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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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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롬 12:1-2)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치유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영과 혼과 몸과 생활과 가정과 관계까지도 치유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배에 성공하셔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고 인생에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식을 갖춘 예배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 혹은 심방예배, 가정예배, 회사에서 드리는 신우회 예배 등은 다 같은 형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형식을 가지고 드려집니다. 또 하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거룩하게 삶도 예배입니다. 이런 것은 생활의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등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형식을 갖춘 예배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습니다. 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도 받고 은혜도 체험합니다. 그런데 형식이 있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예배에서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각 사람마다 생활환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도 다릅니다. 그리고 하는 일도 다릅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사느냐, 날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느냐 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니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영적 예배는 형식을 갖춘 예배와 생활 속의 예배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영적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찾아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절).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 영적 예배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뭔가 신령한 것 그래서 몸하고는 뭔가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영적 예배는 몸으로 드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을 갖춘 예배이든 생활의 예배이든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시간을 잘 지키는 것도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구약시대에 제물을 드릴 때 제물 전체를 드렸습니다. 다리는 빼놓고 드리거나 심장을 빼고 드린 것이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양의 뒷다리를 좋아한다고 뒷다리만 빼놓고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안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시간이 한 시간이라면 한 시간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거나 중간에 전화를 받거나 졸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하는 것은 온전한 예배의 방해 요소입니다.
   
찬양을 할 때도 힘을 써서 찬양해야 합니다. 박수도 힘차게 치고 목소리도 크게 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힘껏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아멘도 힘 있게 해야 합니다. 왜요?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몸을 거룩한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헨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어렸을 때에 너무 가난해서 구둣방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 구둣방 주인은 아주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구두 하나를 만들 때마다 아주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언사이드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아저씨, 대충대충 만들지 왜 그렇게 정성을 들여 만드세요?” 구둣방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구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구두를 만든단다.” 신실한 믿음으로 사는 구둣방 주인은 구두 하나를 만들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생활의 예배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구두를 신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만든 구두는 확실히 달라”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이언사이드는 그 구둣방 주인의 신앙과 신실함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언사이드도 구둣방 주인처럼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생활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몸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6:19,20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우리의 몸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내 몸 속에 오셔서 그때부터 나를 통해서 사셔야 합니다. 그것이 몸으로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믿는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은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음란을 피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아주 음란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크리스천 젊은이들 가운데는 혼전 성관계는 서로 사랑한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동을 보는 것 정도는 취미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19금의 영화를 보는 것, 19금의 소설을 읽는 것 우리의 몸으로 죄를 짓게 할 수 있습니다. 

고전 6:18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음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해서 롬 1:27에서는 부끄러운 일, 그릇됨이리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면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불의의 무기가 되어 마귀를 기쁘게 할 수도 있고 의의 무기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롬 6:12,13을 보면 죄가 몸을 지배하고 몸이 사욕에 순종하면 몸이 불의의 무기가 됩니다. 반대로 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의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의의 무기가 되고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2절). 
   
싱싱한 과일과 썩은 과일이 함께 있으면 썩은 과일이 싱싱해지는 것이 아니라 싱싱한 과일이 썩어버립니다. 그런 것처럼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살 때는 믿음으로 살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소돔성이 멸망할 것을 알고 기도했던 아브라함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벧후 2:7에 보면 ‘의로운 롯’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렇게 의로운 롯이 소돔성에서 악인들과 살다보니 그들의 악에 물이 들었고 그 자녀들도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함께 잠을 자고 모압과 암몬 족속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세속화의 결과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세속화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본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무조건 예배당을 크게 지으려고 하는 것은 외형지상주의의 세상을 본받는 것 입니다. 물론 교회가 부흥하여 교회의 필요 때문에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교회들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무리해서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건축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경매에 넘어가는 이유는 마땅히 헌신해야 할 교인들이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크고 보기 좋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을 본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배당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외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강단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하여 매주 몇 만 원부터 심지어 몇 백만 원까지 써가며 꽃 장식을 하는 것도 저는 세상을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있어서 자비를 털어서 강단 장식을 하는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에는 분명히 꽃꽂이에 헌신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여 헌신한 경우입니다. 단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강단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른 교회에 갔다가 아름다운 꽃꽂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끔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가 꽃꽂이는 하지 않는 이유는 차라리 그 돈으로 선교하든지 구제 하자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꽃꽂이에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말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일부러 꽃꽂이를 하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기도하고 응답을 받기보다는 회의를 하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 역시 세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 독재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 독재는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의 결정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목사도 교회의 지체이고 장로도 교회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머리 되시는 주님이 시키는 일만하면 됩니다. 단지 목사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비전은 목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일을 할 때 많은 경우 회의를 하여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공산주의 보다는 민주주의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독재자 한 사람의 의견으로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주권을 인정하고 국민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민주적으로 이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것도 역시 세속화입니다.
   
교회의 일군을 세울 때 십일조를 얼마를 하느냐를 보는 것 그리고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가 되려면 일정액의 헌금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일군 선택의 기준 중에 하나로 보는 것도 세속화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택했지 수입이 얼마여야 하고 교회에 얼마만큼의 헌금을 해야 한다는 기준을 두지 않았습니다. 

물론 장로나 안수집사 또는 권사 그리고 서리집사 정도 된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어떤 일이 있을 때 직분에 걸 맞는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서 직분에 걸맞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에서 힘을 다하는 헌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만 세속화 된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세속화 되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인생성공의 기준을 물질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도 세속화입니다. 물론 복음 안에는 물질의 축복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물질의 양을 가지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한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판단입니다. 성경에는 돈은 많았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가난했으나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사람들도 많이 나옵니다.
   
인생성공의 기준을 명예에 두는 것도 세속화입니다. 사회적인 성공이 인생성공, 신앙성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네로 황제나 야고보 사도를 목 베었던 헤롯왕이 성공적인 인생이었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다 복 받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인생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예배와 헌신의 목적을 투자로만 생각하는 것도 세속화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단지 거두는데 목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것 역시 세속화입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관계는 거래가 되면 문제입니다. 우리는 왜 예배해야하고 왜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까?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을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예배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적인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데 두는 것도 세속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잘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고상한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그런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두고 산다면 불쌍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도 달라야 하고 말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옷을 입는 것도 달라야 하고 일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생활의 방법도 달라야 하고 인생의 목적도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인생의 기준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고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2).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이 주인이고 혼이 청지기이기 몸은 종이 되어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자연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것은 영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을 가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그 영 안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이 그 사람의 영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6:17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보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나 예배를 사모하는 것 들을 보면 그 사람의 영이 거듭난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생활은 여전히 옛 생활 그대로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의 혼이 변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혼이 몸을 이길 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혼이 영을 수종들 능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혼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영의 부분이 아니라 혼의 부분입니다. 2절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누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마음, 이해력, 이성, 사고’ 등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영, 혼, 몸 중에 혼의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혼은 영과 몸의 중간자입니다. 혼이 영을 주인으로 알고 몸을 다스리면 신령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혼이 몸을 주인으로 알고 몸에게 순종하면 육신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생활을 하느냐 육신적인 생활을 하느냐에서 중요한 것은 혼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혼이 새롭게 되는 것을 본문에서는 마음을 새롭게 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이 건강하면 생활도 건강하고 영적인 면도 건강해 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건강할 때 몸이 영에게 순종하는 신령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혼이 약하면 거듭났을지라도 몸이 끄는 대로 끌러가기 때문에 육신 중심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혼이 영과 결합되어 강해지면 몸을 쳐서 복종시키기 때문에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소욕이 일어날 때 몸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몸을 쳐서 영에게 복종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은 신령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혼의 부분인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님의 역사로 마음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 방어적이 됩니다. 예를 몸의 상처로 들어봅시다. 발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 만원 지하철을 탔다면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발이 자기 발 부근에 오면 얼른 피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지하철 안에 있는 동안 온통 자기 발에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손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반갑다고 손을 잡으면 아픔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공격으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이런 것을 피해의식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그 상처가 마음에 쓴 뿌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폭력 속에서 자란 사람이 자라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자기가 당한 폭력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쓴 뿌리가 자라게 되고 그 결과 쓴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으로 마음의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혼을 갖게 되고 영을 수종들고 몸을 복종시켜서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분들은 자기의 상처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상처와 관련해서 맺었던 쓴 열매를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상처 있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십시오.
   
둘째,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혼은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지성, 감정, 의지입니다. 저는 이 혼의 기능 중에서 좀 더 중요한 부분이 지성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이 왜곡 되었을 때 감정도 의지도 왜곡됩니다. 그런데 지성이 왜곡된 이유는 진리가 아닌 것들로 우리의 마음이 채워져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쓰레기와 같은 것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들이 들어와서 우리 마음의 기준을 이상하게 변질시켜버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혼에 진리를 넣어서 비진리를 밀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것들을 넣어서 세속적인 것들을 밀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컵에서 공기를 빼내려면 컵에 물을 집어넣으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면 마음속에 있는 세속적이고 비진리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밀어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새로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기도생활이 중요합니다. 빌 4:6,7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진리에 속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기도생활을 하다가 ‘기도해서 뭐하나, 기도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네’라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큰 일입니다. 잠 16:32에 보니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4.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성도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다윗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행 13:36에 보면 다윗의 일생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해 놓았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는 일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길의 지도와 같습니다. 지도를 잘보고 지도가 인도하는 대로 가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 지성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아갈 수도 있지만 길을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는다면 그것도 참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도를 그리신 분으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너무나 잘 아시는 안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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