3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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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백성과 주의 백성 (출 32:1-14) 

1. 구약의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거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유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재난과 환난을 당해 하루아침에 몰락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아니하고 갑자기 부는 강풍에 집이 무너져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한 자리에서 몰사당하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고름이 흐르고 있었는데 길바닥에 나 앉아 그릇 조각으로 그 고름을 긁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욥2:9) 

당신이 그래도 믿음을 여전히 지킬 셈이오. 하나님이나 저주하고 죽으라.” 며 저주를 퍼붓고 뛰쳐나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욥2:10)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앞서 모든 재산이 몰락했을 때는, “(욥1:21-22)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처절한 상황 가운데 위로한다고 찾아온 친구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공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된 것은 남이 모르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것이라며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을 내세워 욥을 공박한 것이었습니다. 욥은 그러한 친구들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과 친구들로부터 소외된 영적 고독감을 느끼며, 하나님께서 나타나 자신을 변호해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갈망하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내 발은 오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만 성실하게 걸으며,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건만!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건만!>

(욥23:1-12) “내가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욥의 이러한 고백처럼 인간은 어디를 가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아시고 계시지만 죄인된 인간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 도마가 예수께 “(요14:8)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며 하나님을 보여주시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9-11입니다.

(요14:9-11)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신 예수 안에 계신 것을 믿고, 그의 행하신 일과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1-3입니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보고, 그 말씀 가운데 사는 자는 바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누구든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탄식 중에 드리는 고백에서,환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항상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항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었노라는 고백입니다. 욥은 하나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살았습니다. 죽어서 그 가죽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반드시 보리라고 소망했습니다. 욥기19:25-27을 보겠습니다.

(욥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이렇게 하나님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욥이 기도와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통해 마침내 욥의 영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을 체험하므로 하나님을 보리라는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욥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험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42:5입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다윗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더니 그 언약, 곧 말씀을 보이셨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육안으로는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눈을 들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 분의 말씀 가운데 거할 때에 악인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25:14-15입니다.
 
(시25:14-15)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예수께서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성령과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예수께서 ‘진리의 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진리’, 곧 ‘말씀’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고 하셨습니다.(요1:14)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다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를 두고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0:30, 14:16-17을 보겠습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 보혜사 성령이 항상 함께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함께 계시게 됩니다. 예수 믿고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게 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심을 깨달았습니다. 히브리서11:1-3입니다.

(히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통해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 되던 때, 시내 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신 것은 모세와의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인도해낼 지도자로 세우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3:12입니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 “산”은 시내 산을 말합니다. 장차 모세가 십계명을 받게 될 ‘시내 산’을 두고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광야 길을 거쳐 ‘시내 산’으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그 ‘시내 산’으로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19:4-6입니다.

(출19:4-6)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제 십계명,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며, 하나님 앞에 모든 나라 백성들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출19:8)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 꼭대기로 부르시고 ‘십계명’(출20:1-17)을 돌판에 새겨 주시며(출31:18), 지켜야 할 절기들, 성막 건축과 제반 규례(출21-31장)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른 지 40일이 다 되어가는 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아론에게 몰려가서 말합니다. ‘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낸 이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소식이 없소.’(출32:1) 

모세가 40일이 다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신변에 무슨 사고가 난 줄로 생각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실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모세를 절대적인 지도자로 알고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던 백성들에게는 40일이 상당히 오랜 날로 여겨져 모세의 생존을 의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릴 수 없다며 모세의 형 아론을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신 신’(출32:4)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새로운 지도자로 여긴 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부재중 지도자로 아론을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출24:14) 이제 새로운 지도자로 세워진 아론에게 모세를 대신할 ‘신’(神)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모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세는 자신들이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바로 그가 자신들을 인도해 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세를 눈에 보이는 신으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15:8-21;창17:7)에 따라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셨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부르시어 그를 지도자로 세우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3:6-8,16-17 입니다.

(출3:6-8)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3:16-17)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에게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모세를 대신할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분명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지도자,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세움받은 하나님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눈이 보이는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인 모세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바르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 역시 견고히 서있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한 것은 오랜 기간 애굽 생활을 통해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인 우상들만을 접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보고서야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이 되게 하여 자신을 구원하시고, 애굽 사람은 그 홍해에 수장시키신 ‘큰 일’을 보고서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종 모세를 믿었었습니다.

(출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서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모세가 보이지 않자 여전히 ‘보이는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믿음이 ‘보지 않고도 믿는 자’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요4:2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이 숭배했던 ‘눈에 보이는 형상들’을 떠올리고 ‘눈에 보이는 신들’을 만들자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를 대신할만한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론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 집단 폭력을 휘둘러 아론을 죽일 듯이 포악한 분위기에서 ‘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결국 아론은 그 포악한 폭력집단의 요구에 굴복해서 금 패물들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 금 패물들은 하나님께서 장차 광야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 때 사용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창세기15:13-14입니다.

(창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언약에 따라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여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출3: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 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출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거룩한 성막을 만드시고자 주신 금(물질)을 오히려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복을 이처럼 엉뚱한 데 오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가져온 금으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형상을 주조하는 기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배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조각술과 공예술, 그리고 주조술 등이 매우 뛰어났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황소 형상의 아피스(Apis)를 비롯, 인간의 모습을 가진 프타(Ptah)와 오시리스(Osiris), 재칼의 머리 형상을 가진 아누비스(Anubis), 악어의 머리 형상을 가진 소베크(Sobek), 매의 형상을 가진 호루스(Horus)와 라(Ra), 따오기 머리 형상을 가진 토트(Thoth), 인간이 형상이나 숫양의 머리 형상을 가진 아문(Amun) 등을 주요 신으로 섬겼고 이외에도 태양과 나일 강 등 자연도 숭배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 형상은 애굽의 우상 아피스(Apis)를 본뜬 것이 분명한데, 그들은 이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출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형상화하여 금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끌어내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그 재앙들을 통해 애굽의 모든 우상들이 철저히, 그리고 무참하게 깨뜨려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서도, 다시금 ‘금송아지 신’을 만들어 진실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들은 우상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 또한 범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출32:5-6)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론은 지도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폭력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라고 요구했을지라도 그 부당성과 하나님 앞에 분명한 죄악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아론이었기에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조차도 막아설 엄두도 못내고 이렇게 공포합니다.

(출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아론이 말한 ‘여호와의 절일’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유월절이나 무교절, 그리고 초막절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눈에 보이는 신, 금송아지에 대한 축제의 날을 뜻합니다. 금송아지를 가리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여호와의 절일’은 그 금송아지 숭배를 위한 절기로 말한 것입니다. 고대 이방 종교의 축제는 음주, 가무(歌舞) 및 부도덕한 성행위로 이루어졌습니다. 애굽 생활에서 이런 것들을 익히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절일’ 이라는 말을 그러한 이방인들의 축제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나 ‘(출32:6)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는 것은 이방 종교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방 종교의 우상숭배에는 필수적으로 난잡한 성행위가 따르게 됩니다. ‘뛰놀았다’고 하는 것은 ‘흥겹게 놀았다.’는 뜻인데 이는 곧 육체적 환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당시 이방 우상 숭배 종교에서 황소 신, 아피스(Apis)는 ‘힘’과 ‘생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형상 앞에서 ‘뛰노는 것’은 곧 성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3.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0:6입니다.

(고전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보고서야 믿는 믿음, 다시 말해 뿌리가 없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자기들 눈에 보여야만 믿는 얄팍한 신앙이 ‘눈이 보이는 우상’을 만들게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딤을 보고, 모세가 그들 중에 없다는 사실이 마치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모세 대신에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청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모세’라는 한 인간을 ‘자기네들을 인도하는 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순전히 모세에게만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모세가 일일이 지도해 주고 모세가 손잡고 인도해 주어야만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뿌리박은 신앙이 아니라 모세라는 사람에게만 의존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기초부터가 잘못되어 있는 신앙은 그 모세가 그들 곁에 없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리는 성도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부모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고, 자식이 주일마다 교회에 모시고 나오니까 그럭저럭 참석하는 예배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목장의 목자들이 강권하는 손에 이끌려 겨우 지탱되는 교회 출석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혹 ‘목사님이 좋아서’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이 그처럼 사람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신앙으로 끝나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기본 뼈대조차 갖추어지지 못한 신앙으로서, 우상의 미혹에 아주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허약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곁에 있는 성도나 교역자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그 출발 단계에서는 도와 줄 수 있고 또한 먼저 믿는 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에 인도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말씀 위에 자기 신앙의 기초를 세우면서 자립하지 못하고 계속 그처럼 다른 사람에게 끌려만 다니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쉽게 시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의존하던 사람이 사라지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시 하나님을 자기네들 편리한대로 정의하고 판단하면서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불렀고, 또 아론도 그 금송아지를 두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더 나아가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즉 그들은 새로운 신을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을 이제 그 금송아지를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서 정의해서 만들어낸 신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자기 편리한대로 섬기는 것, 바로 이것이 ‘금송아지’ 종교이며 하나님을 극단적으로 모욕하는 최악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울삼아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 굳건하고 건강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이방인들의 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32:7-10입니다.

(출32:7-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지, 모세 아니라 그 누구 앞에서도 ‘네 백성’이라고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여기에 와서는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네 백성”이라고, ‘이 백성은 이제 내 백성이 아니고 모세 너의 백성이다.’라고 아주 쌀쌀하게 말씀하고 계실 정도로 크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즉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백성은 이미 자신의 백성이 아니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결코 부르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백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이 곧은” 즉 걸핏하면 하나님께 고집스럽고 교만스럽게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예 다 진멸하여 없애버리고, 그 대신에 모세 한 사람의 자손을 통하여 완전히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을 아예 새로이 만들어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모두 없애버리시고, 믿음의 자손을 다시 모세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진노하셨는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어떤 기도를 올렸습니까? 출애굽기32:11-14입니다.

(출32:11-14)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무엇보다 모세는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자기 백성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으신,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모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간절하게 호소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주의 백성”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의도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그들이 결코 ‘자기의 백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님 당신의 백성’이라고 자기편에서 고쳐서 아뢰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진노하셨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원래 ‘자기 백성’된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변치 못할 사랑과 자비의 성품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하시도록 가만히 두면 훨씬 더 편할 일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불평 원망하고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서도, 며칠 지나지 않으면 또 다시 믿음 없는 행위들을 반복하는, 그 골차 아픈 백성들은 이 기회에 깨끗이 싹 처리해 버리고, 아예 완전히 순수한 씨만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나간다면, 그보다 더 편하고 이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세는 아무 문제없는 완벽한 사람들만 모인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문제 많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완벽한 백성으로 만들어 나가는 쪽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을 여기서 다 진멸시키시면 애굽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탄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구원해 주신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호소하면서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기를”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이스라엘 백성을 번성시키고 축복해 주시겠다고 이전의 선조들에게 내려주신 ‘언약’을 따라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그대로 일치하는 기도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바로 이것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서 그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입니다. 예수께서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며 용서를 간곡하게 구하는 모세의 기도,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따라 드린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는 뜻을 돌이키시고 형벌을 내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만약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즉결 심판하신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일 이 세상에서 모든 죄인들을 다 깨끗이 진멸하시고 의인 한 사람만 남겨서 그 자손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워나가고자 작정하셨더라면, 저와 여러분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오늘까지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스스로 의로운 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주가 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용서해 주셔서 의인을 만들어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바로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으신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그리고 죄를 벌하시는 공의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오히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지극히 선하신 성품,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비록 한때에는 금송아지 숭배와 같은 최악의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조차도 베풀어질 수 있는, 실로 무한한 인자와 선하심으로써 오늘도 죄인을 찾아와 주시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사랑과 자비가 항상 여러분에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 내리는 신앙생활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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