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음의 내용인 침례 (벧전 3:18-22)

첨부 1


복음의 내용인 침례 (벧전 3:18-22) 

  
기독교가 정체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리를 무시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만 교회에 도입하기에, 성경적이지 못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초대교회와 같이, 예배와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2가지로 설명한다. (1) 말로 전한다. (2) 보이는 성례(침례, 성찬)를 통하여 전한다.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 성례에는, 침례와 성찬 2가지가 있다. 거룩한 예식인 성례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경의 핵심내용,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침례는 복음 그 자체이다. 

1.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죄인들을 위해서 단번에(하팍스, 아 + 파스 = 모든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한 방법) 죽으심에 있다. 특히 불의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 이유는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쌓은 공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접해 보면, 다른 유형의 자서전이나 전기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특색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은 죽기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죽음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은 다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의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자연적인 죽음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그 죽음은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 여기서 의인은 단수고, 불의한 자는 복수로 되어있다. 의인은 한 분, 예수님만 의인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기 위해 죽으셨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분명히 이런 목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여기에서 인도(프로사고)는, 왕을 만나 뵈려고 오는 사람을, 왕 앞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왕이 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 육체는 (참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돌아가셨다.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케륏소).” 이 구절이 성경에서, 가장 난해 구절이라고 말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 전체적인 말씀과 조화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구절은, 연옥을 말하지 않는다. 연옥은 인도종교인 자이나교에서 들어왔다. 
  
연옥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시점은, 면죄부 판매를 허용할 때였다.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공덕을 쌓는 행위로,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면서, 많은 돈을 거둬드렸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후의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사후의 세계에서 위치가 정해진 다음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음을 말한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옥에 있는 영들은, 20절에 ‘그들’이라고 잘 설명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다.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죽었던 무리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약속대로 죽으시고 승리자가 되심을 선포하셨다. 
  
18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내가 불의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승리했다”면서, 지옥을 향해 선포하셨다는 말이다. 그때 옥에 갇힌 자들은, 땅을 치며 이를 갈며 슬픔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단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 구절을 들먹이면서 “영만 부활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는 아니고, ‘영’에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 내가 재림주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이 말은, 성령님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성령이라는 말이다.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고 부활했다. 
(롬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2. 복음의 모형과 실체인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20下)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넘쳐나는 물, 넘쳐나는 홍수 속에서, 노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았다. 방주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음과, 몇 가지 동질성이 있다. 방주는 예수님의 예표이고, 그림자이다. 실체는 예수님이다. (창6장)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1)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창6:14上).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노아가 방주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노아에게 먼저 말씀했다. 이처럼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문을 닫았다. 그래서 밖에서는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방주 속은 안전했다. 홍수가 나서 아무리 범람하여도, 방주는 심판의 물 위에 떠 있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의 안전을 대변해 준다. 지옥불도 주 안에 있으면, 해칠 수 없다.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도록 하셨다(창6:14下).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다. 고페르(집에 거한다) 나무와 역청(코페르, ר󰘵󰗔몸값, 속전)을 칠하라고 했다. 
역청은 피와 같은 모습인데, 카파르(용서하다, 속죄하다)는 말에서 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한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게 만든다. 그래서 신자들을 미혹한다. 이단이 왜 위험한가? 사신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주를 신격화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 각 시대마다 구원자가 다르다는 말이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구원자를 세웠다는 말이다. 노아시대에는 노아, 모세시대에는 모세, 예수님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듯이, 말세에는 그 시대의 목자, 구원자, 중심인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교리는 이단사상이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구원자를 찾고, 만나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3) 말씀을 믿고, 방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방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얼굴이 예뻐야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믿고 들어가면 된다. 어떤 씨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은혜로 들어간다. 구원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주를 준비하시고,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해 주심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방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들어가야 한다. 자기 발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구원의 영광스러운 사역 앞에, 스스로 응답하길 요구하신다. 홍수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이 사건은,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에 관한 아름다운 예표다. 노아시대에 물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 그런데 방주 속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은 모두 살았다. 
그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모두 물 속에 들어갔지만,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은 살았다. 똑똑하고, 착하고, 예쁘기에 구원받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믿고, 방주 속으로 들어갔기에 구원받았다. 

3. 침례의 의미(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 신령한 구원의 표인, 침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는 침례의 모형이라고 한다.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에 대한, 외부적인 증거요, 확인이다. 이제는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다. 
  
그러면 여기서, 세례와 침례를 무엇이 맞는지, 살펴보자. 세례(ㅎ란티스모스, ‘ραντισμός)는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죄를 씻는다는 의미다. 죄를 씻는 개념은, 이란 종교 ‘미트라’교에서 왔다. 또 조로아스터교로 흘러가고, 인도로 들어가서, 나중에 천주교회의 세례가 된다. 
그러나 침례(밮티스마, βάπτισμα)는 물속에, 몸이 완전히 잠긴다. 뜻은 ‘염색한다, 연합’이란 뜻이다. 침례와 세례가 똑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뜻이 너무나도 다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죄가 있단 말이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고 하면, 그는 이단이다.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오시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선포하였다. ‘어린양’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죄인들의 죄를 양에게 짊어지게 하여,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그 제물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인 제물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우리가 죄용서 받음은, 그냥 용서받음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다시 올라올 때,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침례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복음을 확실히 몸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침례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며 부활의식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침례가 얼마나 복음을 잘 표현하는 예식인가? 성경은 침례를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베풀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침례를 세례로 바꾸고,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들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사제의 권위 앞에 절대 복종하도록, 막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그래서 세례(영세)가 원죄를 없앤다고 가르친다. 
  
(요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을 세례로 바꾼 후에, 유아 세례를 받음으로, 원죄가 제거되고, 성화 되는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유아 세례를 만들었다. 
  
이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세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 모인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을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부터는 세례만 실시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고집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있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했다.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는 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였다면,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구원자로 여겼으니, 잠시 십자가에서 내려가, 침례를 받고 올라오자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없다. 
침례식은 쉽게 말하면, 결혼식과 같다. 오늘날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초라하게 해도 결혼식을 치렀어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이 성립된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분명히 회개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말은,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와 침례는 의미가 다르고, 성경이 침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을 때,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음을 침례로, 신앙고백을 하고 선포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성이 있다. 
(벧전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니라” 침례를 받으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주님께 복종한다. 얼마나 영광스런 모습인가? 영광의 주님이, 함께 함을 믿고, 고난을 이기자.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는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며 행복하게 살게 됨을 상징한다. 침례는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침례를 통해,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침례가 중요하기에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었을까?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침례를 받았는가?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하는 책이다. 침례를 통해 주님과 연합함을 느껴보자! 
결론이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잘 못해서, 결혼도 앙코르 결혼식을 행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를 행했거나, 침례를 받았다면, 다시 행해 보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주님과 함께 연합되었다는 감격을 느끼는, 귀한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