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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 사함의 은총은 거룩함으로 (시 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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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의 은총은 거룩함으로 (시 32:1-11)
     
오늘은 “죄 사함의 은총은 거룩함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복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참회의 시인데, 참회와 함께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교훈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중요한 사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관계로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서4:6-8 말씀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롬4:6-8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을 설명하면서 다윗의 시편, 시32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며,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요, 교부인 성 어거스틴은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히 죄라고 할 때에 죄는 도의에 벗어난 악한 행위, 악한 일을 말합니다. 정도에서 벗어나 벌 받을 만한 일, 법률을 위반하여 형벌을 면치 못할 불법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순종하지 아니한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 한국교회는 죄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죄를 말하지 않습니까? 왜 교인들이 죄와 회개에 대하여 듣기를 싫어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다 죄인들인데, 무슨 죄를 말하고, 듣기에도 거북하고 부담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죄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교인들을 나무라는 설교를 하지 말라, 교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설교를 하지 말라, 왜 많고 많은 교회 중에 죄에 대하여 설교하는 교회에 다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다 지성인요, 다 잘 사는 시대인데,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시절에는 목사가 설교 시간에 잘못을 지적하면 우리가 잘못한 줄로 알고 반성도 하고 자숙하는 기미도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당회에서 불러 책벌하면 잘못했다고 그 책벌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장로님은 동리에서 마지못하여 권하는 술을 한 잔 마셨다고 하여 소문이 났으니, 교회에서 책벌합니다. 한 번의 수찬정지를 내립니다. 그러면 “예, 잘못하였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고 자숙하였습니다. 그러면 목사님도 내가 교인들을 잘못 가르치고 교인들을 잘못 지도하였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목사가 그런 책벌을 내린다고 하면 내가 누군데, 인격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오늘 시대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달려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디 이 교회만 교회냐, 나가달라고 하면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안 믿는 사람과 결혼시키거나 주일에 결혼하면 책벌하였습니다. 요즈음 그랬다고 하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무얼 모르는 목사라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아무도 죄를 말하지 않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다 선남선녀인줄 압니다. 죄를 말하지 않는데, 죄를 해결하고 용서받는 방법도 모르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들이 죄를 말하지 않고, 이것은 죄라고 지적해야 하는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회개하라는 설교를 하지 않으므로 한국교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니까 회개할 줄도 모르고, 용서의 감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무엇이 죄인지 모르니까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세상 사람이나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손가락질 받는 줄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악해지고 더 싸우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서로 비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죄를 말하지 않는 설교, 용서받은 감격을 말하지 않는 다 좋은 이야기의 설교로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감격이 없습니다. 

저는 세례 문답을 할 때에 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구원받기 위하여 교회에 다닌다고 대답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죄인, 심판받아야 마땅한 죄인, 이대로 죄를 짓다보면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속하여 주신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느냐, 죄 용서함을 받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죄, 아무리 가리고 지우고 없애려고 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죄를 해결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고 죄 용서함을 받으려고 교회에 오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지 아니하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앉아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지난 죄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죄가 없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하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일평생 기도할 때마다 이 죄인이 왔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여 또 죄를 끌어들이고 죄와 더불어 살고, 지은 죄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 가도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 와야만 죄를 말하고 우리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하루는 유다 왕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공동번역 개정 성경, 지금 천주교회가 공인성경으로 사용하는 번역으로 말씀드립니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왕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단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 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나는 네 상전의 딸과 아내들까지 네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딸들까지 너에게 주었다. 그래도 모자란다면 어떤 여자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나를 얕보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였다. 암몬 군의 칼을 빌려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야훼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네 당대에 재난을 일으킬 터이니 두고 보아라. 네가 보는 앞에서 네 계집들을 끌어다가 딴 사내의 품에 안겨주리라. 밝은 대낮에 네 계집들은 욕을 당하리라. 너는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했지만, 나는 이 일을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란 사람,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의 부인이 몇 사람인데, 또 남의 부인까지 탐을 내고, 그 여자 밧세바가 임신하니, 남편인 우리야를 전선에서 불러들여 아내에게 들어가 아내와 자게 하여 임신했다고 꾸미려고 했습니다. 충성된 군인 우리야는 휴가를 받아 왔지만, 왕궁에서 병사들과 함께 자고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어찌할 수 없으니, 사령관에게 보내는 밀서를 씁니다. 요압 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야를 암몬과의 전투에서 최전선에 내보내고 후퇴하여 적군에게 죽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 내용을 밀지를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야 그 사람의 손에 들려서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세상에 완악하기로 다윗과 같이 완악하고 죄질이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보실 때에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고 하십니다. 행13:22절에 “...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다고 하셨는데, 다윗을 만나니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곧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합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면 그런 회개는 당연하고 쉬운 회개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요, 민족의 생사권을 가진 막강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려 있었는데, 나라를 통일한 왕이요, 사울 왕 사후에 민족의 희망이었고, 등불이었습니다. 

그런 왕에게 한 여자는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큰 죄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왕들은 수많은 처와 첩들을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많은 여자 중에 한 여자가 밧세바라고 하면서 선지자에게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라고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밧세바를 취한 것, 우리야를 전장에 내다 죽인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죄로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밧세바를 취한 죄를 입으로는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종일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에 그의 뼈가 쇠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다윗을 짓누르시는 것 같아 진액이 다 빠져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잉태한 것으로 죄인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죄의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충직한 군인 우리야를 내다 죽이면서 그의 아내를 탐내다니, 천벌을 받을 것으로 알고 아파하였습니다. 

오늘 시32편은 죄사함 받은 사람의 복이 가장 큰 복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죄를 허물(페샤)이라고 하였고, 또 죄(하타아)라고 하셨고, 정죄라는 말에서 죄에 해당하는 말도 또 하나의 죄(아온)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허물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고의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을 허물이라고 합니다. 

죄라고 하면 표적을 벗어나다, 빗나가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정죄라는 말에 죄에 해당하는 ‘아온’이라는 죄는 왜곡된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악을 저지르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의 같은 동의어로 죄를 말합니다. 

죄사함을 받는 것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죄의 짐을 치우시고 옮겨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가리움을 받는다는 말은 더러운 죄를 밖으로 보이지 않도록 무엇으로 덮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 의로운 옷을 덧입혀서 더러움을 보이지 않게 하십니다.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죄인이 지은 죄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죄를 고하고 토설해야 하는데, 죄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아니할 때는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3-4절에 “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죄를 아파하고 잘못을 인식할 때에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죄는 자복해야 합니다. 죄를 하나님께 아뢰고, 숨기지 말아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5-6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있는 그래도 이실직고해야 회개입니다. 죄를 포장하고 그럴듯하게 둘러대지 말고, 사실 그대로, 범죄한 그대로 토해야 합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거나 무엇이 좋다고 죄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까?

본문 6절에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죄를 깨달을 때”라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깨달을 때, 죄를 진정 죄라고 인식할 때가 축복입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죄를 말해도 전혀 감각이 죽었다고 하면 하나님이 나 몰라라 하실 수도 있습니다.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를 부끄러워하고 아파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멸망합니다. 

여러분, 지명 수배된 죄인이 자수하면서 이제는 평안히 잘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의 복을 주시고, 사유의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전에 고등학생 시절에 우리 집에 전세를 들어 살던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부 싸움이 심하였습니다. 의견도 충돌되고, 한편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에서 지고 들어가면 싸울 일도 아닌데, 싸웁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그만 수면제를 과다하게 먹고 쓰러졌습니다. 남편의 직장에 전화를 하고 부인을 앰뷸런스에 태우고 병원에 갔습니다. 당시는 수돗물로 위를 씻어내는데, 부인이 깨어났는데도 의사는 봐주지 않습니다. 물을 강제로 먹였다가 빨아내고 나중에는 부인이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해달라고 애원하여도 먹은 약을 토하고 씻어내는데, 의사는 나쁜 약을 조금이라도 장에 남겨두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약물을 씻어내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독을 남겨두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독을 토해내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7절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이 시는 마스길입니다. 교훈적인 시편입니다. 8-9절에 다윗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한 사람도 없음을 보시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인으로 보아주시고 의인들로 하나님 여호와를 기뻐하게 하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회개는 신앙의 출발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통회 자복하는 것을 기쁘게 용서하십니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지만, 상한 심령으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시다. 무서운 암 덩어리를 그대로 두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에 맡기고 그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몇 절 말씀드리면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사1:18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43:25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44:22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55:7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103: 12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라고 하셨습니다. 

미7:19입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회개는 입술만의 고백으로는 안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죄 사함의 은총은 거룩함으로”라고 했습니다. 행복보다는 거룩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죄짓는 기계라고 생각됩니다. 빨리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죄와 상관이 없는 참된 나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할 때에 이 땅의 모든 탐심과 죄를 내려놓기에 감사합니다. 참회할 수 있는 마음도 우리 하나님이 주십니다. 참회할 수 있는 마음이 들 때가 바로 주님을 만날만한 때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말씀하십시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삶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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