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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자 (요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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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자 (요 3:17-21)


1998년에 수능 만점을 처음으로 맞아 천재 소녀로 알려진 오승은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마친 후에 지금은 하버드 대학에서 생물물리학을 연구하며 박사 후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승은 양은 공부하다 힘이 들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위로를 받고 또 새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기자가 과학과 신앙은 서로 대립되는 영역이 아닙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오승은 양은 과학과 신앙은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알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연 앞에서 교만을 떨며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허함으로 그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과학에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의 원리를 보면 볼수록 신비함 그 자체입니다. 어떤 원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이 사용하는 물은 두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수소이고 또 하나는 산소입니다. 수소와 산소는 모두 기체입니다. 수소와 산소는 불에 잘 탑니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합해져서 물이라는 액체가 만들어집니다. 불에 잘 타는 수소와 산소로 만들어진 물은 불을 끄는데 사용됩니다. 상극의 요소들이 어떻게 이런 변화를 일으킬까?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원리입니다. 이런 자연의 원리는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원리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섭리를 사람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아멘의 신앙’입니다. 아멘의 동사형은 수동태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믿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믿어 구원에 이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의 의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기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에 도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빛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예수님은 어둠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죽음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어둠의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어둠에서 행하는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빛 앞에서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숨겨질 수 있는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빛을 거부하며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수치스런 모습을 빛 앞에 내어 놓으며 빛을 통해 어둠의 내용을 씻어 냈습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나온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빛에는 세 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먼저는 빛은 드러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빛이 비취는 곳에는 미세한 먼지나 작은 얼룩까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취는 곳에는 숨겨진 죄와 부정함, 그리고 어둠에 감추어서 가려 두었던 추한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자신의 허물과 약함이 숨김없이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빛이 비취는 영적으로 밝은 곳을 싫어하고  불안해합니다. 본문 20절 말씀에는 ‘사람들이 이 빛을 미워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며 그 속성을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사회학자들은 GNP가 2만 불 시대가 되면 익명의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자신의 신상을 숨기려는 의식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 속에 들어가 숨습니다. 가능하면 이웃과 담을 높이 쌓고 교류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과거의 약한 모습과 허물 있는 생활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불안하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의 약점을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런 상황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으로 어두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취는 곳은 어두움으로 감추었던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남들에게 숨기고 있었던 허물과 죄가 다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 허물과 추한 죄와 냄새나는 것들을 다 드러나게 하시며 그것으로부터 밝은 빛의 세계로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믿음은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나가는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첫 관문입니다. 회개의 첫 관문에서 진실하지 못하면 진정한 신앙의 생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둘째로 빛에는 깨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빛이 비취면 감추어졌던 비밀과 진리가 깨달아지게 됩니다. 비밀은 영어로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씨크릿(Secret)과 미스터리(mystery)라는 단어입니다. 둘 다 비밀을 말하지만 씨크릿은 보여주지 않아서 모르는 비밀을 말합니다. 미스터리는 보여 주었는데도 모르는 비밀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과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미스터리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는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예수의 빛 안에서 구원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소유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빛에는 생명력을 공급하는 힘이 있습니다. 요즘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모든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 땅의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흙은 연약해 보이지만 모든 생명을 품고 소생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땅의 온갖 에너지를 먹으며 자라납니다. 그리고 하늘의 햇볕과 비가 있어야 합니다. 적절한 비와 햇볕은 모든 동식물에게 에너지를 만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바람입니다. 바람은 땅의 영양분을 끌어 올리게 하는 역할을 하고, 땅의 수분을 하늘로 올려 보냅니다. 바람은 구름을 형성하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합니다. 바람은 하늘과 땅의 모든 에너지를 조화롭게 움직이게 하며 생명의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심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만들며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구현하는 힘입니다. 

성령 안에서 비춰지는 예수님의 빛은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8절에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햇볕은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린 식물에게는 에너지를 만드는 힘이 되어 푸르고 왕성하게 자라게 합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식물은 햇볕에 말라 죽게 됩니다. 

이것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면 영적인 회복과 치유, 그리고 생명의 성장이 있어 영생의 길로 들어갑니다. 반면에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으면 영적인 질병과 상처로 말라 버리고 심판, 즉 멸망의 길로 들어갑니다.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영생이 되는 힘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힘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가정을 갑자기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사님이 심방 오신다는 말을 듣고 집사님이 어지러운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없기에 방에 깔아 놨던 이불을 뚤뚤 말아서 장롱 안에 대충 집어넣었습니다. 방 안에 널려 있는 여러 옷들과 잡다한 것들을 모두 장농에 몰아서 넣었습니다. 순식간에 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목회자는 심방을 하면 대체적으로 장농을 등지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목사님이 장농을 뒤로 하고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장롱 문이 열리며 온갖 잡다한 것들과 이불이 목사님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습니다. 목사님은 물론이고 심방 대원들도 기도하다 말고 깜짝 놀랐습니다. 집사님은 민망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장롱 문이 열리면서 쏟아진 내용물들은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나의 진정한 모습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을 때의 모습이 아니라 나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입니다. 나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할 때도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 내 모습이 나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약하고 추한 모습을 가능한 한 드러나지 않게 합니다. 위장을 하기도 하고 참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 혼자 있을 때는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활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새벽 기도회를 갈 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는 분이 있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보지 않을 때와 장소에서 도박을 하고, 음란을 행하고, 추하고 악한 행동을 합니다.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나의 현재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 바로 나의 영성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나 혼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경건의 훈련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고 혼자 있을 때에도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자신을 관리하며 어둠이 아닌 빛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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